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의 정원>에서 일본 배우 야마자키 쓰토무는 실존 인물인 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즈 역을 소화했다. 모리카즈는 작은 모든 것까지도 소중하게 여기며 30년간 정원 생활을 즐겼다. 유튜브 예고편 갈무리
현 시국에 맞춰 각종 질병 창궐 영화, 좀비 영화, 나아가 재난 영화가 시의적절한 영화로 떠오르고, 심지어 카뮈의 <페스트>마저 시의적절 아이템으로 자주 거론된다.(의외로 <눈먼 자들의 도시>가 거론되는 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그건 단지 세균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설마?)
그런데 사실 한파주의보에 에어컨을, 강풍주의보에 선풍기를, 폭염주의보에 열풍기를 트는 듯한 이러한 추천은 영화감별적 시각에서 보자면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사료된다. 그렇다면 현 시국에서 어떠한 영화가 시의적절한 영화일 것인가. 아마도 <모리의 정원> 같은 영화가 그런 부류에 상당히 근접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왜인가. 보자.
일단 이 영화는 2018년 공개된 영화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이 1974년이고 그 시대를 현재에 대한 비유로서 취급하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이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단지 개봉 시점과 관련해 짚을 것이 있다면, 이 영화가 2018년에 작고한 배우 기키 기린의 유작이라는 점이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들로 잘 알려진 배우이니만큼(고레에다 감독의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에는 그녀의 대단함에 대한 인상적인 일화가 실려 있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은 많은 관객의 주요 관심 사항일 텐데, 사실 주연인 야마자키 쓰토무(영화 <담뽀뽀> <마루사의 여자> <가게무샤> <천국과 지옥>)의 연기 또한 못잖게 관심이 가는 부분이겠다.
동물도 풀도 벌레도 주인공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실존했던 일본 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즈(이하 ‘모리’)다. 그의 화풍은 영화의 첫 장면, 즉 그림에 문외한인 듯한 한 노신사가 전시회장에 걸린 그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이 그림은 몇살짜리 아이가 그렸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으로 요약정리 되고 있듯 천진 단순 담백한, 말하자면 하이쿠(5, 7, 5의 3구 17자로 된 일본 특유의 짧은 시) 같은 화풍인데, 하지만 모리의 그림이 등장하는 장면은 오직 그 첫 장면뿐이다.
<모리의 정원>은 그림이나 그림 그리기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①94살 모리와 ②그의 18살 연하의 아내 히데코(기키 기린), 그리고 ③그의 집과 정원, 즉 이 영화의 원제인 ‘모리가 있는 곳’이 세 축 위에 얹어져 있다. 좀 더 세세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올까봐’ 훈장 수여를 그 자리에서 거절하는 등의 세속초월적 행동 및 사고방식을 제외하면 딱히 여느 노부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모리 부부에 더해, 모리 댁 정원에 사는 도마뱀, 수국, 벌, 딱정벌레, 나비, 사마귀, 금붕어, 송사리 같은 평범한 동물과 벌레, 그리고 그들이 사는 나무와 풀과 작은 연못 같은 평범한 장소 역시 이 영화가 시선을 맞추고 있는 주인공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저 좀 울창하고 그저 좀 큰 앞마당뿐이랄 수도 있는 그 정원이 왜 주인공 대접씩이나 받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리가 거의 30년 동안 이 집과 정원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 안에서 유유자적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 이 놀라운 초장기 자진 자택 격리는, 현재 대다수의 국민이 겪고 있는 본의 아닌 집순/집돌 생활의 고충과 고통을 어느 정도는 위무해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높은 시의적절함을 보여주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영화의 미술팀이 구현해낸 정원은 장엄한 대자연도 아니고 지나치게 정돈돼 있거나 뭔가를 추구하며 꾸며진 수목원풍 정원도 아닌 그저 앞마당이어서 오히려 참신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 느낌은 갖가지 음악을 찾아 듣던 끝에 결국 마지막에 듣게 되는 귀뚜라미 소리, 파도 소리,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음이 안기는 청신함과 어느 정도 흡사하달까. 오솔길 주변의 도마뱀, 나무 속 집을 파고드는 벌, 땅굴 속의 땅강아지, 항아리 연못 속의 금붕어,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도롱뇽, 나뭇가지 위 새끼 사마귀, 심지어 낙엽 위에서 세수하는 파리와 돌멩이까지 아우르는 그것들을 잡아낸 이 영화의 클로즈업 숏들은, 야마자키 쓰토무와 기키 기린의 연기와 함께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자 무게중심을 이룬다.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아파트라는 거대 콘크리트 구조물이 창궐하여 우리의 몸과 시야와 생활과 사회와 정신세계까지 모조리 지배하게 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오래된 주택과 울창한 정원은 일부 계층의 럭셔리 또는 희귀 관광 아이템으로 전락해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의 이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앞마당조차도, 마당 한뼘 없는 아파트 안에 종일 머물러야 하는 우리에게 위화감 또는 부럽지심을 안길 요소가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흠. 그래서야.
