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쿠바 의대생들이 쿠바 북부에 위치한 산호세데라스라하스에서 주민을 방문해 ‘코로나19 문진’을 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 코로나19는 사람만 골라 옮겨 다니며 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같이 살지 않으면 같이 죽는다’. 이것은 방역에 덜 중요한 사람은 없다는 형평성의 메시지다. 이제, 같이 사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거리는 두되, 누구도 고립되지 않는 것. 이 역설적인 생존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 나라가 있다.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 쿠바를 통해 팬데믹을 본다. ‘구석진 가장자리’는 중심에서 못 보던 온갖 것이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공공의료의 나라’ 쿠바에선 요즘 의대생들이 매일 주민을 찾아가 아침 인사를 한다. 건강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 톡톡~. 펜 끝으로 문 두드리는 소리. 손으로 문을 만지지 않는 게 원칙이다. “계세요? 페스키사 나온 학생이에요.” 어제 온 학생이 다음날도 온다.
마스크를 쓴 의대생과 주민은 멀찍이 서서, 혹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오늘 기분 어떠세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열이 있나요?” “기침은요?” “가족이나 이웃 중에 이런 증상을 보인 분이 있었나요?”
페스키사는 쿠바 보건당국이 실시하는 지역감염 전수조사다. 일종의 ‘찾아가는 문진’이다. 코로나19 같은 보건 위기가 발생하면, 쿠바 의사들과 전체 의과대학(21개) 학생
전원은 페스키사에 투입된다(유학생은 의무가 아니다). 모든 국민이 의사와 의대생의 방문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번 ‘코로나19 페스키사’는 쿠바에서 첫 확진자가 발생한 지난 3월 초부터 곧바로 시작돼 신규 확진자가 0명(7월20일, 현지시각)을 기록한 7월 종료됐다가, 8월 신규 확진자가 다시 두자릿수로 늘어나자 9월부터 재개됐다. 17일 기준 쿠바의 신규 확진자는 73명이며, 최근 일주일 사이 하루 평균 59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사람 간 접촉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 팬데믹 와중에, 쿠바는 왜 현직 의사뿐만 아니라 ‘미래의 의사’들을 거리로 보내는 걸까.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속도전이다. 오랜 경제봉쇄로 의료품은 만성적으로 부족하고 개인정보가 전산화되지 않아 디지털 방역을 하기도 어려운 쿠바로선, 그나마 풍부한 의료 인력에다 의대생을 더해 ‘인해전술’을 펼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역 수단일지 모른다. 한명 한명의 건강 변화를 일상적으로 점검하면서 감염 징후를 가급적 빨리 파악하는 것. 이것이 현재 쿠바가 코로나19와 싸우는 그들만의 방법이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공공의료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되는 가운데, 쿠바 공공의료의 핵심인 일차의료 주치의 제도는 한국에도 시사점을 준다.
지난 4월 쿠바 산호세데라스라하스 ‘가족주치의 진료소’에 모인 의사들이 건물 밖으로 나와 코로나19 방역을 논의하는 모습이다. AP 연합뉴스
쿠바에선 페트병에 담긴 염소 희석액으로 손 소독을 한다. 아바나 한 빵집에 비치된 손 소독제. 김해완 제공
쿠바는 전세계 코로나19 확진자의 절반 이상이 몰린 아메리카 대륙에서 드문 ‘방역 모범국’으로 꼽힌다. 세계보건기구(WHO)가 17일 발표한 자료를 보면, 이날까지 쿠바의 누적 확진자는 4876명(치명률 2.2%)이다. 멕시코(68만
931명, 10.6%), 콜롬비아(73만6377명, 3.2%), 브라질(438만2263명, 3%) 등 지리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나라들이 바이러스에 맥없이 당하는 데 비하면 쿠바의 코로나19 대처는 훌륭한 편이다.
비누가 귀한 쿠바에선 페트병에 든 염소 희석액으로 손을 씻고, 면 티셔츠를 잘라 만든 마스크를 쓴다. 흔한 에탄올 성분 손소독제도, 필터 마스크도 없고 적외선 체온계, 음압병상도 희귀하다. 이렇게 부족한 의료 물자와 방역 인프라를 메우는 쿠바 보건의료 체계의 힘은 무엇일까.
