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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존경할 순 없지만 사랑해야 하는 부모를 가진 심정이란

등록 2020-09-05 13:42수정 2020-09-05 14:19

[토요판] 이런 홀로
고향에서의 나와 서울에서의 나

엄마 칼국수 가게 거들다 보면 10대에서 도망친 나는 다시 원점
끝없이 충돌하는 부모의 세계와 나

견딜 수 없이 싫었던 모든 것
흡수하며 성장한 ‘나’란 잔가지
성장이란 결국 부모와의 인정투쟁
실은 견딜 수 없이 싫었던 부모의 그 모든 것을 흡수하며 성장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으면 없는 채로,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기 삶을 이겨냈기에, 거기서 나온 잔가지 하나가 다른 땅에 어설픈 뿌리를 내려 아등바등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실은 견딜 수 없이 싫었던 부모의 그 모든 것을 흡수하며 성장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으면 없는 채로,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기 삶을 이겨냈기에, 거기서 나온 잔가지 하나가 다른 땅에 어설픈 뿌리를 내려 아등바등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여기 커피 두 잔 가져와봐.”

여긴 분명 칼국수집인데 누가 감히 커피 소리를 내었는가. 두리번거리니 저쪽 테이블에 앉아서 칼국수 두 그릇에 보리밥과 반찬을 리필하고 계란말이까지 해달라고 요청했던 두명의 할아버지였다. 일반음식점 중에는 식사 뒤 나가는 길에 간단히 믹스커피를 마실 수 있게 해놓거나 무료 커피자판기를 운영하는 집이 많은데, 우리 집은 그 자동 믹스커피 기계를 없앤 지 오래됐다. 서비스 차원에서 자판기 커피를 제공하는 식당이 많다 보니, 이렇게 칼국수집에서 당당히 커피를 요구하는 손님들이 간혹 있다.

설마 나에게 커피 타오라는 소리인가 싶어 엄마를 바라보니 엄마는 “삼촌들 얼른 커피 두 잔 타다 드리라”며 손을 휘젓는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안 했을 일이지만, 나는 뽀로로 일어나 가게 서랍장에서 믹스커피 봉투를 꺼내 커피를 제조해 손님들에게 대령한다.

타임머신 타고 고향 가는 기분

엄마는 고향에서 칼국수집을 운영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는 늘 우리 집의 생계 부양자였고, 음식을 팔아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서울로 유학까지 보냈다. 동생과 나는 방학 때마다 엄마 식당에서 일을 도왔는데, 청소년기에는 그 때문에 엄마와 크게 다투기도 했다. ‘엄마 고생하는데 열심히 도와야지’라는 생각을 못 해서가 아니라, 식당에 가는 순간부터 엄마의 운영 방식에 맞추느라 상처받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우리를 딸이 아닌 직원처럼 부렸기 때문에 우리는 불만에 찬 표정으로 일했다. 그런 표정을 보는 엄마라고 기분이 유쾌할 리 없었다. 그러다 보면 ‘힘들게 공부시켜놨더니 돕지는 못할망정 유세 떤다’고 욕을 하는 엄마와 ‘왜 말을 그렇게 하냐’며 화를 내는 딸이 싸우는 살풍경한 모습이 연출됐다. “내가 치울게 엄만 앉아 있어” “넌 들어가 공부나 하지 왜 나와 있니”라고 쓰다듬는 휴먼드라마의 장면 따위를 우리 집에선 볼 수 없었다.

