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법원을 빠져나오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개입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판결을 두고 ‘지록위마’라고 하는 등 법원에 꾸준히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온 김아무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양승태 대법원의 ‘눈엣가시’였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작성된 ‘물의야기 법관 문건’에 매년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양승태 대법원은 2016년에는 ‘물의야기 법관’이 될 별다른 이유가 없자 당사자 몰래 정신감정까지 해 ‘조울증 환자’라는 사유를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한겨레>가 입수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공소장에는 양승태 대법원의 가장 노골적인 ‘직권남용’ 사례로 꼽히는 ‘물의야기 판사 조울증 환자 만들기’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이 과정을 주도한 핵심 실무자다. 공소장을 보면, ‘김아무개 판사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소견을 받아낸 실무자는 현재 서울중앙지법 재판관인 김연학 부장판사다.
2016년·2017년 인사총괄심의관이었던 김연학 부장판사는 김아무개 판사를 ‘조울증 환자’로 만들기 위해 말 그대로 ‘발로 뛰었다.’ 2015년 4월 김아무개 판사는 인천지방법원 판사 전체에게 가족의 투병 등으로 법관 워크숍에 참여하지 못한 경위와 함께, 그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일부 판사들이 자신을 멀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서운함을 적은 이메일을 보낸 바 있다. 김연학 판사는 이 이메일 내용을 평소 알고 있던 강아무개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게 전달하면서 ‘김아무개 판사가 동료 판사 재판을 공개적으로 비난해 최근 징계를 받은 적 있고 과거 불안 장애로 치료를 받은 병력이 있다’며 정신감정을 요청했다. 김 판사가 조울증 치료제인 ‘리튬’을 복용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판사는 정신과 진료를 받거나 ‘리튬’을 복용한 적이 없었다. 김연학 판사가 거짓말을 해가며 ‘정신과적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전문가의 소견을 받아낸 것이다. 이런 내용은 당시 김아무개 판사의 상급자였던 김동오 인천지방법원장에게까지 전달됐고, 김 법원장은 김 판사에 대한 평정표에 ‘정서적인 불안정성이 여전히 잠복되어 있는 상태’라며 ‘하(下)’ 등급을 부여했다. 이는 법원조직법상 법관 연임 제한 사유인 ‘신체상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판사로서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의 근거가 될 수도 있는 사유였다.
사법농단 연루자인 김연학 부장판사는 최근 ‘직권남용’에 대한 판결로 주목을 받았다. 김 부장판사는 작년 12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민간인 사찰’ 1심 판결에서 “지시에 따른 하급 공무원의 직무수행 행위가 위법이라는 이유만으로 상급 공무원의 지시가 모두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며 직권남용죄는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사법농단 재판을 앞두고 사전에 직권남용을 극히 좁게 해석하는 포석을 둔 게 아니냐’는 평이 나왔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사법농단 연루 판사들을 징계하면서 김연학 부장판사에 대해 품위손상의 정도가 약하다는 이유로 ‘불문’ 처분을 내렸다.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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