영화 <남극의 쉐프>는 남극 내륙기지에 1년 동안 파견된 일본 대원 여덟명의 생활을 극적 사건이나 강력한 서사의 강박 없이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코믹한 요소는 덤이다. 인터넷 영화 누리집 아이엠디비(IMDb)
전화 1분에 7400원
대안이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또 다른 작품 중 ‘아마도 국내 관객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이라고 해봐야 국내 개봉 당시 관객수가 채 4천명을 넘기지 못했으니 관람하신 분이 그리 많이 않으리라 사료되는 <남극의 쉐프>(2009)가 그것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일본의 남극 내륙기지에 1년 동안 파견된 8명의 대원과 그들의 매 끼니 식사를 책임지는 남극기지 요리전담 대원 니시무라(사카이 마사토)의 생활을, 뭔가 대단한 극적 사건이나 강력한 서사에 대한 강박 없이 상당히 오밀조밀하고 현실감 있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믹하고 온기 있게 그리고 있다. <모리의 정원>을 포함해 이 감독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대단히 남극처럼 보이지만 홋카이도와 실내 세트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짐작하시듯 대부분의 이야기가 잠수함 선내를 떠올리게 할 만큼 좁고 갑갑한 남극기지 실내에서 진행되는 영화다. 사실 딱히 진행이랄 것도 없이, 영화는 남극기지 생활의 실상을 병렬식으로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자택 격리의 진정한 극한을 엿볼 수 있다. 물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부터 <마션>까지 이르는 우주 영화들은 제외하고 말이지만.
일단 기간부터가 1년. 문밖으로 나가면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영하 70도. 펭귄도 바다사자도 바다도 없는 설원만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고, 물도 자원도 항상 부족한데다, 전화기 앞에는 ‘1분에 7400원. 많이 쓰면 파멸’이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 등. 게다가 6월을 넘기면 종일 해가 뜨지 않는 극야까지 찾아온다. 지금 우리가 겪는 자택 격리와 비교해서 유리한 점이라고는 층간소음 걱정 없이 실내에서 맘껏 뛰어놀 수 있다는 점 정도뿐이겠다.
그런 <남극의 쉐프>의 여덟 인물이 지루함과 외로움과 고립감에 저항하며 꽃피워낸 집순이/집돌이 문화에서, 우리는 몇가지 생활의 도움이 되는 자잘한 팁들(실내 서클, 실내 탁구, 실내 축제, 실내 바, 실내 이것저것)과 함께 묘한 위안과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 그래, 그래도 저곳보다는 낫지, 싶은 어쩌면 다소 언 발에 방뇨스러울지도 모르는 위안 말이다. (여기에서 영화 속 대원들이 그 1년 고립 생활로 상당한 급여를 받고, 더불어 자신들의 경력에 긍정적 족적을 남긴다는 점은 잊어주도록 하자.)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면, 코믹함만으론 그해 개봉된 영화의 장면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었던 ‘닭새우튀김’ 장면을 꼽을 수 있을 텐데(닭새우에 대한 지식 자체가 스포일러이니 모르시는 게 최선) 이런 코로나적 상황에서 다시 보노라니 영화의 첫 장면이, 영화를 보는 동안 완전히 잊게 되는 그 첫 장면이 새삼 가장 와닿는다. 기지에서 뛰쳐나가서 도망치는 대원을 또 다른 대원이 쫓아와 부둥켜안고 “넌 우리의 소중한 멤버야. 강해져야 돼”라고 진정시킨 다음, “자, 그럼 마작하러 가자”라고 말하는 그 장면 말이다.
그래. 그렇게 버티는 거지.
자근자근 씹는 맛
그 첫 장면 이후로 음식들, 그것도 저녁 8시 이후 관람금지 등급을 붙여야 할 만큼 식욕을 도발하는 음식 클로즈업이 무척 자주 등장하는데, 그런데도 음식 장면에 나오지 않으면 불구속 입건이라도 될 듯 등장하는 화려한 리액션은 없다. 깨작깨작 골라 먹는 사람, 우걱우걱 쑤셔 넣는 사람, 술을 밥처럼 밥을 안주처럼 먹는 사람, 짜게 먹는 사람, 서툰 사람. 각자 그냥 방식대로 밥을 먹을 뿐이다. 영화 자체가 그런 것처럼. 그렇다. <모리의 정원>도, <남극의 쉐프>도 작정하고 앉아서 집중해야 하는 영화라기보다는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느긋하게 보는 편이 훨씬 어울리는 영화다. 다른 말로 하면 천천히 자근자근 씹는 맛이 제법인 영화라고 할 수 있을 이 영화의 특징을 뒤집어 말하면, 패스트 포워드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가끔 느낄 템포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속도 감각이란 언제나 상대적이고 쌍방적이다. 어쩌면 문제의 핵심은 영화의 템포보다는 속도와 자극에 오래도록 무뎌져버린 우리의 감각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 기회에 평소의 관성계로부터 잠시 우리의 감각을 빼내, 이런 쉬어가는 리듬 위에 얹어보는 것도 이 엄혹한 집순이/집돌이 시기에 쥐어짜낼 수 있는 거의 몇 안 되는 이점 중 하나일 것 같다.
모쪼록 모두 기운 내시길. 이제 이런 얘기마저도 지겨우시겠지만, 그래도.
한동원 영화평론가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