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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5·18 때 사라진 7살 창현이는 어디에

등록 2019-12-29 09:08수정 2019-12-29 11:43

[토요판] 이슈
5·18 행방불명자와 광주교도소 유골

“뼛조각이라도 하나 찾았으면…”
아들 잃은 이귀복씨 고통의 세월
행방불명 신청 242명, 인정 84명
6명 제외하곤 78명 시신 못 찾아

옛 광주교도소 미기록 유골은
과연 5·18 행방불명자일까…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된 7살 아들 창현이를 찾고 있는 아버지 이귀복씨가 광주시 광산구 우산동 집에서 아들 사진이 담긴 책을 들고 있다. 이지은 기자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된 7살 아들 창현이를 찾고 있는 아버지 이귀복씨가 광주시 광산구 우산동 집에서 아들 사진이 담긴 책을 들고 있다. 이지은 기자

▶지난 20일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묘지에서 발견된 기록 없는 유골 40여구는 즉각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암매장을 상기시켰다. 계엄군이 수백명의 시민을 가둔 곳이고, 실제 교도소 안팎에서 시신이 발견되거나 암매장된 기록과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을 포함한 암매장 추정지 발굴 작업은 성과 없이 끝났고, 행방불명자 가족들은 40년 가까이 피울음을 토하고 있다. 7살 아들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이귀복씨도 그중 하나다.

“맨날 그렇게 찾으러 다녔지. 인자 지쳐 갖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지만…. 하도 지쳐서 잊어야 쓰겄다 노력을 하는데 안 잊어져. 그래도 보고 싶으니께. 정부가 왜 못 찾아주는지 모르겄어.”

내년 5월이면 꼭 40년이다. 일곱 살 아들 창현이를 잃어버리고 산 세월이다. 이귀복(82)씨는 지난 20일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터에서 기록이 없는 유골 40여구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유골들은 이미 옮겨져 빈 땅에 붉은 흙만 가득했다. “가본께 암것도 없어. 속이 문드러진다 안 하요.”

이씨에게는 익숙해져버린 일이다. 1980년 5·18 당시 사라진 아들을 찾아 “전국에 안 댕긴 데가 없이” 다녔지만, 뼛조각 하나 찾지 못했다. 지난 24일 광주시 광산구 우산동 집에서 만난 이씨는 옷장 서랍을 뒤져 책 한 권을 꺼냈다. 책장을 반으로 접어둔 곳에 어린 창현이가 있다. ‘묘지번호 10-44’라고 적힌 아래, 돌 잔칫날 색동저고리를 입은 모습이다.

‘성명 이창현. 출생연도 1973년 03월23일. 행불일자 1980년 05월00일. 안장일자 년 월 일. 비문 7세의 나이로 학교를 다닌 지 2개월. M1 6총상, 공수부대, 내 아들 창현이를 아버지 가슴에 묻는다. 망월동에 고이 잠들어라.’(<당신이 잠든 곳에 우리 마음 함께 있네>, 2009년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 펴냄)

행방불명자 묘역의 주검 없는 묘, 그래서 ‘이창현의 령’이라고 쓰인 묘비 앞에서 그는 해마다 5월18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씨는 5·18 당시 전남 완도에서 공사일을 하고 있었다. 광주 서구 양동시장 근처 집에는 아내와 삼남매가 있었다. “느닷없이 광주에서 큰일이 났다고 해서 올라갈라니까 길이 멕혀서 올 수가 없고, 좀 조용해진께 며칠 만에 와보니 애기가 없는 거여. 창현이 어디 갔냐 했더니 나가서 안 들어온다는 것이여.” 양동초등학교 1학년이던 창현이는 5월20일 광주역 쪽으로 가는 모습이 목격된 뒤 사라졌다. “애기가 무지하게 발랄했어. 지가 제일로 대장이고. 그러니 총소리가 나니까 나가서 댕기다가 총을 맞었는지….”

