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현미를 먹고 자라는 ‘킹스파머스’의 병아리들. 킹스파머스 제공
경북 경주 천북면의 논길이 끝나는 곳. 허름한 농장들이 길게 이어진다. 좁은 도로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농장(계사) 건물 안, ‘A4용지 한 장의 세상’이 펼쳐진다. 산란계(달걀 낳는 닭)를 밀집 사육하는 ‘공장’이다. 닭들에게는 A4용지 한 장 정도 공간이 주어진다. 몸을 꼭 붙이고, 평생 날갯짓을 잊고, 기계처럼 날마다 달걀 낳기를 반복한다. 1년이면 생산성이 떨어져 ‘퇴출’된다.
달걀 낳는 닭들이 한 해 남짓이자 평생을 갇혀 지내는 집은 ‘3층 혹은 4층 아파트형 공장’이다. 3~4단 케이지(닭장)에서, 닭 위에 닭이 놀고 그 위에 또 닭이 층층이 살아간다. 이들이 쏟아내는 오물은 케이지 틈틈이 찌들어 있다. 자세히 보면 진드기의 온상, 살충제 없이 감당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마을 안쪽엔 8층 케이지를 올려세워 생산성을 극대화한 신축 계사도 들어서 있었다.
닭의 일생
산란계 병아리는 태어나는 첫날 운명이 정해진다. 수평아리로 감별되면 유정란 농장으로 출하되거나 분쇄기로 들어가 하루짜리 일생을 마감한다. 암평아리는 마취 없이 기계로 부리가 잘리는 천형의 고통을 겪는다. 공장식 밀집사육의 길로 들어서는 필수 과정이다. 좁은 닭장에 갇혀 지내게 될 닭들은 생애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게 심해지면 서로 항문을 쪼고 그 속의 내장이 흘러 죽게 되는데 그런 사고를 원천 봉쇄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동물보호단체에서는 마취 없이 병아리 부리를 자르는 ‘고문’을 금지하라고 계속 촉구한다.
태어나자마자 부리 잘린 병아리는 70일가량 또래 병아리들과 함께 길러진다. 주기적으로 백신을 접종받는다. 빽빽한 케이지에서 70일을 갇혀 지낸 병아리는 나중에 들판에 풀어놔도 날지 못한다. 다리 힘이 퇴화했고 날아오르는 본능을 상실했다. 70일이 지나 평생의 ‘공장’으로 들어온 산란계는 수시로 살충제와 항생제의 도움을 받는다. 제힘으로 질병을 이겨낼 면역력이 약할 대로 약해져 있다. 한 농장주는 “살충제 달걀 파동 뒤로 약 사용을 자제한다”면서도 “하지만 닭을 지키고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전혀 안 쓸 수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닭의 부활
경주의 전형적인 공장식 밀집사육 농장 마을에 돌연변이가 생겼다. ‘킹스파머스’라는 동물복지 농장이 들어섰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물복지보다 요건이 더 까다로운 유기축산 농장이다. 5년 전 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기혁(50) 대표가 아버지의 기존 공장식 닭농장을 확 바꿔놓았다. 달리 말하면, ‘닭의 부활’ 선언이다. 동물보호단체에서도 여 대표의 도전에 관심을 보인다. 공장식 밀집사육을 하다 동물복지나 유기축산으로 바꾼 국내 닭농장의 전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억~수십억원의 막대한 투자가 들어간 기존 공장식 시설을 포기하기 어렵고 수익성 전망이 불투명하다. 지난 4월과 9월 두 차례 경주를 방문해 공장식에서 유기축산 농장으로 대전환한 모험의 현장을 살펴보았다.
“사실 결정적 계기는 닭보다 사람이었어요. 너무 힘들어하시는 어머니 때문이었죠. 공장식 축산에 매여서 하루도 못 쉬셨어요. 아버지가 꾸리던 계사가 여섯 동, 하루 3만 개 달걀이 나왔어요. 닭을 케이지에 넣어놓고 기계로 일일이 관리하려니, 어머니한텐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었어요. 주객이 전도돼, 사람이 일의 노예가 됐어요. 닭은 닭대로 죽어나고 있었고요. 이러다가는 사람도 죽고 닭도 죽는다는 두려움이 들었어요.” 여 대표의 말이 이어졌다. “자연농법으로 닭을 풀어놓고 키우면 사람 노동력이 적게 들고, 그러면 어머니가 쉬실 수 있겠다 싶었어요. 사람도 동물도 복지를 누릴 수 있는 행복한 농장을 꿈꿨어요.”
