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의 한 커피숍에 모인 직장 갑질 피해자 20여명이 종이봉투로 만든 가면을 쓰고 각자의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모습. 직장갑질119 제공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시행 1년을 맞아 로스쿨 학생들과 지역 노동복지센터가 유럽인권재판소의 직장 내 괴롭힘 판례를 모아 책으로 냈다.
관악구노동복지센터는 13일 유럽인권재판소의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사건에 대한 판례 모음집을 오는 15일 발행한다고 밝혔다. 센터는 “범유럽적 인권규준을 만드는 유럽의 ‘헌법재판소’ 유럽인권재판소의 ‘직장 내 괴롭힘’ 관련 판례를 연구했다”고 설명했다. 관악구노동복지센터는 노동자 권익과 복지 증진을 위해 노동상담과 교육 등의 활동을 하는 기관으로, 서울시와 관악구의 위탁을 받아 민주노총이 운영한다.
판례집을 보면, 유럽은 직장 내 괴롭힘의 범위가 한국보다 넓게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의 한 직장에 다니던 노동자 ㄱ씨가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게 됐다. 동료들은 이 소식을 듣고 ㄱ씨의 해고를 강력히 요구했다. 회사는 에이즈 안전성에 대한 설명회를 열고, ㄱ씨에게 다른 부서로 전보를 제안하기도 했으나, ㄱ씨가 모두 거부했다. 회사는 해고만은 막기 위해 ㄱ씨에게 사직을 권고하며 구직 활동을 지원했지만, 결국 ㄱ씨를 해고하고 만다. 그리스 법원 최종심은 사용자인 회사가 노동자 ㄱ씨를 배려했으며 다른 직원이 불안해한다는 점을 들어 ‘해고’를 정당한 권한 행사로 봤다.
그러나 유럽인권재판소는 그리스 법원의 판결이 유럽 인권협약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노동자 기본권을 엄격히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유성민 관악구노동복지센터 사무국장은 “이 사건이 한국에서 직장 내 괴롭힘으로 받아들여질지 의문이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권익이 한국보다 강한 유럽이니까 가능했던 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번 자료집 제작에 로스쿨 학생들이 참여한 점도 눈길을 끈다. 서울대 로스쿨 학생 8명이 이 판례를 포함해 27건의 판례를 번역·요약하는 작업을 맡았다. 서울대는 로스쿨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의 공익적 진로를 찾을 수 있도록 올해 공익법무 실습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들은 관악구노동복지센터에 앉아 한 판결당 50~60쪽에 이르는 영어 판례를 번역했다. 판례 하나당 8시간 넘게 앉아 번역하고 요약하는 기초 작업을 학생들이 담당했다. 서울대 로스쿨 2학년 김호(28)씨는 “한명이 8~9개 판례를 맡아 2~3개까지 추려내며 작업했다. 언어와 법률용어 모두 한국과 달라 쉽지만은 않았다”며 “한국과 달리 차별에 의한 괴롭힘을 엄격하게 규정하는 유럽의 사례가 신선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책임저자인 정진아 변호사(법률사무소 생명)는 “한국의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괴롭힘 조사와 조치 의무를 사용자에게 부여해 피해구제가 어렵다. 기본권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유럽인권재판소 판례가 참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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