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재일본한국와이엠시에이(YMCA) 회관을 찾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손자 오이시 스스무(84) 전 일본평론사 회장. 그는 조부의 뜻을 이어 일본 내에서 2·8독립선언 운동을 알리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 독립을 선언하고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한 유학생은 없었다. 그때 조국도 아닌 식민지 재판정에 고립무원의 처지로 선 조선 청년들을 돕겠다고 나선 일본인이 있었다. 나중에 조선 사람들에게 ‘우리 변호사’ ‘조선인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는 후세 다쓰지(1880~1953년) 변호사다. 한-일 강제병합 직후인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주제의 글을 쓰기도 했던 후세 변호사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에 감동해 기꺼이 무료 변론에 나섰다. 이후 박열의 일본왕 암살기도 사건(1923년), 의열단원 김지섭의 일본왕궁 폭탄 투척 의거(1924년) 등을 변론한 후세 변호사는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정부의 건국훈장을 받았다.
핍박받는 식민지 민중을 위한 할아버지의 의로운 변론을 기억하는 오이시 스스무(84·전 <일본평론사> 회장)는 8일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감회가 벅차 보였다. 이날 도쿄 지요다구 재일본한국와이엠시에이(YMCA) 2층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에서 만난 그는 “2·8독립선언서는 1919년 세계대전이 끝나고 약소민족들이 독립하는 세계사적 배경 속에서 ‘사상의 첨단’을 반영하고 있다. 지금 보아도 낡지 않고 새롭다”며 열변을 토했다. 2·8독립선언서를 향한 그의 뜨거운 애정에 마치 후세 변호사가 살아 돌아온 듯했다. 조선인을 변호하던 후세 변호사는 일본에선 변호사 자격 박탈, 출판물 발매 금지 등 불이익을 감수했고, 오이시 역시 그의 손자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엔 따돌림까지 겪어야 했다. 그는 2004년 당시 후세 변호사가 훈장을 받을 때 후손 대표로 대리 수상을 하기도 했다.
묘비에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어서도 민중을 위하여’라고 적었을 만큼 일평생 신념의 길을 걸었던 후세 변호사에게 조선 민중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아는 만큼 오이시는 조부의 뜻을 이어 일본 내에서 2·8독립선언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는 “국제 정세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젊은 청년 정신을 모두 담고 있는 2·8선언서는 지금의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10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도 좀 더 2·8정신이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도쿄/글·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2·8독립운동 때 기소된 조선인 유학생들을 비롯해 박열·김지섭 등 독립운동가의 변론을 맡았다. 2004년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