튼튼한 병아리 직접 길러
유기축산에 도전하면서, 병아리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70일 자란 병아리를 받아왔더니, 산란통에도 날아오르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병아리 100마리가 들어가는 상자를 특별히 제작하고, 밤 기온이 영하 가까이 떨어지는 2~3월과 10~11월에 보온 없이 튼튼한 병아리를 길러냈다. 첫 먹이부터 굵은 통현미를 먹였더니, 내장이 굵어져 병에 잘 걸리지 않았다. 댓잎과 산야초를 통현미에 섞어 먹이다가 유기농 곡물로 발효시킨 다양한 자가 사료와 토착 미생물을 먹였다.
“농장을 이렇게 바꾸는 걸, 아버지가 가장 심하게 반대했어요. 병아리를 추운데 그냥 방치하고, 백신 접종도 하지 않는다고 야단치셨죠. 그런데 한 마리도 죽지 않는 거예요. 신기해하다가 결국 격려해주시더군요. 닭들한테 면역력이 생기니, 더위나 추위나 강하게 이겨내는 겁니다.”
부엽토 덮고 미생물 뿌려
여 대표는 지금 3600마리의 건강한 유기축산 닭을 기르고 있다. 땅에 놓아 기르는 평사 사육의 요건이 평당 29마리 이내인데, 킹스파머스에서는 평당 7마리의 여유로운 공간을 유지하고 있다. 흙바닥 위에 30㎝ 두께의 부엽토를 덮어, 닭들이 마음껏 흙목욕을 하도록 했다. 닭장 안으로 들어서도 고약한 계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부엽토에 볏짚을 살짝 덮어주고 주 한두 차례 좋은 미생물을 뿌려줘요. 부엽토는 한 달에 두세 번 뒤집기를 해주죠. 그렇게만 해줘도 냄새가 안 나요. 닭은 날아오르려는 본능이 있어요. 힘센 놈일수록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고 하죠. 서열 본능을 유지하도록, 횃대도 높은 것과 낮은 것 여러 개를 만들었어요.”
어두운 공장식 계사와 달리, 닭들이 밝고 따뜻한 햇볕을 넉넉히 쬘 수 있도록 했다. 공장식 계사에서는 달걀 껍데기 색깔을 좋게 내기 위해, 조도를 낮게 유지한다. 어두워지면 잠이 드는 게 닭의 본능이나, 공장식 사육에서는 최대한 많이 먹고 달걀을 많이 낳도록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는다. 하루 5~6시간만 잠을 재운다. 그렇게 잠을 못 자고 모이를 많이 먹은 닭은 1.1~1.2일마다 달걀을 대량생산한다. 사흘마다 달걀을 낳는 자연상태의 닭보다 생산성이 훨씬 높다. 하지만 달걀을 과다 생산한 닭은 1년이면 힘이 떨어져 생산성도 낮아지고 결국 도태의 길을 걷는다. 그 빈자리는, 70일짜리 새 닭으로 채운다. 기계처럼 아귀가 맞아 돌아가는 대량생산 공정이 끝없이 이어진다.
본능대로 해가 지면 잠을 자는 킹스파머스 닭들은 일반 공장식보다 20%가량 달걀 생산성이 낮다. 하지만 닭이 건강해 훨씬 오랫동안 건강한 달걀을 생산한다. 공장식의 두 배 이상인 2년 동안 고품질 달걀을 낳는다.
여기혁 대표는 ‘닭들의 아버지’, 암탉 한 마리가 어깨 위에 올라서 있다. 킹스파머스 제공
지속가능한 경영 수익 보장
킹스파머스에서는 모이에 특히 정성을 쏟는다. “수입 유전자변형생물(GMO)로 만든 옥수수와 대두박(콩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을 섞은 일반 배합사료를 먹이면 오메가3 지방산은 부족하고 오메가6 지방산이 과다해져요. 건강의 균형이 깨지죠. 우리는 다양한 유기농 발효 곡물을 풀과 섞어 먹여 오메가3와 오메가6를 일대일로 유지해요. 충분히 발효한 미생물과 산야초도 듬뿍 먹이고요. 발효 사료라 소화가 잘돼요. 똥에서 냄새도 훨씬 덜 나는 거지요.” 메뚜기와 밀웜(갈색거저리 애벌레), 귀뚜라미도 킹스파머스 닭들이 즐겨 먹는 반찬이다.
3600마리 산란계를 사육하는 여 대표는 공장식 사육으로 달걀 3만 개를 얻을 때만큼 매출을 올린다. 순이익은 두 배 이상 많다. 사료비가 훨신 덜 들기 때문이다. “직접 고영양 사료를 만드니, 오히려 비용이 적게 들어요. 수입 곡물 사료 값이 너무 올랐거든요.” 그가 말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몸에 좋고 맛있는 달걀을 생산해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달걀 값이 추락했지만, 킹스파머스 달걀은 변함없이 1개 1천원의 최고가를 받는다. 일반 공장식 생산 달걀은 1개 100원도 받기 힘든 형편이다. 브랜드 있는 달걀의 시장가격도 1개 200~300원, 방사형 달걀도 600원 정도 받는 데 그친다.