쿠바의 코로나19 방역 최전선, 페스키사에 직접 참여한 한국인 유학생 두명은 크게 세가지를 꼽았다. 첫째, 방역 주체가 된 지역 주민들. 둘째, 튼튼한 일차보건의료 체계. 셋째, 희생정신보다 동료 시민의식으로 무장한 의료진. 아바나 의대(UCMH)에 재학 중인 김해완(28), 정이나(44)씨로부터 생생한 페스키사 현장을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2~16일 전자우편과 전화 통화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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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만? 주민도 의료·방역의 주체
쿠바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지(3월11일) 두 달째인 지난 5월18일(누적 확진 1872명, 신규 10명), 그날도 아바나 의대 2학년 해완씨는 학교 대신 아바나시 플라야 구역으로 ‘등교’했다. 16가구가 사는 아파트 빌딩, 길가의 상가들, 14가구가 모여 사는 좁은 골목을 다니며 집집마다 ‘코로나 문진’ 페스키사를 하는 것이 그의 오전 일과였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마음으로 자청한 페스키사지만 “솔직히 방역 수단으로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해완씨는 이전까지
참여한 페스키사에선 긍정적인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뎅기열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도 그랬다. 모기를 매개로 전파되는 뎅기열 바이러스는 쿠바의 풍토병이라 할 만큼 흔하다. 치사율은 1% 정도이며 치료약도 딱히 없다. “어차피 병원에 가도 별수 없다면, 가족이 있는 집에서 조용히 앓다가 낫고 싶어 하는 주민이 많았어요.” 증상을 축소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등 협조가 잘 안됐다는 뜻이다.
게다가, 해완씨는 뎅기열 페스키사를 하다
모기에 물리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돼 입원까지 한 경험이 있다. 접촉을 최소화해야 하는 마당에 거꾸로 사람을 찾아가라니, 페스키사는 위험할 뿐 아니라 정확한 건강 정보 수집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안일한 조처”처럼 보였다. 모기가 아니라, 사람을 매개로 삼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아바나 의대생 김해완(28)씨가 지난해 지역감염 전수조사(페스키사) 도중 모기에 물린 뒤 뎅기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입원 치료를 받는 모습. 그는 10대 때부터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4권의 책을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김해완 제공
아바나 의대(치과 전공) 3학년 파비오가 지난 5월3일 담당 주민을 찾아가 문진하는 모습. 정이나 제공
골목 ‘1호 집’ 60대 여성은 혼자 살았다. 방문할 때마다 주거환경이 청결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고, 약간의 치매가
있었다. 그는 매일 열과 기침이 난다고 호소했는데, 오후에 ‘가족주치의’(이하 주치의)가 방문진료를 해보면
체온과 호흡기 등 건강에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가 한번은, 주치의가 방문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여느 쿠바인처럼 주치의와 할머니는 평생을 봐온 사이다. 이 일로 할머니는 단단히 화가 났고, 그날부터 페스키사 나온 해완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해완씨가 할머니 상태를 주치의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오해한 것이다. 골목 방역에 ‘구멍’에 생길 위기였다.
페스키사 나온 의대생은 주민이 해준 대답을 토대로 문진 기록을 작성해 주치의에게 전달한다. 크게 세가지 항목이다. 이름, 가족 구성원 수(60살 이상과 미만 구분), 급성호흡기질환 증상 유무. 코로나19 의심환자나 확진자가 발생하면, 의대생은 뒤로 빠지고 기존 환자를 돌보던 주치의와 간호사가 치료 과정 전면에 나선다.
같은 골목 ‘3호 집’에는 40대 남성이 혼자 살았다. “그분은 친화력이 좋아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바이러스를 확산시킬지 모르는 요주의(?) 인물로 눈여겨보던 상태”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1호 집 할머니와 친하게 지내는 거의 유일한 주민이 바로
이 남성이라는 게 아닌가!
