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보석 심문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검찰은 형사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법원의 자체 조사에도 불구하고 수십명의 검사들을 동원해서 우리 법원을 쥐잡듯이 샅샅이 뒤져서 흡사 조물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300여페이지나 되는 공소장을 만들어 냈습니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이 공소장이 무에서 무일 뿐이라는 것을 밝혀야 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사법농단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돼 구속기소된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이 작심한 듯 검찰 수사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검찰 수사는 법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으며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는 검찰이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26일 오후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을 심리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은 양 전 대법원장의 보석 심문 기일을 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19일 법원에 200자 원고지로 81자 분량의 보석청구서를 제출한 바 있다.
양 전 대법장은 이날 수의가 아닌 넥타이 없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양복을 입은 채로 법정에 들어섰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수척한 표정으로 피고인석에 앉았다. 양 전 대법원장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달 24일 구속된 뒤 33일 만이다. 이날 1시간 동안 진행된 보석 심문 말미에 발언 기회를 얻은 양 전 대법원장은 원고도 한 번 쳐다보지 않고 재판부만 응시한 채 13분 동안 검찰 수사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먼저 “얼마 전에 구치소에 수용돼있는 사람이 내가 수감돼있는 방 앞을 지나가면서 ‘대한민국 검찰이 참 대단하다. 우리는 법원을 하늘같이 생각하는데 검찰은 법원을 꼼짝 못 하게 하고, 전 대법원장을 구속까지 시켰으니 정말 대단하구나’ 이야기했다. 저는 그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운을 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조사받는 과정에서 검찰에서 우리 법원의 재판에 관해 잘 이해를 못 하고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저 옆에서 들려오는 몇 가지 말이나 스쳐 가는 몇 가지 문건을 보고 쉽게 결론을 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더군다나 대법원의 재판 과정에 대해서는 너무 이해가 없어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검찰 수사를 비꼬았다. 이어 “제 재임 기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책임을 면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몇번이나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사실 왜곡까지 전부 용납하겠다는 것은 아니”라며 “오늘도 이 법정에서 우리 검사들께서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말도 덧붙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저는 이런 무소불위의 검찰과 마주 서야 한다. 무소불위의 검찰에 비해 제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호미자루 하나도 없다. 이뿐만 아니라 20여만 페이지에 달하는 증거와 증거서류가 내 앞을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다”고 말했다. “책 몇 권을 두기도 어려운 좁은 공간에서 그걸 검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 “견강부회”라고 일축했다.
검찰은 이날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증거인멸을 시도했다는 검찰의 주장도 나왔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은 퇴임 전 자신의 업무용 컴퓨터에 대해 디가우징을 지시했고 차량 압수수색 과정에서 변호인 통해 차량에 달린 블랙박스의 에스디(SD)카드를 의도적으로 폐기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법 농단으로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윗분들이 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말하겠나, 내가 안고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며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른 전·현직 법관 진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 또한 강조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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