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광부’로 일하며 갱내 작업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작가 전제훈씨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철암탄광역사촌에서 걸린 자신의 작품 앞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태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어렸을 때는 매일 일기를 썼다. 학교에 제출하기 위해 날씨를 적고 그날 있었던 일을 빼놓지 않고 적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잠들기 직전까지의 일들이 적히곤 했다. 일기는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어제와 오늘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날씨를 제외하면 몇개월 전에 쓴 일기가 오늘의 일기와 비슷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때 내가 한 것은 기록이라기보다 기술(記述)에 가까웠다. 일이 벌어진 시공간에 정작 내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기록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사실을 적고 장면을 담는 사람의 눈빛을 떠올린다. 그는 왜 기록하려는 것일까. 왜 남기고자 하는 것일까. 기록의 가장 큰 목적은 두고두고 기억하는 데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친구를 만나 사진을 찍는다. 여행을 갈 때마다 카메라를 든 손이 분주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광부이자 사진작가인 전제훈(56)에게 기록은 남다른 것이었다. 광부 사진을 찍는 광부인 그는 지난 30년 동안 현장에서 일했다. 그에게 현장은 남들처럼 노동의 땀을 흘리는 곳인 동시에 없어질지도 모를 자취를 기록하는 곳이었다. 그때의 마음은 노동의 필요와 기록의 필요가 합쳐진 것이다. 1980년대 후반, 국가 경제가 고속 성장하고 청정에너지 요구가 커지면서 석탄 산업은 급격한 사양길로 들어섰다. 주민들은 인근 도시로 빠져나갔고 지역경제가 침체됐다. 전제훈이 사는 태백이 대표적인 곳이다. 국내 탄광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전제훈의 기록이 남다른 이유는 그가 광부의 눈으로 광부를 찍기 때문이다. 우리는 으레 다른 것을 응시하려고 한다. 여기가 아닌 저기를, 집 안이 아니라 바깥을, 잡동사니가 아니라 경치를, 일상이 아니라 특별한 순간을. 그래야 내가 몸담고 있는 시공간의 의미가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제훈은 자신을 여기에 있게 해준 탄광과 광부를 담으려고 마음먹었다. 있던 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기록은 다른 층위의 행동이 된다. 역사의 뒤안길로 희미해지는 것을 어떻게든 지금 여기에 붙들어두려는 안간힘이다.
지난 14일 전제훈이 있는 태백의 철암탄광역사촌을 찾았다. 해발고도가 높은 태백에는 이미 가을이 성큼 와 있었다. 탄광 옆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니 이야기를 흡사 채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2019년 4월 광부들 입갱하다. 전제훈 제공
삶의 터전 사라진다는 불안감
―코너 제목이 ‘요즘은’입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예전에도 광부였고 현재도 광부예요. 아직 정년(60살)이 몇년 남아서 그때까지도 광부 생활을 할 거 같아요.”
―광부 일을 언제부터 시작하신 건가요?
“제가 81학번이에요. 1983년에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 졸업했습니다. 졸업할 당시에 광산보안기사, 화약류관리기사 등 각종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처음에는 함태탄광에 보안계원으로 취업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작업반장이라고 불리는 일이에요. 자격증 덕분에 특례를 받기도 했죠. 갱내에서 채탄, 굴질, 화약 관련 일을 하며 5년을 근무하면 병역을 면제해주었거든요. 막장 인생의 시작이었죠.”
―대학 입학 때부터 광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나요?
“전공으로 선택했던 학과가 자원공학과였어요.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취업이 잘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강원도 지역 특성상 광업에 대한 관심이 높기도 했고요. 석유와 가스 매장량이 많다고 알려진 제7광구 같은 데서 일할 수 있다는 소문도 있었고요. 졸업할 때가 되니 취업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어요. 저는 취득한 자격증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직장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어제 야간작업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탄광에서는 주간작업, 야간작업이 따로 있는 건가요?
“밤이든 낮이든 하는 일은 비슷해요. 오늘도 야간작업이 있어요. 3교대거든요. 대한석탄공사는 2교대고요. 민영 탄광인 우리 경동탄광은 아직도 3교대를 하고 있습니다.”
