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제이(CJ)제일제당 천동우 셰프(가운데)가 지난 11일 오전 씨제이제일제당 본사 3층 메뉴 연구개발(R&D)센터 주방에서 프라이팬으로 쿡킷의 신메뉴 찹스테이크를 볶고 있다. 연구원은 셰프가 개발한 메뉴를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상업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 ‘요리 세트’를 뜻하는 밀키트는 2014년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미국 밀키트 시장 규모는 3조원대로 추산된다. 이제 성장 단계인 국내 밀키트 시장은 2016년 스타트업들이 처음 사업을 시작해 최근 대기업들도 뛰어들고 있다. 소비자들이 집에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밀키트는 어떻게 개발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한 팩의 ‘요리 키트’로 담기는지 밀키트 개발 및 생산 현장을 취재했다.
모든 건 지인의 추천에서 시작됐다. 밀키트 하나면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다고. 장 보는 재미, 7살 딸에게 요리해주는 낙으로 사는 40대 초반 남자인 기자에겐 딱히 끌리는 정보가 아니었지만 한번 체험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받아든 메뉴는 한 밀키트 회사의 ‘눈꽃치즈닭갈비’. 3인분에 2만4800원. 한장의 레시피를 살펴보는 동안 머리는 물음표로 가득 찼다. ‘그 맛이 날까? 20분 만이라….’ 프라이팬으로 뚝딱 조리해 한입 떠먹었다. ‘정말 닭갈비네.’
밀키트는 ‘밀’(meal·식사)과 ‘키트’(kit)의 합성어로 ‘요리 세트’라는 뜻이다. 요리에 필요한 손질된 식재료와 양념, 레시피를 한 세트로 제공한다. 소비자는 실패의 두려움 없이 시키는 대로 요리만 하면 된다. 미국 시장조사 전문기관 닐슨컴퍼니가 2017년 미국 성인 2015명을 대상으로 밀키트 구매 이유를 물은 결과(복수 응답) ‘요리 시간 단축’(45%), ‘장 보는 시간 절약’(37%), ‘더 건강한 식사 가능’(34%) 등의 답이 나왔다.
한국무역협회가 지난 10월에 낸 ‘미국 밀키트 산업’ 보고서를 보면, 미국 밀키트 시장 규모는 2013년 1501억원에서 2018년 3조5340억원으로 성장했다. 성장기에 있는 국내 밀키트 업계는 올해 시장 규모가 4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국내에선 2016년 스타트업 닥터키친과 프레시지가 동명의 밀키트 브랜드를 처음 출시했다. 이후 동원홈푸드 ‘맘스키트’, 한국야쿠르트 ‘잇츠온’, 현대백화점 ‘셰프박스’ 등이 잇따랐다. 가장 최근에는 씨제이(CJ)제일제당이 ‘쿡킷’을 론칭했다.
밀키트 메뉴는 어떻게 개발돼 어떤 공정을 거쳐 우리 부엌으로 전달되는 걸까? 식재료는 안전할까? 소비자 입장에서 드는 궁금증을 해소하려 ‘밀키트 로드’를 떠났다.
메뉴 개발의 고단한 여정
지난 11일 오전 씨제이제일제당 본사 3층 메뉴 연구개발(R&D)센터. 쿡킷 메뉴를 개발하는 셰프들과 이를 상업화하는 식품연구소 연구원들, 사업성 평가와 마케팅을 담당하는 사업팀 직원들 등 10여명이 모였다. 앞서 메뉴선정위원회(전문가 8명)가 대구탕과 찹스테이크를 신메뉴로 선정했고, 메뉴별 유명 맛집을 방문해 맛 방향을 설정한 뒤 셰프들이 레시피를 개발했다. 이날은 메뉴 개발 관련자들이 만나 콘셉트와 레시피를 공유하고 맛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천동우 셰프와 신태섭 세프가 각각 찹스테이크, 대구탕의 메뉴 개발 방향 등을 발표한 뒤 요리를 시연하러 회의실 옆 대형 주방으로 모두 자리를 옮겼다. 각 메뉴를 요리하는 천 셰프와 신 셰프 옆에 연구원이 한명씩 붙어 레시피와 주의사항, 맛 포인트 등을 전달받았다. 이남주 식품연구소 연구원은 “연구원들은 상업화와 함께 소비자 입장을 제품에 반영한다. 예를 들면 셰프들은 맛을 극대화하려고 조리 순서를 강조하지만, 소비자는 한꺼번에 넣고 조리하는 걸 선호한다. 그래서 셰프와 소비자의 중간 지점에서 조리법을 단순화한다”고 말했다.
