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_ 20대 장녀들의 K-장녀 선언
6월18일 개봉한 영화 <야구소녀>에도 K-장녀 서사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천재 야구소녀’지만 어려운 집안의 장녀라는 현실에 부딪혀 야구를 포기해야 할 위기에 놓인다. 싸이더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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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는 누구인가 K-장녀는 부모에게서 여러 역할을 부여받는다. 첫째가 ‘정서적 공감자’다. “가족의 어려운 경제 상황이나 가족 간 갈등 등 ‘어른의 사정’ 같은 이야기를 동생보다 일찍 듣거나 저만 듣는 일이 있었어요. 그런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스스로 많이 받아요. 실제 개입해서 상황을 부드럽게 하려는 편이고요.”(하나림씨·28) 그래서 ‘가족의 중재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대학 진학 뒤 부모님과 따로 살고 있는데, 부모님이 어떤 일로 감정이 상하면 나한테 전화해요. 엄마 아빠 상황에 맞게 응대하고 나서는 다시 두 분에게 전화해서 대변인 노릇을 해야 하죠. 왜 나에게만 이런 역할을 부여하냐고 물으니, 두 살 어린 남동생은 어리바리해서 똑똑한 딸한테 하는 거래요. 동생에게 말하라고도 못하겠더라고요.”(박규림씨·29) 남동생이 있는 경우 ‘남녀차별’을 일상에서 경험한다. 장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장녀일기>를 쓴 김시오(24) 작가는 “이젠 사회에서 대놓고 ‘장녀’이기를 강요하는 건 줄었다고 할지라도 성차별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했다.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저는 상주를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 충격받았죠. 나 몰래 부모님이 남동생에게 용돈, 학비 등 지원을 더 많이 해줬다는 것도 알았어요. 통금 시간을 정해놓거나 집안일을 하는 것도 남동생에겐 적용되지 않았죠. 장녀로서 부모나 동생을 위하기를 은근히 강요당할 때 K-장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동생만 있는 경우, 다른 식의 부담이 K-장녀 어깨에 실린다. 장남을 대신하라는. “남자형제가 없기 때문에 ‘장남’ 역할과 딸 역할을 동시에 해왔어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입신양명’하는 동시에, 예쁘고 날씬하고 피부가 매끈할 것을 요구받았어요. 또 여덟 살 터울의 동생을 아침마다 학교 가는 길에 유치원에 등교시켰고, 엄마가 바쁠 땐 하교도 시켰어요.”(이보리씨·29) “친가·외가를 통틀어 딸만 둘이 있는 집안이 우리 가족뿐이었기 때문에 ‘그 집은 아들이 없네, 첫째가 잘해야겠네, 네가 아들 몫까지 다 해야겠네’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 ‘아들이 없어서 뭔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노력했고, 친척 모임이 있을 때 반드시 따라가서 집안일을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어요.”(하나림씨) _______
맏이의 본능과 여성의 특성 결합 K-장녀와 엄마의 관계는 특별하다. 애증이 쌓이지만 한편으론 엄마의 감정에 지나치게 이입한다. “장녀들은 때로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자처해요. 아들에 비해 엄마를 동정하면서도 놓지 못한다는 건 큰 특성이죠. 엄마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장녀에게 깊게 박인 것 같아요.”(김시오 작가) 부모를 돌봐야 하는 의무도 자연스럽게 K-장녀에게 떠넘겨진다. 돌봄을 애초에 여성의 노동으로 규정하기에 장남과도 다른 직접적, 포괄적 역할이 부여된다. “동생이랑 겨우 두 살 차이 나는데도, 동생 대학 입시 시험장에 따라다니고 기숙사 신청도 대신 해줬어요.”(박규림씨) “어릴 때 부모님 두 분만 외출하면 항상 ‘집에 엄마 아빠가 없으면 네가 엄마 아빠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라면을 끓여 먹을 때도 가스를 끄는 일은 나에게만 시켰어요. 스스로도 내가 동생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정제영씨) “한부모 가정이라 더욱 K-장녀로 자란 듯해요.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우리 집엔 엄마가 없으니까 이런 건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동생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면서 ‘어른 여성’의 모습을 요구받았어요.”(한진서씨·25·가명) 이런 K-장녀의 부담감은 10대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6월19일 <요즘 육아-금쪽같은 내 새끼>(채널A)에 출연한 10살 장녀 서빈이는 부모와 함께 세 명의 동생을 챙긴다. 서빈이는 동생들이 먹는 걸 꼼꼼하게 살펴보고 나서야 뒤늦게 밥을 먹는다. “부모님에게 칭찬받는 게 좋아서 심부름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 서빈이. 