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용균씨 동료들이 손수 제작해 시민들에 배포하고 있는 ‘보라색 리본’. 보라색 리본은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를 추모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9일 낮 충남 태안보건의료원 상례원 203호. 부직포와 순간접착제로 만든 ‘보라색 리본’이 가득 담긴 상자가 바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보라색 리본은 캐나다와 영국 등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를 추모할 때 달면서 널리 알려진 상징이다.
지난달 11일 태안화력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한달이 됐다. 용균씨의 가족은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한달 전 수십명의 취재진과 정치인들로 북적였던 태안 빈소는 그들만 사라지고 바뀐 것 없이 그대로다.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이날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한겨레21> 기자와 만나 “아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도 안 됐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렇게 아들을 보낼 수는 없다”며 장례 절차를 미루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연말에 ‘김용균법’이 통과됐을 때 그나마 마음이 좀 좋았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개정된 내용도 부실하고, 저희 같은 발전소 비정규직은 도급 금지 대상에 해당되지 않더라고요. 그때 ‘뭐 하나 하기가 참 쉽지 않구나’라는 걸 느꼈죠. 진짜 어렵네요.” ‘100% 수작업’으로 리본을 만들던 김용균씨의 동료 김아무개(34)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난달 27일 ‘김용균법’이라고 불리며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안은 원청의 안전보건 조처 의무를 확대하고, 도금이나 수은·납·카드뮴을 사용하는 유해·위험 작업의 도급을 금지하는 조항을 도입했다. 하지만 김용균씨가 생전에 담당했던 발전소 연료환경설비 운전 업무는 적용 대상에서 빠졌다. 김용균씨의 동료들이 산안법 개정에 대해 “용균이 이름만 갖다 붙였지, 누구를 위한 법인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하는 이유다.
김용균씨와 함께 일했던 태안화력 하청업체 한국발전기술 동료들은 지난달 13일 태안화력 9·10호기 가동이 중단된 뒤 트라우마 치료 등을 위해 ‘특별휴가’ 중이다. 하지만 휴가 기간 동료 20여명은 매일 김용균씨의 빈소로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용균이가 아깝게 죽었는데,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끝나버리면 용균이만 억울한 거잖아요. 살아남은 우리라도 진상규명을 해줘야죠.” 김용균씨의 동료 한아무개(30)씨의 말이다.
김용균씨 동료들은 지난 한달 “바쁘게 다녔다.” 매일 아침 8시부터 한시간 동안 태안과 서산 버스터미널에서 시민들에게 보라색 리본을 나눠주며 김용균씨의 죽음과 의미를 알리는 거리 홍보에 나서고 있다. 낮에는 트라우마 상담도 받고, 회사에서 받지 못했던 안전교육도 뒤늦게 받고 있다. 저녁에는 태안·서산·천안·아산·당진에서 열리는 촛불추모제에 참석한다.
지난달 12일 오후 충남 태안군 태안읍 태안보건의료원 상례원 203호실에서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김용균(24)씨의 부모가 오열하고 있다. 태안/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날 오전에는 충청남도 인권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태안화력 노동환경에 대한 ‘현장 증언’을 했다. “용균이가 떠난 지 벌써 한달이 됐는데, 기관에서 정식으로 자리를 마련해 저희 이야기를 들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어요. 발전소 업무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지만….” 리본을 만들며 한숨을 쉬던 김씨의 말이다.
유족과 동료 등이 모인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대책위)가 지금 가장 우려하고 있는 건 지난 연말 산안법 개정안 통과로 자칫 시민들이 김용균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위험의 외주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실제 김용균씨 동료들은 최근 태안 버스터미널 앞에서 열린 촛불추모제에 참석했다가 인근 상인들로부터 ‘추모제를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항의를 받았다. 지난 7일 가세로 태안군수가 기자회견에서 “28년 만에 산안법이 전면 개정돼 산업 안전의 사각지대가 줄어들 것”이라며 “지역 경제가 조속히 정상화될 수 있도록 정부 및 노동계 등 각계에 간곡히 호소드린다”고 발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김용균씨 동료들 가운데 선배 격인 김아무개(48)씨는 “11년 전 기름 유출 사고 때 전 국민이 태안에 와서 방제 작업에 매달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태안은 없었을 것”이라며 “태안 지역 경제의 기반은 발전소인데, 발전소 직원들이 안전하게 일해야 상인들도 안정적으로 장사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며 가세로 군수의 발언을 비판했다.
대책위가 제2의 김용균을 막기 위해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두가지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3개 부처가 모두 참여하는 진상조사와 발전 5사의 직접고용을 통한 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다. 발전소 비정규직 문제는 수익성을 기준으로 발전사의 경영평가를 하는 기재부, 발전 5사의 운영을 총괄하는 산업부, 비정규직 차별을 시정해야 하는 고용부의 책임이 모두 얽혀 있는 만큼 이번 진상조사가 고용부만 참여하는 특별근로감독 형태로 끝나선 안 된다는 견해다. 또한 대책위는 과거 고용부의 연구용역 보고서와 법원 판결 등에 비춰볼 때 발전소 경상정비 업무는 공중의 생명·건강 또는 신체의 안전 등을 위태롭게 하는 ‘필수유지업무’에 해당하는 만큼 현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따라 정규직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9·10호기가 멈춘 뒤에는 현장에 가본 적이 없으니까, 업무에 복귀했을 때 트라우마가 나타날지 아직은 모르겠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면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고….”
28년 만에 전면 개정된 산안법은 아직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태안/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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