20여분 만에 완성된 요리는 접시에 담겨 회의실 테이블에 놓였다.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대구는 몇 토막 들어 있죠?”(심선희 온라인사업 신사업팀 과장) “전부 7~8개고, 1인당 2~3개 정도예요.”(신 셰프)
회의가 끝난 뒤 연구원들은 상품화 작업에 나선다. 그 상품을 셰프들이 다시 맛보고 애초 셰프 개발 버전과 유사한지 재검증한다. 마지막은 소비자 조사 단계다. 연구원들이 상품화한 밀키트를 음식 비전문가인 마케팅 직원들이 조리하며 소비자 입장에서 불편한 점을 점검하고, 최종적으로 밀키트를 소비자 70명에게 배송해 설문조사를 한다. 맛 점수 평균이 4점 이상(5점 만점)이면 출시를 결정한다. 신메뉴 선정부터 출시까지 보통 12주 걸린다. 심선희 과장은 “맛은 외식 수준이면서도 비용은 외식의 70%로 가격을 책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밀키트 브랜드들은 유명 셰프를 내세운 메뉴 개발로 소비자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야쿠르트의 잇츠온은 지난해 11월부터 정지선(중식), 남성렬(한식) 같은 스타 셰프의 시그니처 메뉴를 밀키트로 출시해 대중화와 고급화를 꾀했고,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4월 밀키트 시장에 진출할 때 아예 유명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이송희 셰프와 손잡고 셰프박스를 론칭했다.
지난 10일 충남 공주시 계룡면에 있는 씨제이제일제당 쿡킷의 농산물 전처리 업체 제이팜스 공장에서 작업자들이 세척을 마친 홍고추와 대파 등을 도마에서 썰고 있다.
농산물 작업장 가보니
밀키트 신선도 및 품질의 핵심 척도는 농산물이다. 밀키트 업체들이 농산물 전처리(세척·절단·포장) 전문업체들과 업무협력을 강화하는 이유다. 국내 밀키트 시장 점유율 1위 업체인 프레시지는 지난 8일 항암배추 등을 개발한 종자 전문 개발업체 제일씨드바이오와 업무협약을 맺었다. 프레시지는 기능성 채소를 이용한 다양한 메뉴로 차별성을 부각할 계획이다.
지난 10일 충남 공주시 계룡면에 있는 씨제이제일제당 쿡킷의 농산물 전처리 업체 제이팜스 공장 2층. 위생구역에서 위생복 등을 입은 뒤 테이프 클리너로 온몸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손 소독을 하고 나서야 전처리 구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에선 농산물 세척과 선별, 절단, 포장 작업이 이뤄진다.
작업자들이 1차로 농산물 자투리 등 불필요한 부분을 떼어낸다. 세척장에서는 나란히 연결된 3개의 통에서 세척과 살균, 헹굼의 3단계가 진행된다. 한 작업자가 껍질을 깐 양파 수십개를 물로 가득 찬 세척통에 쏟아 넣어 자동 버블세척으로 이물질을 제거했다. 이어 옆 통에서 살균한 뒤 마지막 통으로 옮겨 헹궈냈다. 이 작업에만 10여분이 걸렸다. 농산물 종류를 달리할 때마다 각 통에 담은 물도 전부 바꿨다. 맛과 향이 변질될 수 있어서다. 세척을 마친 양파는 작업자가 메뉴 구성에 맞춰 절단해 수작업으로 소포장됐다.
쿡킷 연구개발을 총괄한 나현석 책임연구원은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는 부분은 전부 떼어낸다. 밀키트는 여러 식재료가 하나의 메뉴를 이루는 특성상 키트 일부에 하자가 생기면 전체가 문제 된다”고 말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특징은 포장재다. 농산물은 수확 이후에도 살아서 호흡하기 때문에 산소가 필요하다. 농산물별로 필요한 산소량이 제각각이다. 그래서 미세하게 구멍이 들어간 특수 포장재를 쓴다. 이 구멍으로 산소가 투과되는데, 농산물 특성에 맞춰 유통기한까지 선도가 유지되도록 산소 농도를 조절한다.
제이팜스에서 생산된 농산물 소포장은 수원에 있는 최종 조립센터에 공급된다. 쿡킷은 현재 농산물 3곳, 수산물 2곳, 축산물 5곳 등 20여곳을 협력업체로 두고 있다. 그동안 쌓인 판매 데이터로 매출량을 예측해 협력업체에서 최종 조립센터로 보내는 공급량을 요일별로 조절한다. 이날은 주중이라 주말보다는 물량이 적었다.
소비자가 애플리케이션(앱)에서 메뉴를 선택해 주문하면 밀키트 재료를 보관 중인 수원 조립센터에서 메뉴별 수량에 맞춰 밀키트를 생산해 저녁 7시부터 배송한다. 제품은 소비자가 원하는 날짜에 도착한다. 밀키트 업계는 애초 30~40살 소비자를 주요 판매 대상으로 삼았다가 현재 35~45살로 타깃 연령대를 올렸다. 사용 후기를 보면 학생 자녀를 둔 소비자의 반응이 좋다고 한다. 자주 사 먹기엔 다소 가격 부담이 있다는 반응도 있다.
밀키트 취재기를 들려주니 음식물 쓰레기와 설거지거리가 많이 나오는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이따금 귀찮을 때 주문해 먹자고 한다. 그러자고 했다. 취재하며 만났던 밀키트 업체 직원들에게 모든 공정을 맡기고 그 온갖 수고를 카드로 결제하면 될 터. 아빠도 때론 쉬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공주 서울/글·사진 김정필 기자 fermat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