2교대든 3교대든 매주 주야간 근무가 바뀌기 때문에 심신이 힘들다고 했다. 아침조와 저녁조로 나뉘는 2교대와 달리, 갑방(아침 8시~오후 4시), 을방(낮 12시~저녁 8시), 병방(오후 4시~밤 12시)으로 나뉘어 근무가 진행되는 3교대 근무는 체력적으로 더욱 힘들다. 그가 근무하는 경동탄광은 오랫동안 3교대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경동탄광에는 몇분이나 재직하고 있나요?
“갱내외 다 합쳐 900여명입니다. 갱내 600여명, 갱외 300여명입니다.”
―석탄 수요가 많이 감소됐는데도 채굴을 계속하는 이유가 있나요?
“광부 입장에서 제일 불안한 게 에너지 정책이에요. 그린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인식이 바뀌었잖아요. 화석에너지가 곧 사라질 시대잖아요. 대한석탄공사 같은 경우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없어지는 걸로 정해져 있어요. 덩달아 민영 탄광도 없어질지 몰라 광부들은 불안감을 갖고 있어요. 직업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인생을 투자했는데, 삶의 터전이 없어진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하지요.” ―출근할 때 이 탄광이 언젠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실 것 같아요.
“제 인생의 근본이 없어진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상당히 아쉽습니다. 자랑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가치 있는 직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88년, 전국에는 347개 탄광이 있었다고 한다.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1996년에는 11개로 축소되었다. 2019년 현재, 강원도 도계(道界)에는 공기업인 대한석탄공사에서 운영하는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 그리고 민영 탄광인 경동광업소 세곳만 남아 있다. 폐광으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위의 탄광에 재취업하기도 했다. 지금 탄광에서 일하는 이들은 스스로 ‘마지막 광부들’이라는 생각으로 갱내에 들어간다. 전제훈의 직업 터전이었던 탄광은 이제 기록 현장이 되었다. 석탄이나 광물을 캐는 것만큼이나 현장의 사진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었다.
2017년 11월 갱에서 작업하다 잠시 숨돌리다. 전제훈 제공
“별과 막장, 나는 검은 곳과 연결되는 사람”
―언제부터 사진을 찍으셨나요?
“중학교 때 친구들 기념사진을 제가 찍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고요. 첫 직장인 함태탄광에서 보안계원을 할 때 태백에 함박사진동우회라는 게 있었어요. 1986년부터 동우회 활동을 시작했어요. 집에 작은 암실을 만들어 인화도 직접 했고요.”
―그때는 주로 어떤 사진을 찍으셨나요?
“그때부터 광부 사진을 찍었어요. 기록한다는 의미보다는 공모전에 낼 요량으로 사진을 찍었죠. 1986년에 전국 단위 공모전에서 동상을 받기도 했어요.”
―직업에 대한 애정과 사진에 대한 애착 모두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직장생활과 취미생활을 둘 다 재밌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9년에 광산에서 사고가 났어요. 광산이 붕락하면서 순직자가 발생했어요. 보안계원인 제가 책임자나 마찬가지인데, 도저히 갱내에서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트라우마 때문에 갱내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갱외에서 일할 수 있게 직종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죠.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기획과나 화약고 같은 데로 발령받아 일했죠. 이때 생긴 트라우마가 평생을 가는 것 같아요. 아직도 가끔씩 꿈에 나타나요.”
전제훈은 갱외에서 일하다가 1995년에 일반 광산(일반 광물을 채굴하는 곳)으로 직장을 옮겼다. 지하철 공사 현장이나 도로 터널 현장 등 화약류 폭발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2009년 다시 태백의 탄광으로 돌아왔다.
전제훈은 광산이나 갱도라는 말보다 ‘막장’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그가 말하는 막장은 ‘갱도의 막다른 곳’을 일컫는 말이다. 막다른 곳을 뚫어야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 폭발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곳에 발 디딜 수 있다. 비슷한 의미로, 막장에서 광물을 캐는 일을 가리켜 ‘막장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백으로 돌아오기 싫지는 않으셨나요?
“오기 싫었습니다. 아이 대학 등록금 지원 등의 이유로 다시 돌아오긴 했는데, 탄광 생활에 적응하는 데 한 3개월 걸렸어요. 나 자신을 한탄하는 날들이었어요. 그렇게 슬플 수가 없더라고요.”
