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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법관의 어떤 기본권 침해했다고 봤나요?”… “학문·결사의 자유죠”

등록 2020-05-24 09:37수정 2020-05-24 20:00

양승태 법원행정처 ‘눈엣가시’
국제인권법연구·인사모 와해 의혹
“설립취지 맞지 않는 활동” 주장
전 부서 나서 채찍·당근·견제·포섭

재판에서 제시된 반박 논리
국제 인권·법관윤리 기준들
“사법부 독립에 영향 미치는
문제에 의견 표명할 수 있어”
법관은 내부 압력서도 자유로워야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지난해 8월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두번째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지난해 8월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두번째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20. ‘인사모’를 바라보는 두 시선

“국제인권법연구회에서 이런 소모임이 운영되는 건 부적절합니다. 제 생각도, 법원행정처도 같은 의견이에요. 국제인권법연구회 밖에서 활동하는 건 어떤가요. 그렇다면 제가 모든 예산을 확보해보겠습니다.”

2015년 9월9일 이규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국제인권법연구회(인권법)의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소속 이동연·박진웅·김영식(현 청와대 법무비서관) 부장판사 등과 만난 저녁 자리. 이 상임위원은 이러한 취지로 말했다. 인권법은 양승태 사법부의 ‘요주의 대상’이었다. 인사모가 그해 8월 ‘상고법원 끝장 토론회’를 열고 양승태 대법원장 역점사업인 상고법원에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다. 사법제도를 연구하는 소모임인 인사모는 상고법관 구성이 마치 제2의 고등부장 승진제도처럼 운영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법원 고위 인사가 법관들이 꾸린 소모임의 존폐를 거론하는 상황. 4년여가 흘러 양 전 대법원장 사법농단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이규진 전 상임위원은 “경고하러 나간 게 아니고 설득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자리였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인권법 ‘회장’이기도 했다.

후퇴된 표현·결사의 자유

이 전 상임위원은 인권법 회장을 맡으면서, 인권법을 와해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그는 법원행정처에 인사모 모임 일정, 참석자, 논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보고했고, 역으로 법원행정처 입장을 인권법과 인사모에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 이를 “회장으로서 해야 될 일이었다”고 표현했다. 이유와 명분은 있었다. 검찰은 당시 법원행정처가 양승태 사법부 사법정책에 쓴소리하는 인사모를 와해하려 했다고 보지만, 이 전 상임위원을 비롯한 사법농단 피고인들은 다른 이유를 든다. 사법행정을 논의하는 인사모와 국제인권법이라는 전문 분야는 맞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 손볼 필요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전문 분야 연구회 취지에 따라 설립허가를 받고 출범한 인권법이, 설립 취지에 맞지 않는 논의를 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외적으로 어떤 외부 단체와 공동으로 법관들 수십분이 의사 표현을 한다든가,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한다는 게 법관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우려한 것입니다.”(4월1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 이 전 상임위원 증인 신문)

인사모에서 사법제도를 논의하는 것이 인권법의 설립 취지와 정말 무관할까. 국제인권법이라는 전문 분야와 맞지 않은 주제이기 때문에 법원행정처 개입이 필요했을까. ‘인권법 와해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풀어야 할 쟁점이다.

“어차피 법관들의 학문연구 모임인데, 왜 연구를 하나밖에 못 하게 하는 건가요. 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국가에서 예산도 지원받는 건데 왜…. 헌법적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김형연 법제처장)

“법관의 어떤 기본권을 침해하는 조치라고 생각하신 거죠?”(검사)

“학문의 자유, 결사의 자유죠.”

지난 4월17일 이 전 상임위원의 재판에 김형연 법제처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판사를 그만두고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거쳐 법제처장을 맡기 전인 2017년 인권법 간사를 맡고 있었다. 그해 2월13일 법원행정처가 ‘중복 가입된 연구회는 한곳만 남기고 탈퇴하라. 그러지 않으면 최근 가입된 연구회부터 정리하겠다’는 공지를 내자, 그는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을 견제하려는 조치로 의심된다’며 양 대법원장에게 공개적으로 진상조사를 청원했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인권법이 법관 인사제도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하려 하자, 사문화된 예규(전문 분야 연구회의 구성 및 지원에 관한 예규)를 부활시켜 인권법을 와해하려 했다. 중복가입자가 정리되면 가장 타격이 심한 연구회는 최근 설립된 인권법으로, 회원 수가 절반 이상(431→204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판사들의 반발로 법원행정처의 조처는 일주일여 만에 철회됐다.

특히 그는 인권법 탄압의 이유가 된 인사모가 인권법 연구 분야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에 공감할 수 없다며 1천페이지가 넘는 책 한권을 언급했다. <국제인권법과 사법—법률가(법관, 검사, 변호사)를 위한 인권편람>이다. 2002년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법조인들에게 국제 인권 기준을 소개하고 교육하기 위해 <사법운용에서의 인권>을 펴냈다. 1천페이지가 넘는다는 그 책은 인권법 소속 판사 100여명이 2011~2014년 3년여 작업을 거쳐 이 책을 번역해낸 결과물이었다.