장녀인 장경미(37·가명)씨도 12살 조카의 눈물을 보며 놀랐다. “여동생에게 아이가 세 명이 있는데, 최근 아이가 더 생겼어요. 동생이 한 명 더 태어난다고 하자 장녀인 조카가 ‘또 동생이야?’라고 하며 울더라고요. 그러고 며칠 후엔 ‘엄마, 동생 태어나면 학교 갔다와서 애 봐줄 테니까 엄마는 좀 쉬어’라고 말하더래요. 12살짜리에게도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청소년 심리상담을 해온 김지희 정신건강임상심리사는 “맏이는 가족에게 첫아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다가 동생이 태어나면 관심과 사랑이 빼앗기는 부정적 감정을 경험한다. 점차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부모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유지하기 위해 동생을 돌보는 데 협력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아동발달 특성도 영향을 미친다. “양육자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남아보다 여아가 발달된 경우가 많아, 정서적 유대가 더욱 깊게 형성되면서 장녀라는 역할에 몰두하게 된다”고 했다. 이때 부모 교육이 중요하다. 김 임상심리사는 “부모는 첫째도 어리고 성숙하지 못한 자녀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아이가 칭찬받기 위해 장녀 역할을 하려고 하면, ‘너도 동생과 똑같은 어린아이’라고 말해줘야 한다”고 했다. ‘장녀 콤플렉스’를 품고 자라나면 정서 발달에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윤하영(24)씨는 “공부든 뭐든 내가 잘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고 칭찬받지 못하다보니, 가족이 아닌 다른 인간관계에서 지나친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게 됐다”고 했다. 김나은(28·가명)씨는 “장녀로서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른 나이에 결혼을 도피처로 선택했는데,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김지희 임상심리사는 “상담하다보면 장녀 역할에 몰두해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기대대로 행동하고 자랐다가 어느 정도 이루고 나니 공허감이 밀려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몰라 우울해지기도 한다”고 했다. 그때는 “누군가의 기대나 요구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올 초 개봉한 영화 <이장>은 가족 내 딸들의 굴곡진 삶을 그린다. 인디스토리 제공
더 이상 가정에 돌봄을 맡기지 말라 최근 20대 여성을 중심으로 젊은 여성이 스스로를 ‘K-장녀’로 부르며 장녀로서 떠안은 역할 부담을 직시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장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장녀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K-장녀라는 명칭을 스스로 부르면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죠. 이런 비판적 인식이 발판이 돼 상황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거예요.”(하나림씨) K-장녀는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성장과 맥을 같이한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계기로 여성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생겨났어요. 그중 하나가 전통적 가족관에 대한 비판과 재해석이고, K-장녀도 그렇죠.”(한진서씨)변화의 꿈틀거림에는 우선 거리 두기가 있다. “20대 중반 이후 엄마에게 ‘정서적으로 친구가 되기를 더 이상 요구하지 말라’고 말했어요.”(이보리씨) 돌봄 노동에 대한 생각도 넓어졌다. “노인 부양 책임을 사회가 부담하지 않고 가족의 역할로 남겨뒀기 때문에 장녀, 특히 비혼 장녀에게 부담이 가는 거죠. 이제 사회의 돌봄 정책이 바뀔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 맡는 기능이 너무 많아요.”(차유주씨·24)엄마를 간병하는 짐을 홀로 떠안은 장녀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일본 소설 <장녀들>에 동감해 번역에 나선 안지나 숙명여대 교수(인문학)는 시대 변화를 실감한다고 했다. 그는 “K-장녀라는 단어가 공감받을 수 있는 것은 가정의 일은 가정에서 해결하고 밖에서 말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며 1인 가구나 비혼 여성이 늘어난 것을 한 원인으로 꼽았다. “과거에는 가정 내에서, 특히 장녀들이 부모 돌봄을 맡아왔지만, K-장녀(의 선언)는 그 통념이 깨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는 전근대적인 ‘가족’ 개념이 통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새로운 장녀들이 오고 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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