서울에 와 직장을 잡고 혼자 사는 집이 나의 터전이 되었지만, 본가에 내려가면 우리는 여전히 엄마 가게에서 일을 돕는다. 엄마는 명절에도 절대 가게 문을 닫지 않는다. 1년 365일 가게가 영업 중이니, 동생과 나는 고향에 가도 편히 쉬기는커녕 칼국수만 나르다가 서울로 복귀한다. 그리고 가게에서 우리는 여전히 엄마와 다툰다. 서울에서 뭐 대단히 성공해 우아하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인 친구들과 이성적인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가면 나는 다시 칼국수 가게에서 서빙을 하면서 나의 원점에 대해 생각하고 만다. 내가 비롯된 이곳은 여전히 진상 손님의 상상 초월 요구가 난무하고, 높은 데시벨로 욕설을 섞어 싸우는 부모님이 컨테이너로 만든 가게 윗방에서 잠을 청하는 곳이다. 고속버스가 고향 도시의 명판이 적힌 문을 넘어설 때부터 나는 서울에서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향하는 터널을 건너는 감각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서울에서의 나와 고속버스로 3시간 이동한 고향에서의 나는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 안 나온 부모님이 부끄럽다거나, 고향 집을 떠나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내가 엄마보다 고상하고 세련된 사람이라는, 뭐 그런 말이 아니다. 그냥 집을 떠나 살면서 그래도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와 다른 부모님의 세계와 끝없이 충돌하면서 갈등을 겪고, ‘너는 참 이상한 애’라는 험담을 들어야 했던 10대 시절로부터 도망쳐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고향 집에서의 나와 서울에서의 내가 괴리되어 갈수록 더더욱 엄마 집에는 자주 가지 않게 되었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이란 결국 부모 세대와의 인정투쟁, 부모 세대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마디로 ‘엄마(혹은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대학생 때, 엄마 가게가 한달 영업 정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단골이었던 대학생이 고기를 먹으며 술을 시켰는데 엄마는 단골이라 주민등록증도 확인하지 않고 맥주를 갖다주었다. 알고 보니 그 학생의 친구 중 한명이 아직 민증이 없었고, 누군가의 신고로 영업 정지를 당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엄마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엄마가 창피했다. 장사를 시작한 뒤 한번도 쉬어본 적 없던 엄마는 타의에 의해 억지로 한달을 쉬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앓아누웠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이참에 푹 쉬지, 왜 저럴까’ 싶었다.

가게 일을 하루만 도와도 이상한 손님이 너무 많아 나는 속이 뒤틀렸다. 스님 옷을 입고 와서 고기와 술을 시키며 이리 와 앉아보라는 할아버지, 내가 니네 아빠 친한 형님이라며 악수 좀 하자면서 내 손을 기분 나쁘게 잡는 아저씨. 내가 그런 이상한 손님들이 기분 나쁘니 받지 말자고 하면 엄마는 말했다. “손님인데 어떻게 그러냐. 다 그런 손님들한테 칼국수 팔아서 너 대학 보냈어.” 엄마는 매일 오늘은 들어온 돈이 0원인데 나갈 돈이 얼마인지를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테이블마다 1만2천원, 2만5천원,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하면 어떤 손님이든 참을 만해진다고 했다. 엄마 말대로 ‘그렇게 악착같이 했으니까 너네 공부라도 제대로 시켰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나에게 “내 속에서 어쩌다 저런 게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처럼 나도 내가 어쩌다 엄마 배를 빌려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책을 읽고 대학을 다니고, 마치 나 혼자 잘나서 사는 것처럼 이리저리 직장을 옮겨 다니면서도 나는 내가 엄마, 아빠와는 다른 독립된 개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존경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랑은 해야 하는 부모를 가진 심정이란 그런 것이었다.

가게 하루만 도와도 속이 뒤틀렸다

“내가 ○○아파트 몇동 몇호에 사는데, 밤에 와. 뜨겁게 해줄게.” 어느 날은 웬 노인들이 엄마에게 이런 농담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못 들은 척하더니 주문을 받고 돌아와 칼국수 반죽을 열심히 밀었다. 평소보다 반죽을 미는 손이 격렬했다. 분노의 반죽질이었다. 어쩌다 가게 일에 하루 나가면 이런 성희롱 발언이나 이상한 요구를 하는 손님들을 여럿 본다. 3천원짜리 막걸리를 시키며 계란말이와 김치찌개와 칼국수 서비스를 요구하는 손님, 여럿이 와서 메뉴 하나만 시키면서 밥과 반찬을 멋대로 가져가는 손님, 닭볶음탕 소(小)를 시키면서 주인 이모랑 친하니까 대(大)처럼 달라는 손님. 동생과 나는 그런 손님에게는 불친절하게 ‘안 된다’며 단칼에 요구를 거절한다. 우리가 볼 땐 하등 도움 될 게 없는 손님이지만 엄마는 서비스 반찬을 갖다준다.

여전히 엄마를 이해하진 못하지만 나는 내가 못 견디게 싫었던 엄마의 모든 부분이 나에게도 속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렇게 해서 너네를 키웠다’는 말에는 이렇게 더러운 꼴 참아가며 돈 벌어 자식을 키웠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나서 혼자 힘으로 어른이 되고, 직장을 갖고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다. 실은 견딜 수 없이 싫었던 부모의 그 모든 것을 흡수하며 성장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으면 없는 채로,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기 삶을 이겨냈기에, 거기서 나온 잔가지 하나가 다른 땅에 어설픈 뿌리를 내려 아등바등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다음에 성희롱 노인들을 만나면 엄마처럼 분노의 밀가루 반죽을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법의 매운맛을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한다.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나의 일부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으니까.

늘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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