동네 사람들은 “3호 집 아저씨가 할머니 생일 때면 맥주를 사서 함께 저녁도 먹는 사이”라고 일러줬다. 해완씨는 곧장 3호 집 ‘요주의 아저씨’한테 도움을 청했다. 할머니 컨디션이 어때 보였는지, 기침 소리를 들으셨는지 등을 물어가며 할머니를 지켜봤다. 그 덕분에 1호 집 할머니의 건강 상태를 아주 놓치진 않을 수 있었다. 이후 주치의가 다시 방문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할머니는 쭉 건강했다.
지난 5월18일 실시한 페스키사 기록. 주소, 가족 구성원 수(60살 이상과 미만 구분), 급성호흡기질환 증상 유무를 적어 가족주치의에게 전달한다. 김해완 제공
해완씨가 가장 두려웠던 날은, 담당 구역 바로 옆에서 전국 확진자의 절반이 한꺼번에 나온 날(5월12일)이다.
“21명 중 무려 9명이 제 구역 코앞에서 나온 거예요. 동네에서 들은 바로는 그곳 주민들이 파티를 한 모양이에요. 제 담당 구역 주민들에게 일일이 심각성을 알리고 집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드렸어요.” 그러면서 새로운 방역지침도 함께 전달했다. 주민은 궁금한 내용을 의대생에게 묻고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니 가짜뉴스가 퍼지기도 어려웠다. “방역지침을 잘 따라주신 덕분인지 추가 확진자 3명만 나오고 사태는 종료됐어요. 코로나19 페스키사는 뎅기열 때와는 전혀 달랐어요. 주민들이 훨씬 적극적으로 협조하셨어요.” 감염병에 익숙한 아바나 주민들이지만, 사람이 바이러스의 매개인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선 공포가 더 컸다.
코로나19는 사람을 숙주로 삼는다. 그렇다면 코로나19는 어떤 바이러스보다도 사람을, 사람이 얽혀 살아가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1호 집 할머니는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어도, 사회적으로 고립되지는 않았다. 매일 건강을 챙기러 찾아오는 예비 의사가 있고, 할머니의 상태를 궁금해하는 3호 집 이웃이 있었다. 아바나 플라야 구역은 코로나19를 겪으며 ‘누구도 고립되지 않는 동네’를 해완씨 눈앞에 드러낸 셈이다.
어떤 의사도 코로나19를 막을 수 없지만, 일상을 안전하게 바꿔가려는 이웃의 노력만이 서로를 바이러스로부터 막아주고 있었다. 해완씨가 담당 구역에서 페스키사를 하는 동안(3~6월) 확진자가 나온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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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진료’ 없는 이유…의사가 환자를 안다는 것
아바나 의대 1학년 정이나씨는 지난 5월 아바나시 누에보 베다도 구역 페스키사를 맡았다. 어느 날, 역학조사 결과 담당 구역에 코로나19 의심환자가 있다면서 보건당국이 그의 집 주소를 보내왔다. 주소를 보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평소에도 문을 잘 열어주지 않던 주민 하비에르(가명)의 집이었다. 이나씨는 팀을 이뤄 함께 다니던 쿠바인 의대생 파비오(3학년)와 단숨에 그 주소를 찾았다. 매일 문을 두드리던 곳이니 헤맬 이유가 없었다.
당국의 지침은 이랬다. “열어줄 때까지 문을 두드리세요. 한명만요.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만져선 안 됩니다. 그분을 주치의가 있는 ‘콘술토리오’(진료소)까지 동행해드리세요.” 주민이 반응할 때까지 ‘이나-파비오 팀’은 문 앞에서 내내 기다렸다.
하비에르 집에서 주치의가 있는 진료소까지, 의대생 2명이 하비에르와 함께 이동했다. 걸어서 200m 거리에 주치의 진료소가 있었다. 200m. 이 거리는 거의 모든 쿠바인에게 적용된다. 한 동네 주민이기도 한 주치의의 진료소는 반드시 주민이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세워져 있다. “주치의 진료소가 주민 곁에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이 통제(거리두기 2단계 ‘지역 간 이동 금지’)돼도 의료 서비스를 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지난 2월 말에서 3월 초 사이, 경남 거창군 코로나19 확진자들이 입원 치료를 위해 창원 마산의료원까지 123㎞를 이동해야 했던 상황과 대조적이다.
