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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일제강점기 때 시작된 ‘낙태죄’ 처벌 107년 역사 살펴보니

등록 2019-04-11 14:55수정 2019-04-11 22:44

1912년 시행 조선형사령에 첫 처벌 조항
나치 독일 ‘단종법’과 일본 ‘우생보호법’에 뿌리
한해 10만건 이상 시술…처벌 수십건 불과 ‘사문화’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현 처벌조항 내년까지만 유효
임신중지가 불법인 나라의 여성들에게 인공유산 유도약 보급 활동을 벌이는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 대표 레베카 곰퍼츠가 2018년 7월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 결정과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전국총집중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들은 “낙태(임신중지)를 형법으로 처벌하고,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을 범죄자로 낙인찍으면서, 한 사회의 재산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오롯이 전가해 왔던 시대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임신중지가 불법인 나라의 여성들에게 인공유산 유도약 보급 활동을 벌이는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 대표 레베카 곰퍼츠가 2018년 7월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 결정과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전국총집중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들은 “낙태(임신중지)를 형법으로 처벌하고,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을 범죄자로 낙인찍으면서, 한 사회의 재산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오롯이 전가해 왔던 시대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법으로 낙태 행위를 처벌하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일본 형법을 조선에 적용해 1912년 시행된 ‘조선형사령’에서는 낙태한 여성에게는 1년 이하의 징역을, 낙태를 시술한 의사·산파·약제사 등에게는 3개월 이상 5년 이하 징역을 선고하도록 했다. 중국 명나라 형법을 따랐던 조선시대에는 상해로 인해 낙태될 경우 상해를 입힌 가해자를 처벌할 뿐, 낙태 여성 등 처벌 규정은 따로 없었다.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돼 독자적 법체계를 갖추면서 낙태죄 존폐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지만, 1953년 법전편찬위원회가 내놓은 형법은 낙태죄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형량은 1년 이하의 징역형 또는 2만원 이하의 벌금형(여성), 2년 이하의 징역형(의료진)이었다. 당시 낙태죄는 인구 조절을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로 인식됐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인구가 줄어들자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인구가 4천만명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힘을 얻었고, 낙태는 개인적 선택을 넘어 사회적 범죄로 취급되는 게 당시 사회 분위기였다. 다만 낙태죄를 존속시키되 특별법을 만들어 특수한 경우에만 낙태할 수 있도록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을 고려한 특별법은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졌다.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 8조(현재 14조)가 그것이다. 이 조항에서는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나 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 또는 인척간의 임신, 엄마의 건강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 한해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당시 모자보건법은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모방해 만들어졌다. 우생보호법의 낙태 허용 조항에서 ‘나병’을 ‘전염성 질환’으로만 바꿨을 뿐, 나머지 내용은 그대로 옮겨왔다. 당시 법률 입안 작업에 관여한 김택일 보건사회부 모자보건반장도 <인구정책 30년>(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년)에서 “일본 ‘우생법’을 참고로 했다”고 고백했다. 그나마 일본 우생보호법은 낙태 허용 조건 가운데 하나로 ‘경제적 이유’를 들고 있었지만, 모자보건법에서는 이 조항이 빠졌다.

한국이 베끼다시피 한 일본의 우생보호법은 1949년 독일의 ‘국민우생법’을 참고해 만들어진 법률이다. 또 국민우생법은 우생학적 이유로 강제 불임 시술을 하도록 하는 나치 시대 ‘단종법’을 뿌리로 하고 있다. 결국 낙태죄 처벌조항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에 바탕해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적 법률과 연결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임신 20주 이후 태아의 낙태를 금지하고 낙태 시설을 엄격히 규제하는 내용의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다른 주에서 추진되는 낙태금지법안도 제동이 걸렸다. 사진은 위헌 결정 후 낙태찬성론자들이 워싱턴DC의 연방대법원 앞에서 기뻐하는 모습. 워싱턴 AP=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은 임신 20주 이후 태아의 낙태를 금지하고 낙태 시설을 엄격히 규제하는 내용의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다른 주에서 추진되는 낙태금지법안도 제동이 걸렸다. 사진은 위헌 결정 후 낙태찬성론자들이 워싱턴DC의 연방대법원 앞에서 기뻐하는 모습. 워싱턴 AP=연합뉴스
1970년대 이후 산아제한 정책이 추진되면서 낙태는 암묵적으로 비범죄화됐다. 하지만 1985년 대법원은 “의사의 낙태 시술은 사회 상규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결해 사문화돼가던 낙태죄를 부활시켰다. 또 남아선호 사상에 따른 여아 낙태 관행이 여전하자, 정부는 1987년 태아의 성별을 미리 알려주면 의사면허를 취소하고 3년 이하 징역을 선고하도록 처벌조항을 강화했지만(2010년 징역 2년으로 환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2011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가임기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임신중절률)는 15.8건이었다. 1000만명이 조금 넘는 당시 가임기 여성 숫자를 고려하면, 한해 낙태 건수가 17만~18만건에 이른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낙태죄로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기소되더라도 처벌 수위는 매우 낮았다. 법원행정처 사법연감을 보면 2015~17년 사이 낙태죄 1심 판결은 53개에 불과했고, 선고된 형량은 집행유예(23건) 또는 선고유예(21건)가 80% 이상을 차지했다. 징역형은 3건에 불과했다.

낙태죄는 임부 못지않게 산부인과 의사들 사이에서도 오랜 고민거리였다. 2010년에는 낙태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모임인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 수술을 한 의사와 병원을 고발하고 나서기도 했다. 2013년부터 이듬해까지 임신중절 시술을 69차례 했다가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 정아무개씨는 2017년 2월 헌재에 헌법소원을 청구했고, 이 헌법소원이 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이어져 낙태죄는 109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최규진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낙태죄의 역사>, <낙태에 대한 개방적 접근의 필요성-한국 낙태 정책에 대한 역사적·보건학적 고찰을 중심으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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