“책 초입부에 보면 법관 독립, 사법부 독립 관련 챕터가 있습니다. 그 챕터를 읽어봐도 결국 국제 인권을 실효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는 역할은 사법부가 담당해야 하는데, 그 전제 조건으로서 개별 법관이 독립돼야 한다는 챕터가 있습니다. ‘(인사모 활동을)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법관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펴낸 책(제4장 법관, 검사, 변호사의 독립과 공정성)을 살펴보면, “오직 독립된 사법부만이 법의 지배에 근거해 공평한 정의를 이룰 수 있고, 그 때문에 인권과 개인의 기본적인 자유를 보호할 수 있다”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는 사법부와 법조인들이 간섭과 억압으로부터 보호받는 한도 내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고 돼 있다. 인권 보장의 최후 보루인 법관이 헌법과 법률에 의한 독립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선 외부뿐 아니라 내부의 압력으로부터도 독립돼야 하는데, 사법행정이 이를 담보해줘야 한다. 그렇지 못한 채 “법관 신분이 불안정하다면 법관은 부적절한 압력에 더 취약해지고” “자유롭게 단체를 조직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법관 독립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법제처장은 이날 “인사모 활동을 하면 어떤 불이익을 받을 수 있겠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법원행정처에서 안 좋게 보는 일을 행정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다면, 경험상 좋지 못한 처우를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전 상임위원과 함께 재판을 받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의 변호인은 김 법제처장의 증인 신문 내용이 “객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중복가입 해소 조치가 이뤄지니까 이른바 ‘프레임’을 정하는 과정에서 기본권을 들고나오지 않았나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법제도 문제라면 더더욱

김 법제처장과 비슷한 인식은 지난 4월23일 송오섭 판사의 증인 신문 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송 판사는 2015년 인권법에서 기획팀장을 맡았다. 이듬해 양 대법원장이 사법행정에 판사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회의체 기구의 일종인 사법행정위원회를 꾸리자 비판점과 개선 방안을 담은 글을 법원 내부망에 올리기도 했다.

“회원들이 다른 연구회보다 (인권법에 대한) 충성도가 더 높다면, (중복가입 해소 조치가 내려진다고 해도 다른 곳을 탈퇴하고) 인권법 연구회에 속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이 전 상임위원 변호인)

“어느 모임을 더 좋아하냐 물어선 안 됩니다. 원한다면 조금이라도 연구하고 가입할 수 있게 해야죠. 꼭 하나를 선택해서 한가지 연구 모임에만 참석하라는 발상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송 판사)

“인사모 활동이 인권법 연구회 설립 취지와 맞는지 (회원들과) 논의해본 적 있습니까?”(재판부 배석 판사)

“인사모가 인권법과 맞는 조직이냐 아니냐는 이야기는 많이 나눴습니다. 사법부 독립, 법관 독립, 독립된 재판은 인권 옹호에 있어 본질적 가치를 가집니다. 국제 인권규범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우리나라 사법제도가 국제적 스탠더드에 맞는지 연구하고 더 나은 제도가 무엇인지 논의할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송 판사)

법원행정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인사모는 2015년 7월 결성을 위한 예비모임부터 달갑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인사모를 잘 챙겨보라’는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의 지시를 받은 이규진 상임위원은 김세윤 윤리감사관에게 “인사모를 개설하고 운영하는 것이 법관 윤리에 위반되는지 여부를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김 윤리감사관은 “법관윤리 위반 사항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지난해 12월11일 김세윤 전 윤리감사관이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을 때다.

“‘법관이 대중적 논쟁에 참가해서 안 되는 이유는 재판 공정성에 관한 논란을 불러올 우려가 있기 때문인데, 사법제도에 관한 의견은 공정성 논란이 발생할 여지가 없고 특히 법원의 제도 자체가 재판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소모임 회원들이 그 사안을 재판하게 될 우려도 없다’는 취지로 적었죠. 외국의 법관윤리 규정인 방갈로르 법관행동준칙을 증인이 직접 찾아본 것인가요?”(검찰)

“네, 그런 것 같습니다.”(김 전 윤리감사관)

“사법 운영 주체에 관해 법관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공정성을 해할 우려가 없다는 것인가요?”

“그런 취지의 결론으로 기억합니다.”

김 전 윤리감사관이 인용한 방갈로르 법관행동준칙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법관 윤리 기준이다. 200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세계 대법원장 원탁회의가 인도 방갈로르(벵갈루루)에서 마련된 이 준칙을 채택했다. 이 준칙에 따르면, 법관은 사회·정치적 쟁점에 대해 의견을 밝힐 때는 공정한 재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하지만, 법원 운영, 사법부 독립, 법관 개인의 청렴성과 같이 “사법부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적절한 방식으로 외부에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

하지만 법원행정처는 이 전 상임위원을 징검다리 삼아 인사모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박상언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에게 인권법과 인사모 대응 방안을 모색하게 했다. 인권법 회원 명단을 받아든 인사총괄심의관실은 “우리법연구회 후신으로 정의해 부정적 성격을 부여한다” “중복가입 금지 원칙을 강화한다”는 방안을 구상했다. 법원행정처의 모든 부서가 인권법 대응에 나섰고, 채찍과 당근, 견제와 포섭의 묘가 발휘됐다.

'사법농단 의혹'의 박병대 전 대법관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으러 2018년 12월 6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사법농단 의혹'의 박병대 전 대법관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으러 2018년 12월 6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내부로부터 위협받는 법관 독립

김 법제처장은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는 법원 내부에서 사법행정권을 이용해 법관들의 생각과 행동을 옭아매는, 법관 독립이 내부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정리했다. 하지만 이민걸 전 기조실장의 변호인은 “법관 독립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법관이라면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원행정처 조치에 어떤 경우라도 맞서야 한다. 불이익을 받을까봐 나서지 못했다?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법관이 불이익을 받기 쉽지 않다”고 맞섰다. 법관은 법원 외부로부터의 압력뿐 아니라, 법원 내부로부터의 압력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법관은 절대 불이익을 받을 수 없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불이익을 감수할 용기를 갖춰야 하는 상황 자체로 이미 법관의 독립은 침해된 것 아니었을까.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이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대법관 이상의 고위 법관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법정에 서는 것은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을 시작으로, 진실을 밝히고 유무죄를 따지는 긴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법정 르포의 방식으로 ‘사법농단 재판’을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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