신선도 유지를 위해 달걀 전량을 직접 배송 방식으로 공급한다. 통상 달걀은 농장에서 나와 마트에 진열되기까지 5~7일 걸린다. 신선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전국의 달걀을 거점 물류센터로 모았다가 재선별 포장 과정을 거친 뒤 각 매장으로 다시 공급하기 때문이다. 킹스파머스의 고객은 포항·경주 지역이 절반, 수도권이 절반이다. 포항·경주 지역에는 그날 오전에 낳은 달걀을 그날 저녁 시간 전에 식탁까지 배송한다. 수도권은 하루 더 걸린다.
살충제 실상 털어놔
킹스파머스는 달걀 낳는 2년의 소임을 마친 닭도 좋은 값에 판다. “달걀도 팔고 닭도 팔아” 부가 수입을 올리는 것이다. 암탉은 3만원, 수탉은 5만원을 받는다. 건강한 닭이어서 파는 데 어려움이 없다. 여 대표는 “전통식 밀집사육 농장들은 많은 돈과 노동력을 들이고도 점점 수지를 맞추기 어려워한다”면서 “유기축산이나 동물복지 농장으로 전환이 이상적인 제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영상으로도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어주는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점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여 대표는 2017년 살충제 달걀 파동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당시 일부 언론에 살충제 실상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가 공장식 사육 농가들한테 엄청난 욕을 얻어먹었다.
“아버지의 기존 공장식 농장에서 10년 동안 두 달에 한 번씩 살충제를 뿌렸거든요. 내 코와 입이 다 헐고, 살충제를 뿌리고 나오면 온몸이 휘청거렸어요. 진드기란 놈이 닭장 곳곳에 숨어 있어요. 닭의 깃 속에도 들어가 있고요. 그놈을 잡으려면, 살충제로 닭장 샤워를 할 수밖에 없어요. 물통이나 모이통에도 살충제가 뿌려지지 않을 수 없잖아요. 이런 달걀 먹고도 아이들이 건강할 것인지, 소비자가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실상을 이야기했던 건데, 주변 농가들에 엄청나게 공격을 받았어요.”
여 대표는 “닭의 깃 속에 진드기 1마리가 남아 있으면 9주 만에 1억3천만 마리로 불어난다”는 끔찍한 사실을 전했다. “살충제 없는 달걀을 위해서도 공장식 축산을 유지하기 어려울 거예요. 결국 동물복지나 유기축산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항생제 투여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현실도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공장식 밀집사육 환경에선 면역력 떨어진 닭들이 질병에 잘 걸려요. 어떻게 무엇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요.”
여 대표 아버지가 30년 전에 세운 기존 공장식 닭장 모습. 동물복지 농장으로 탈바꿈한다. 김현대 기자
10억 기존 공장식 닭장 포기
여 대표는 최근 아버지 때부터 30년 동안 밀집사육하던 3만 마리의 산란계를 모두 처분했다. 각 150평 규모 6개 동의 크고 작은 공장식 계사 시설을 뜯어내 모두 내다버렸다. 기계설비만 5억원, 건물까지 합쳐 모두 10억원 정도 들어간 어마어마한 구조물이다. 그는 행정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기존 건물을 헐어내는 공사를 곧바로 시작할 생각이다. 거기에 자신이 설계한 200평 규모 높이 7.5m의 새로운 동물복지 닭농장 4개 동을 짓는다는 꿈을 꾸고 있다.
“새로 짓는 계사에는 한가운데에 야자수를 심고 벽을 타고 넝쿨을 올릴 거예요. 소비자가 찾아와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기에 상큼한 공간으로 만들 겁니다. 그리고 계사 안을 여러 칸으로 나눌 거예요. 각 칸에 수탉 1마리와 암탉 15마리를 넣어 한 가족으로 지내도록 할 겁니다. 또 각 칸은 별도의 방사장과 연결해, 오전엔 달걀을 낳고 오후엔 닭들이 방사장에서 놀도록 할 거고요.”
동물권행동 카라의 전진경 이사는 “이미 너무 많은 시설 투자를 해놓은 터라, 킹스파머스처럼 기존 계사를 모두 버리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결단”이라면서 “공장식 사육을 하던 아버지가 새로 바뀌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가장 심하게 저항했는데, 이를 이겨내고 사업으로도 성공한 모델을 만들어 보인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여 대표의 변화와 도전을 평가했다. 그는 또 “여 대표 자신이 동물복지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더 이상 예전 방식의 대규모 공장식 케이지 사육이 수용될 수 없다는 시대 변화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라면서 “동물복지(유기축산) 전환에 성공한 하나의 개별적 사례지만 머잖아 이런 변화가 우리 사회에 전면적으로 올 것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경주=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