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인근 문중원 기수 시민분향소 앞에서 열린 ''문중원 기수 죽음의 재발방지 합의에 대한 입장 및 장례 일정 발표 기자회견''에서 고 문중원 기수의 부인 오은주 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100일. 지난해 11월29일, 한국마사회의 승부조작 등 비리 행태를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렛츠런파크 부산경남’(부산경마공원) 기수 고 문중원(40)씨 장례가 치러지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7일 ‘마사회 고 문중원 기수 죽음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시민대책위)가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부인 오은주씨는 “99일 간 투쟁을 하면서 한 번도 제 남편에게 좋은 곳으로 가라고 말을 못했습니다. 100일이 됐습니다. 이제 남편을 보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인의 장례를 치르기까지 100일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공운수노조와 시민대책위는 ‘정부와 마사회의 의지가 부족했다’는 점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습니다. 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를 마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찾는 게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행동을 지속했다는 설명입니다. 시민대책위 교섭팀에 있는 한대식 공공운수노조 조직쟁의부실장은 “경마에 관해서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지니고 있는 마사회가 공공기관답게 인지하고 재발 방지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고 설명했습니다. 2004년 부산경마공원 개장 뒤, 고인을 포함해 기수 4명과 말 관리사 3명 등 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계속된 죽음의 고리를 끊기 위해 공공기관을 감독해야 할 책무를 지닌 정부와 마사회가 진지하게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을 거란 설명입니다.
고인은 유서를 남겨 뿌리 깊은 한국 경마 시스템의 부조리를 지적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무한경쟁체제’입니다. 1월3일 국회에서 열린 ‘무소불위 마사회 권한은 어떻게 활용되는가?’ 토론회에서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기본급을 보장받는 서울경마공원 기수와 말관리사와 달리, 부산경마공원은 순전히 순위상금으로만 임금을 주는 방식을 택해 경쟁을 부추겼다”며 “그 결과 부산경마공원은 순위에서 밀려나면 임금도 제대로 못 받고, 생계유지가 안 됐다. 조교사의 권위가 더 강해 기수와 말관리사들은 조교사에게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마방 배정도 마사회의 자의적 기준대로 이뤄졌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2015년 조교사 자격증을 딴 문씨는 4년 넘게 마방을 배정받지 못했지만 갓 면허를 딴 사람은 마방을 받게 되는 현실이 유서를 통해 지적됐습니다. 실제 문씨가 2018년 받은 조교사 개업심사에 탈락해 마방 배정에 실패했을 때, 마사회 내부위원과 달리 외부위원들에게는 합격점을 받았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앞서 6일 마사회와 민주노총이 합의해 내놓은 ‘부경경마공원 사망사고 재발방지를 위한 합의서’에는 문씨가 목숨까지 내놓고 지적했던 문제점들이 얼마나 반영됐을까요. 개선된 부분은 확실히 있습니다. 먼저 앞으로 마사회의 부패와 관련해 책임을 묻기가 비교적 수월해졌습니다. 재발방지를 위해 마사회가 연구용역 사업을 추진하고 그 결과를 정부에 보고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정부 보고로 밝혀지는 연구 결과를 통해 책임 소재를 더 확실히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노조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교사 개업심사 때 외부위원 수를 늘리고 노조 대표 등의 참관으로 외부 견제를 제도화한 것도 반길 일입니다. 기수에 대한 소득안정 조처를 포함한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닙니다. 노조나 시민대책위는 ‘책임자 처벌’ 의지가 부족하다고 마사회를 비판했습니다. 마사회는 경찰 수사 결과가 나와야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 나올지 모를 경찰 수사 결과와 별도로 현재 진행되지 않는 마사회 자체 조사부터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게 노조 쪽의 지적입니다. 게다가 △경마 관계자에 대한 마사회의 ‘무소불위’ 권한 유지 △전문성을 벽 삼아 견제받지 않는 마사회의 제도적 문제 △공공성 확보보다 도박 활성화를 통해 매출 증대에 매달리는 ‘공공기관’ 마사회의 구조적·제도적 문제는 합의안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절반의 성공’이나마 이끌기 위해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선두에 서왔습니다. 지난해 12월21일 과천 마사회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고인의 부인 오은주씨의 목을 조르고 머리를 잡는 등 폭행했다’며 유가족이 경찰을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서울정부청사 앞에서 오래 고인의 주검을 기다리게 했으며, 과천에서 청와대까지 오체투지를 하기도 했습니다. 매일 추모제를 열고 ‘헛상여 행진’도 반복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달 27일 종로구청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이유로 공무원 100명과 용역 인력 200명, 경찰 병력 12개 중대 등을 동원해 고인의 시민분향소를 철거했을 때를 오은주씨는 가장 참담한 순간으로 꼽습니다. 그날 오씨는 실신했고 4일 뒤부터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노조와 시민대책위는 “장례 뒤 ‘마사회 적폐권력 해체를 위한 대책위원회’로 전환해 마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문중원 기수의 장례는 노동사회장으로 서울대병원장례식장에서 7일부터 진행하고 9일 오후 2시 부산 경마장에서 노제를 지냅니다. 노제를 끝으로 그는 ‘노동 열사의 성지’라 불리는 경상남도 양산 솥발산 공원묘원에서 영면에 듭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오은주씨는 “우리 가족에게만 빛이 났던 남편을 저 하늘의 별이 돼 더 밝게 빛나도록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노동자가 목숨을 바치고 유가족이 앞장서야만 노동 환경이 개선되는 현실이 언제까지 반복돼야 할까요. 100일 만에 비로소 잠들게 된 문중원 열사를 보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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