이씨는 이후 전남 영광, 전북 고창, 경기 파주 등 유해 발굴지 수십여 곳을 헤맸다. 처지가 비슷한 이들과 함께 5·18 행방불명자회도 만들었다. 양동시장 근처에 여관방을 빌려 사무실을 냈다. “어디서 이상한 거 나왔다, 뼉다구 나왔다고 하믄 우리나라 안 가본 데 없이 다 쫓아갔어.” 번번이 허사였고, 가족들과도 멀어졌다. 유해 발굴 소식에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가 실망하는 일이 끝없이 되풀이됐다. 1980년대 초반에는 수백여 구의 유골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 묘지 근처에 여관방을 얻어 발굴 작업을 지켜봤다고 했다. ‘서울시 행려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씨는 지금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직접 본 유골들의 상태가 오래된 것이 아니고 비슷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지난해 38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도 이 얘기를 했다. 아들을 찾아 헤매는 그의 사연이 현장 뮤지컬 형식으로 소개된 자리에서다. 1989년엔 5월 유족회가 펴낸 <광주민중항쟁비망록>에서 총상을 입은 어린아이의 사진을 봤다. 사진 출처를 확인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창현이 역시 총을 맞아 숨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94년 5·18 피해보상 6차 신청 때 어렵사리 아들의 행방불명을 인정받았다.

지난 20일 광주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터에서 기록이 없는 유골 40여구가 발견돼 관계자들이 출입통제선을 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일 광주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터에서 기록이 없는 유골 40여구가 발견돼 관계자들이 출입통제선을 치고 있다. 연합뉴스

행방불명 인정 84명, 신원 확인은 6명뿐

행방불명자를 찾는 일은 발포 명령자를 밝히는 것과 함께 5·18 진상규명의 양대 과제로 남아 있다. 이씨의 아들처럼 행방불명을 인정받은 이는 1990년부터 2015년까지 7차례에 걸쳐 신청한 242명 가운데 84명이다. 실종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일은 오롯이 가족들의 몫이다. 이들 84명 중 주검이 확인된 이는 6명뿐이다. 2002년 5월 북구 망월동 5·18 옛 묘역 무연고 묘지에 묻혀 있던 11기가 발굴돼 6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창현이를 포함한 78명은 주검 없이 국립5·18민주묘지에 이름으로 잠들어 있다.

행방불명자를 찾기 위한 시도는 번번이 성과 없이 끝났다. 1997년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복권되면서 광주시가 시민 제보를 바탕으로 암매장 추정지 발굴에 나섰다. 2002~2003년, 2006~2007년, 2009년 세 차례에 걸쳐 9곳에서 발굴 작업을 했다. 소촌동 공동묘지, 삼도동 야산, 주월동 아파트 건설 현장 등지에서 유골이 나왔지만, 모두 5·18 유가족과 유전자 정보가 일치하지 않았다. 황룡강 제방과 상록회관 주변에서 나온 것은 동물 뼈로 밝혀졌다. 이씨는 그때마다 희망 뒤 절망을 맛봐야 했다.

광주시의 행방불명자 찾기가 성과 없이 끝난 지 8년 만인 2017년 11~12월, 5·18기념재단이 옛 광주교도소 북쪽 담장을 중심으로 암매장 추정지 발굴 작업을 했다. 5·18 당시 제3공수여단 본부대장 김아무개 중령이 1995년 5월29일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암매장 지도를 그려 표시한 곳이기 때문이다. 광주교도소를 처음 점령한 부대가 3공수여단(최세창 여단장)이다. 광주교도소는 당시 연행자 427명이 갇혔고, 시 외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해 계엄군의 광주 봉쇄 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김 중령은 “1980년 5월23일 오후 6시부터 약 2시간에 걸쳐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3명을 포함하여 12구의 시체를 매장한 사실이 있다. 가마니로 2구씩 덮고 묻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37년이 흐르는 사이 건물이 들어섰고, 배관 9개가 발견되는 등 굴착 이력만 나타났을 뿐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재단 쪽은 고고학적 발굴 방식을 동원하고, 전남 화순 너릿재와 1980년 전남북 계엄분소였던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주둔지역까지 발굴 지역을 확대했으나 모두 무위로 끝났다. 5·18기념재단 김양래 전 상임이사는 “검찰 조서 기록으로 암매장 장소를 유추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고, 현장도 너무 많이 변했다. 제보도 있었지만 현장에 데려오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야말로 ‘한강에서 반지 찾는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95년 검찰 수사 때 암매장 추정지 발굴을 해야 했는데,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덧붙였다.

