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광복절을 앞두고 한―일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비록 경제 갈등의 형태로 촉발되긴 했으나, 그 뿌리엔 오랜 역사적 갈등이 놓여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사회 우경화와 맞물려 고조되고 있는 혐한 분위기의 문화적 기원에 대한 관심도 높다. 반면 우리 사회 내부의 과도한 ‘애국주의’ 움직임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일 갈등을 우리 사회 내부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일본 현대사를 오랫동안 천착해온 전문가 2인의 외부 기고와 관련 토론회에서 나타난 논의들을 소개한다.
일본의 전쟁범죄(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한-일 간의 오랜 ‘역사 갈등’이 양국 간 ‘경제전쟁’까지 불렀다. ‘전쟁’은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징용) 피해자들이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 등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최종 판결을 내린 뒤 본격화했다. 대법원 판결 바로 뒤인 지난해 11월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집권기인 2015년 12월28일 일본 아베 신조 정부와 맺은 ‘위안부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이라고 선언된 그 합의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 피해 당사자들과의 상의 및 동의 절차도 없었으며, ‘소녀상’ 철거 등의 이면 합의까지 담고 있다는 게 근거였다. 당연히 일본 정부는 반발했다.
과거사의 상처가 정부 간 합의나 협정, 선언만으로 치유되고 종결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자 ‘아베 정권 역사 갈등’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 ‘김학순 증언’이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입니다.” 1991년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공개 증언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려졌던 ‘전후 질서’의 치부 하나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세계의 다른 수많은 유사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나섰고, 그들이 당한 폭력은 인도에 반하는 죄, 보편적 인권문제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김학순 증언의 충격 속에 1993년 처음으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일본군 및 관헌의 직접 개입을 인정한 ‘고노 담화’가 발표됐다. 그해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가 무너진 뒤 등장한 호소카와 모리히로 비자민 연립정권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시인하고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했다. 1995년엔 식민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됐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이미 다 해결했다’던 1965년 한일 협정과 그 토대가 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제 아래 고도성장과 번영을 구가했던 일본의 ‘전후 체제’가 흔들렸다.
‘김학순 증언’은 ‘87년 체제’로 대표되는 한국의 민주화가 선행됐기에 가능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로 이어진 동서 냉전 붕괴에 대한 반작용으로, 1990년대 중후반 일본에서는 우익 이데올로기들과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1996년)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 ‘일본회의’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 ‘신도정치연맹 국회의원 간담회’ ‘다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등이 그때 만들어졌다.
1991년에는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를 만든 A급 전범 출신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자 당시 외상이던 아베 신타로의 아들 아베 신조가 아버지 지역구(야마구치 4구)를 물려받아,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1993년)됐다. 그가 훗날 최대 우익단체 일본회의로 수렴되는 여러 단체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게 1995년 무렵이다. 아베가 신봉한 자유주의 사관은 전승국 미국이 강요한 이른바 ‘도쿄재판 사관’과 사회주의 역사관인 ‘코민테른 사관’,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대동아전쟁 긍정 사관’ 모두를 배격한다고 표명했다. 하지만 지금 아베 정권 각료 대다수가 가담하고 있는 일본회의가 공개적으로 ‘대동아전쟁 긍정 사관’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 자유주의 사관 역시 일제 침략전쟁을 아시아민족 해방전쟁, “영광스러운 제국주의 전쟁”이라 주장하는 골수 우익 사관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이웃나라들과의 갈등을 끊임없이 유발하는 ‘아베 역사 갈등’ 문제의 핵심이자 본질이다. 2015년 전후 70년 총리 담화에서 아베가 “러-일 전쟁은 식민지배하에 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한 게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 담화에서 아베는 “저 전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우리의 자손, 그리고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안겨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세계를 냉전 붕괴 이전으로 되돌리거나, 독일처럼 과거사를 그대로 인정하고 진정 어린 사죄·배상을 통해 화해하지 않는 한 그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한승동 언론인·전 <한겨레>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