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검찰에 출석한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왼쪽)은 혐의의 대부분을 임종헌 전 차장에게 미뤘다고 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지난 6월1일 노상 기자회견에서 법적 책임 가능성을 전면 부인했다. 신소영 이종근 기자 viator@hani.co.kr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검찰 조사에서 대부분 혐의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구속기소)에게 미룬 것으로 알려지면서 ‘차단전략’을 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신은 물론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법적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적극적인 방어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검찰의 임 전 처장 ‘윗선 수사’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법조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검찰 핵심 관계자는 21일 “박 전 처장이 대부분 혐의에 대해 계속해서 ‘임종헌 차장이 알아서 한 일’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며 “평소 리더십이 강하다고 알려진 박 전 처장이 ‘전적으로 내 책임이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 모습을 보여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2003년 대검 중수부의 이른바 ‘차떼기 불법대선자금’ 수사 때 검찰에 자진 출석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견주며 박 전 처장의 진술 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박 전 처장처럼 대법관(1988~1993) 출신인 이 전 총재는 당시 검찰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와서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며 관련자의 선처를 요청했다고 알려져 있다.
검찰 수사팀 관계자도 지난 20일 기자들과 만나 “박 전 처장은 ‘실무선에서 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고받은 기억이 없거나, 보고를 받았더라도 사후에 받았다’는 진술이 많다”며 “대부분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 전 처장의 이런 태도를 두고는 대법관을 지낸 법률가답게 고단위 차단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검찰 고위직 출신 변호사는 “박 전 처장은 사건 구조 상 자신이 책임을 인정하게 되면 곧바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한테까지 ‘불길’이 번질 것을 우려하고 있을 것”이라면서도 “이번 사건은 그렇게 해서 차단이 될 구조가 아닌듯하다”고 말했다.
한 법관 출신 변호사는 “박 전 처장이 임 전 차장에게 대부분 책임을 돌리면, 나중에 두 사람이 법정에서 몹시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며 “그런데도 저렇게 하는 것은 법적으로 자신과 양 전 원장을 최대한 보호하려는 선택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박 전 처장 입장에선 많은 혐의점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고, 보고는 받았지만 적극 개입하지 않았거나 나중에 알았다고 하는 것이 양 전 원장과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어책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검찰 조사를 받게 되면 박 전 처장과 비슷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지난 6월1일 집 근처 노상 기자회견에서 ‘예고편’을 보여준 바 있다.
당시 양 전 원장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제가 재직 시에 있었던 뭔가 부적절한 행정처의 행위가 지적되고 한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사법부 수장으로서 ‘도의적 책임’은 인정했다. 그러나 ‘법적 책임’에 대해서는 완강하고 단호한 어조로 부인했다. 재판 관여, 상고법원에 반대한 법관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는 의혹에 대해 그는 “그런 조치를 제가 최종적으로 한 적은 없다는 걸 결단코 말씀드린다”고 강조했고, “이 두 가지는 제가 양보할 수 없는 한계점”이라고까지 말했다. 미리 선을 그은 것이다.
양 전 원장은 또 “사법부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모든 것을 사법부 수장이 다 분명하게 알리라고 하는 건 옳은 말이 아니다”라며 법적 책임을 아래로 미룰 여지를 남겼다.
그러나 이런 대응 전략이 검찰 수사에서 통할지는 미지수다. 수사팀 관계자는 “진술만 가지고 하는 수사는 없다. 법원에서 작성된 문건이 많이 있다”며 증거 확보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강희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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