―트라우마 때문에 더욱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래도 여기 오셔서 카메라를 다시 잡으셨잖아요.
“맞아요. 전에는 공모전용 사진을 찍거나 탄광에서 요구하는 사진을 찍었는데, 2009년부터는 풍경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이따금 탄광을 찍기도 했고요. 태백의 모든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은하수 사진을 찍었어요. 별 보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밤하늘도 검고 막장도 검잖아요. 나는 검은 곳과 연결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지요.”
전제훈은 2017년, 초청된 국내외 작가들이 작품을 창작하고 전시하는 철암탄광역사촌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철암탄광역사촌 관장이자 한국미술협회 강원도지회 지회장인 김기동의 권유로 그는 다시 한번 사진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게 된다. 때마침 인터뷰 현장을 찾은 김기동은 전제훈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만들어진 느낌이 아닌 이야기하는 느낌, 곁에 다가와 말을 거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전제훈의 대표적 작품은 역시나 광부들 연작인데, 그가 찍은 갱내의 검은 사진에는 내부자만 잡아챌 수 있는 빛과 온기가 있다.
철암탄광역사촌은 옛 탄광촌 주거시설을 보존하거나 복원한 곳으로, 30년 전 탄광촌 풍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역사촌 전체가 국내 석탄 산업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할 수 있는 생활사박물관인 셈이다. 페리카나치킨은 사료전시관으로, 호남슈퍼는 사진 갤러리와 전망대로, 봉화식당은 석탄의 방으로, 한양다방은 희망의 방으로 꾸며져 있다. 원래 있었던 상점들을 허물지 않고 문화 공간으로 꾸민 것이다. 역사촌 입구에 있는 푯돌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남겨야 하나, 부수어야 하나 논쟁하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들이 무수히 사라져갔다. 가까운 역사를 지우는 작업이 계속된다면, 다음 세대는 박물관의 이미지 자료나 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레지던스 작가가 되니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아마추어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2017년과 2018년에는 동강국제사진전에, 2018년에는 강원국제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등 레지던시 활동을 하면서 사진을 많이 배웠어요. 사진전과 비엔날레는 일종의 공모전이에요. 제가 찍어둔 광부 사진을 응모했는데 당선된 거죠.”
―세차례의 국제사진전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겠군요.
“주제를 바꾸게 된 계기가 됐죠. 이전에도 탄광 사진을 찍긴 했지만 기록의 중요함을 느끼지는 못했거든요. 제가 현직 광부잖아요. 출품한 광부 사진으로 인정받은데다 광산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제대로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그때부터 내부자의 몸과 광산 기록자의 마음으로 막장에 들어갔지요. 지금까지는 막장을 전문적으로 찍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지역 작가들이 외부자의 시선으로 가끔 갱내를 찍어 발표하는 수준이었으니까요.”
―광산을 이해하는 사람이 현장의 땀내까지도 렌즈에 담을 수 있나 봅니다.
“그게 바로 저더라고요. 하다못해 동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막장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하잖아요.”
―외부인 앞에서는 선뜻 드러내지 않는 모습도 있을 테고요. 가령 옷 갈아입는 사진 같은 것은 내부자이기에 찍을 수 있는 사진 같아요.
“외부 작가들이 찍을 수 없는 사진을 찍어야죠. 저는 사진작가이기 이전에 탄광 기록자입니다. 기록을 많이 남겨야 하죠. 광산의 흔적이 없어지고 있고 시간이 흐르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친분이 있어도 동료들이 부끄러워하거나 불편해하지는 않나요?
“처음에는 자신들의 리얼한 모습을 조금씩 불편해하고 싫어했어요. 막장에 복귀하고 거의 10년을 함께했잖아요. 지금은 오히려 동료들이 도와줘요. 편한 듯 무심하게 행동하죠.”
―사진을 보며 본인들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겠어요.
“처음부터 동료들에게 4×5㎝ 사이즈로 사진을 출력해서 줬어요. 사진을 찍는 것도 일종의 소통인데, 소통을 위해서는 유대감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제 동료들은 자신의 광부 모습 사진을 궤짝으로 갖고 있어요.”
―갱내에서는 일하며 사진 찍고 퇴근 뒤 숙소에서 그 사진들을 편집하고 보정하시나요?
