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6월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자신의 집 근처 공원에서 판사 뒷조사와 재판 거래 의혹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양승태 사법부’에 쓴 소리를 낸, 이른바 ‘블랙리스트 판사’들에게 주어진 인사 불이익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손끝에서 결정된 것으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가 ‘불이익을 주는 방안’과 ‘주지 않는 방안’을 담은 문건을 보고 하면,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볼펜으로 브이(V) 표시를 해 최종 결정을 한 하드카피(종이 형태) 문건이 검찰에 확보된 것이다.
21일 <한겨레> 취재결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은 행정처가 2014∼17년 4년에 걸쳐 작성한 ‘물의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 문건을 확보해, 당시 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 관계자 및 피해 법관들을 잇따라 불러 조사하고 있다. 조사결과, 행정처는 50쪽 가량 되는 이 문건 속에 음주운전을 하거나 법정에서 폭언을 하는 등의 ‘진짜’ 비위 판사들의 목록과 함께, 당시 사법부에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한 판사들 목록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은근슬쩍 끼워넣었다고 한다.
권순일 전 행정처 차장이 대법관으로 제청됐을 때 대법관 다양화가 필요하다는 소신을 밝혔던 송승용 판사,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1심 판결을 ‘지록위마’(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했다는 뜻으로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서 남을 속이려는 짓)라고 비판한 김동진 판사를 비롯해 세월호 참사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글을 언론에 기고한 문유석 판사 등 ‘멀쩡한 법관’ 10여명이 ‘물의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 ‘각급 법원장 참고사항’ 문건 등에 포함됐다. 이들에게는 원하지 않는 지역으로 발령을 내거나 합의부 부장에서 배제하는 등의 인사상 불이익이 주어졌다. 실제로 당시 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에서 근무했던 심의관(판사)들은 최근 검찰 조사에서 해당 인사에 대해 “불이익을 준 것이 맞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특히, ‘물의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에는 양 전 대법원장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의 결재 사인은 물론이고, 해당 법관 각각에 대해 행정처가 “인사 불이익을 주자”는 1안(인사 우선 순위 배제)과 “한번 봐 주자”는 2안(일반 인사 원칙에 따름)이 함께 보고 하면, ‘인사권자’인 양 전 대법원장이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최종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다만, 하드카피 형태인 2014∼16년 문건과 달리, 2017년 문건은 디지털 문서 형태로 확보돼 검찰이 경위를 파악 중이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양승태 대법원’에서 인사권은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1, 2안 중 하나를 미리 결정해 대법원장에게 보고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더욱이 이런 검찰 조사 결과는 그간 양 전 대법원장의 해명과도 배치된다. 올 6월 양 전 대법원장은 경기도 성남시 자신의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재판개입 의혹과 함께 법관 인사 불이익 의혹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당시 그는 “어떤 사법행정 처분에 있어서도 법관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단호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두 가지(재판개입과 법관 인사불이익)는 제가 양보할 수 없는 한계점”이라고 강조했다. 문건이 확보된 데 이어 당시 행정처 관계자들까지 양 전 대법원장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고 있어, 이 말은 거짓말로 판명될 가능성이 커졌다.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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