이번에 기록 없는 유골이 발견된 교도소 공동묘지 터도 암매장이 의심되는 위치로 꼽힌다. 당시 광주지방검찰청이 작성한 ‘광주교도소 동향’에 1980년 5월21일 시신 6구가 교도소 공동묘지 근처에 가매장됐다고 나온다. 광주지검은 같은 달 24일 교도소에 전언통신문을 보내 군 당국과 협의해 가매장한 사체를 발굴해 검사 검시를 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산 것이, 산 것이 아니제…”

이번에 발굴된 유골들이 5·18 당시 희생된 시민일지, 연고 없이 숨진 교도소 수감자일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광주교도소는 1975년 동구 동명동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는데(2015년 북구 일곡동으로 다시 이전), 이전할 때 기록이 없는 주검을 무더기로 안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 해도 무더기 안치 자체에 대한 기록이 확인돼야 한다. 한편에서는 어린아이로 추정되는 유골과 구멍이 뚫린 두개골이 나온 점 등을 이유로 5·18과 연관성을 조심스레 추정하기도 한다. 법무부와 국방부, 검경으로 꾸려진 합동조사반은 유골 정밀 감식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광주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 신원 확인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유류품이 전혀 없는데다 발견 당시 마구 뒤섞여 있어 분류 작업에만 수개월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부식이 심한 유골이 많아 유전자 검출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 감식에 성공한다면 전남대학교 법의학교실에 보관된 행방불명자 신고를 한 130가족 295명의 유전자와 대조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국가폭력 희생자의 주검을 찾지 못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 방기이기도 하다. 적어도 군 기록상 사망자를 정부가 직접 밝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는 이유다. 1980년 5월31일 계엄사령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진상조사’ 문건에는 “광주교도소에서 민간인 27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505보안부대 기록은 28명이다.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 소속 지역대장이었던 신순용 전 소령은 2017년 11월13일 <한겨레>에 “1980년 5월22일 오후 1시께 교도소 정문으로 접근하는 시위대 차량에 일제 사격해 3명을 사살한 뒤 앞 야산에 암매장했다”고 고백하고, “교도소 안에서 2건의 암매장을 통해 22~25구의 주검이 묻히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당시 교도소 안팎에서 모두 11명의 주검이 가족과 광주시 등에 의해 수습됐다. 서만오(당시 25살)씨 가족이 1980년 5월26일 교도소 인근 야산에서 총상을 입은 서씨의 주검을 찾는 등 3구가 수습됐고, 교도소 안 소장 관사 주변에서 8명의 시신도 발견됐다. 나머지 16~17명은 명단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1년3개월 동안 국회에서 표류하던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가 출범하게 되면서 발포 명령자와 행방불명자 찾기 등 미완의 과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6일 진상조사위원 9명에 대한 임명을 재가했다. 진상조사위는 지난해 9월14일 시행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규정된 5·18 당시 군에 의해 반인권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과 각종 사망·상해·실종·암매장 사건, 최초 집단발포 경위와 책임자, 행방불명자의 규모와 소재 등을 규명하게 된다. 자유한국당이 5·18을 왜곡·폄훼한 인사를 조사위원으로 추천하면서 구성이 미뤄져왔으나, 문 대통령은 ‘자격 미달’을 이유로 재추천을 요구했던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의 임명도 재가했다.

그가 5월 유족회에 나가는 이유

“그렇게 뼈가 한꺼번에 나왔으니 난 5·18 때 것이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라나 모르지.” 이씨는 너무 지쳐서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유골 나온 데 찾아가믄 기다리라고 해. 그러고는 아무 말을 안 해 줘. 디엔에이 검사해서 전화해준다고 해놓고선 그만이여. 아니믄 아니라고 말을 해줘야지. 그러니 긴지 아닌지 난 모르겠어…. 내가 열서너 살 때 서울 가서 평화시장도 짓고, 수도여자사대(현 세종대), 중앙대도 지었거든. 서울서 살았으면 이런 꼴을 안 당했을까….”

지난 20일 광주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터에서 기록이 없는 유골 40여구가 발견돼 관계자들이 출입통제선을 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일 광주시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터에서 기록이 없는 유골 40여구가 발견돼 관계자들이 출입통제선을 치고 있다. 연합뉴스

5·18 행방불명자회는 2015년 사라졌다. 이씨는 5월 유족회에 나간다고 했다. “죽었으니께. 그래도 혹시 살았을까 싶어. 혹시라도.”

광주/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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