“처음엔 그랬는데 지금은 못 해요. 하루에 찍는 양이 원체 많거든요. 1년 이상 찍은 게 아직 쌓여 있어요. 매일 찍어도 갱내는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들은 하드디스크에 담겨 있나요?
“3테라짜리가 여섯개 있어요. 무엇보다 ‘기록이 먼저다’라고 생각한 거죠. 찍어둔 사진들 중 일부를 골라 올해 7월 <광부 1>이라는 제목의 작품집을 냈어요.”
작품집 출간과 동시에 그는 지난 7월27일~8월4일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 ‘검은 영웅들’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막장의 빛과 어둠을 주요 콘셉트로 삼았다. 작품집에 실려 있는 사진에는 따로 제목이 없다. 그들은 모두 광부이고, 동시에 검은 영웅들이기 때문이다. 밤하늘에서 여전히 별이 반짝이듯, 광산에는 아직 검은 영웅들이 있다.
2018년 5월 갱내 막장 간이식당에서 점심 먹다. 전제훈 제공
기록이 없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예전과 비교했을 때, 탄광에서 일하기가 많이 편해졌나요?
“시설은 많이 현대화되었지만 환경은 똑같아요. 갱내에 들어가는 한, 먼지와 탄가루에 노출될 수밖에 없죠. 진폐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분들에게 탄광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곳일까요?
“‘검은 영웅들’ 전시를 할 때 태백 진폐협회 회장님이 40~50명의 회원을 모시고 왔어요. 자신들이 근무할 때 모습과 똑같다며, 예전에는 사진이 없어서 안타까웠다며 사진을 많이 남겨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라고요.”
―사진 찍는 것 외에 기록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작년에 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시야가 넓어졌어요. 일반적인 사진뿐 아니라 설치미술이나 음악 등에도 관심을 갖게 됐지요. 거기서 착안한 것이 물건을 모으는 일이에요. 지금은 갱내 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광부들이 쓰던 안전모, 안전등, 마스크, 작업복, 수건, 장갑, 곡괭이 등 광산의 흔적들을 다 수집하고 있어요.”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사명감이 더욱더 커지겠어요.
“늦었지만 위기감이 생긴 거죠. 누군가는 해야 할 기록을 아직 못 했잖아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기록이 없는 역사는 기억되지 않는다고.”
―아직 몇년이라는 시간이 더 남았잖아요.
“앞으로 1~2년 이내에 석탄 감산으로 인한 퇴직이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근무 여건도 바뀌겠지요. 3교대가 2교대로 바뀌고 자연히 석탄 생산량도 줄어들 거예요. 저도 제 앞일이 많이 걱정됩니다. 일도 일이지만, 사진을 많이 찍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봐서요.”
―은퇴 뒤 계획을 여쭤봐도 될까요? 전업 작가로 활동하실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전 전업 작가가 될 능력이 없어요. 은퇴 뒤에는 태백광산 주변 풍경, 광산 사택, 광산 폐석장 등 광산의 흔적을 찍을 생각이에요. 여기가 다름 아닌 제 현장이잖아요. 역사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묵묵히 제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작가님께 어둠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밤하늘이나 탄광 내부나 깜깜하잖아요. 지금껏 어둠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오시기도 했고요.
“어둠이란 새로운 빛을 찾을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시작’과 마찬가지죠.”
철암탄광역사촌 호남슈퍼 지하에 있는 사진 갤러리에는 전제훈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벽면에 큼지막하게 쓰인 그의 글을 읽는다. “나는 화학류 관리 기사로 철암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동료들의 모습을 기록하며 이 시대의 유산으로 소멸될 위기의 흔적들을 기억하고 카메라 렌즈 안에 담는다.”
전제훈은 오늘도 기억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첫 사진집 제목을 <광부 1>이라고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언젠가 <광부 2> <광부 3>을 내기 위한 굳센 다짐 같은 것이다. 광산이 문 닫거나 자신이 퇴직하는 그날까지, 그는 당분간 막장만 찍을 것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은 전제훈이 야간작업을 하는 날이었다. 밤에 밤보다 더 깜깜한 탄광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겸손한 뒷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는 오늘도 새 빛을 찾아 기록을 ‘시작’하러 간다.
녹취 원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