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성폭력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갖게 된 여성을 치료해주겠다며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심리상담사가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심리적 의존 상태에 있는 내담자를 보호해야 할 상담사가 이를 악용하고, 자신의 ‘위력’을 이용해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본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권희)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및 피보호자간음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아무개(55)씨에게 12일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본인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상담사를 찾았지만 이 사건 범행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피해자를 도와주기 위해 성관계를 했다고 진술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본인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징역형을 선고한 이유를 밝혔다.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 프로그램에서 심리치료 전문가로도 활동한 김씨는 드라마 치료와 예술 치료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는 2017년 2월부터 피해자의 심리 치료를 맡았고, 자신의 치료 연구소와 숙박시설 등에서 8회에 걸쳐 피해자를 간음 및 추행한 혐의를 받는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관한 피해자의 진술을 대체로 일관됐고, 피해자가 기록한 스케줄러 내용이나 카드 결제 내역 등은 피해자 진술을 뒷받침한다”며 혐의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심리치료사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위력 관계’에 있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직전 직장에서 성폭력을 당할 뻔해 정신적 어려움을 겪었고, 상담을 받으면서 김씨에게 심리적, 정서적으로 크게 의존했다. 피해자의 심리 상태를 고려하면 피고인의 보호감독을 받는 위치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는 이성적인 호감 하에 김씨와 성적 접촉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 문제 치료에 도움이 되리라 믿고 여러 성적 행동을 거절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같이 ‘치료 방법’을 빙자해 내담자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사건은 ‘그루밍 성폭력’이라고도 불린다. 그루밍 성폭력은 가해자가 취약한 점이 있는 피해자와 친분을 쌓은 뒤 심리적으로 자신에게 의존했을 때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재련(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는 “피해자가 성인일 지라도 상담을 받는 입장에서 상담사는 굉장히 중요한 존재로 인식된다.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상담사에게 완전히 열려있는 상황을 악용해 성적으로 착취한 것”이라며 “재판부가 상담사와 내담자 관계에도 위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해 중형을 선고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안희정 전 지사의 대법원 판결 이후 하급심에서 ‘위력’의 개념 및 성인지 감수성에 관한 이해의 폭이 넓어 졌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여성변호사회 장윤미 변호사는 “위력이란 개념이 모호해 대법원 판결 전에는 기소조차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법원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해 사실을 헤아리려는 추세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 주장해왔다. 선고가 끝난 뒤 김씨는 “억울하지만 뭐라고 할 이야기가 없다”고 말했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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