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농단’ 관련자로 검찰의 수사 대상인 재판장이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1심을 선고하며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를 좁게 해석해 논란이 되고 있다. 해당 재판장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쪽이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언급한 권성 헌법재판관의 소수의견까지 판결문에 적시했다.
9일 우 전 수석의 ‘민간인 사찰’ 판결문을 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31부(재판장 김연학)는 “지시에 따른 하급 공무원의 직무수행 행위가 위법하다는 이유만으로 상급 공무원의 지시가 모두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며 직권남용죄는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직권남용을 확장해 해석하면 형벌의 가벌성을 과도하게 넓힐 소지가 크다”, “죄형법정주의의 기본 이념에 반할 소지가 높다”, “형벌의 최후수단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도 제시됐다. 앞서 해당 재판부는 지난 7일 우 전 수석의 일부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 바 있다.
재판부는 특히 이런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2006년 헌법재판소의 직권남용죄 합헌 결정 때 유일하게 반대한 권성 재판관의 소수의견을 인용했다. 재판부는 “고위직 공무원의 직권은 추상적, 포괄적으로 부여될 수밖에 없고, 권한의 행사는 정책적 재량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고위직 공무원의 공적이거나 사적인 활동을 모두 직권을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취지다. 앞서 임 전 차장의 변호인도 지난달 구속영장 심사에서 권성 재판관의 소수의견을 내세우며 검찰과 구속 여부를 다퉜다.
재판부는 또 하급자에게 한 상급자의 지시가 직권남용이 되는 조건도 매우 까다롭게 제시했다. △상급 공무원 직무의 권한 △지시를 한 경위, 목적 및 그 내용 △상·하급 공무원들의 위법성 인식 △당해 직무수행의 위법성 정도 △하급 공무원의 직무수행으로 인한 결과와 그 이익의 귀속 주체 △통상적인 업무 수행의 태양 △상·하급 공무원의 관계 등을 ‘종합’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직권남용’이 있었는지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을 적용해 재판부는 우 전 수석이 국가정보원에 한 ‘문제 과학 단체 현황을 파악하라’ 지시 등은 무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국정원 직원의 ‘과학 단체 정부 비판 활동 파악’은 국정원법에 위반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공무원의 직무 행위가 법령을 위반했다는 것만으로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면서 “지시의 주된 목적은 정부 비판 세력을 견제·차별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부당한 목적이 없었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사법 농단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법원행정처장(대법관)→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행정처 심의관’의 구조를 거쳐 일어났다. 상급 공무원의 지시를 하급 공무원이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서 사법 농단 사건이 우 전 수석의 사건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판부의 논리대로라면 임 전 차장이나 심의관들이 위법한 일을 저질렀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이나 박병대·고영한 전 행정처장은 빠져나갈 길이 많아졌다. 더구나 재판장인 김연학 부장판사는 2015년부터 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으로 근무하면서 ‘판사 인사 불이익’ 등의 문건 작성에 개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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