쿠바 의대생은 교육과정 6년 동안 일선 주치의가 일하는 진료소를 중심으로 실습하며 꾸준히 지역 주민과 만난다. “저희는 대학교수한테만 배우지 않아요. 진료소 주치의한테 동시에 배워요.
환자와 소통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요. 모든 동네 주치의는 의대생에게 지역사회에서 얻은 경험과 정신적 자산을 나눠주는 걸 임무라고 생각하고요. 이런 방식은 쿠바가 위험을 감수하고 거리에 나서는 의사, 사회와 소통하는 의사를 키우는 특별한 방법처럼 보여요.”(김해완) 쿠바 의대생은 지식뿐만 아니라 미래의 환자와 관계 맺는 법을 동시에 배운다는 것이다.
가족주치의 진료소 다음 단계 의료시설인 ‘폴리클리니코’에서 주민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김해완 제공
주치의가 있는 진료소는 ‘쿠바 공공의료’를 떠받치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으로, 쿠바 일차보건의료의 첫 단계다. 한국으로 치면 보건소쯤 된다. 주치의 1명과 간호사 1명이 팀을 이뤄 한 구역(약 200가구) 주민의 건강을 돌본다.
주치의 역할은 질병 ‘치료’보다 ‘예방’에 방점이 있다. 물론 진료도 하지만 기본적인 건강 컨설팅, 병의 원인이 되는 환경적 요인을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약 처방, 영양·운동 정보 공유도 일상적으로 이뤄진
다. 주치의 진료소는 쿠바 전역에 약 1만6천 곳 설치되어 있다.
진료소 다음 단계 의료기관은 ‘폴리클리니코’다. 진료소보다 더 전문적인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질병을 담당하면서, 한 곳당 진료소 20여곳을 관리한다. 안과, 치과가 설치되어 있고 심전도, 엑스레이, 초음파, 내시경 등 검사나 재활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온다. 전문의들이 24시간 진료하는데, 진료소 주치의가 당직을 서거나 수시로 협업하는 구조다. ‘진료소와 폴리클리니코’가 쿠바 일차의료 기관으로 분류된다. 이 단계에서 주민 질병의 약 80%가 관리된다.(쿠바 보건성)
폴리클리니코 다음 단계 의료기관은 ‘오스피탈’이다. 중증 환자 입원실을 갖춘 대형 종합병원이며, 한 곳당 폴리클리니코 3곳 정도를 관리한다.
쿠바에는 한국엔 없는 ‘마을 건강 보고서’가 있다. 이것은 한마을에 사는 개인들의 건강 정보를 가족별로 묶은 기록이다. 한국에선 개인의 건강 정보가 진료받은 의료기관마다 관리되며 기관끼리는 공유하지 않는다.
개인정보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될 소지가 있어서지만, 의료기관 사이의 통합적 진료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반면, 쿠바는 개인의 건강 정보를 가족 단위로 의료인(주치의)이 직접 관리한다. 건강 정보를 개인이 아니라 마을(지역사회) 단위로 기록하는 것은 쿠바 의료가 ‘예방’에 집중한다는 점을 상징한다. 치료 중심의 임상의학은 접근 대상이 ‘환자’ 즉 개인이지만, 예방의학은 접근 대상이 ‘개인, 가족, 지역사회’로 훨씬 넓다. 병은 사회적·환경적 요인으로도 발생하고, 이것은 보건의료체계의 개입으로 미리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치의는 마을 주민들의 건강 정보를 주민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갱신, 축적한다. 만약, 주민이 코로나19에 감염돼 ‘특별 격리시설’로 옮겨지더라도, 주치의는 이송과 치료 과정 전반에 개입하며 상급기관 의료진과 정보를 공유한다. 그러니까 “주치의가 환자를 알게 된다”. 병증만이 아니라, 몸 안과 밖의 역사를 안다. 그러다 보니 ‘3분 진료’는 있을 수 없다. “최소 20분 진료”한다.
가족주치의 진료소 내부. 벽에 동네 아이들의 사진과 주민들의 건강 정보를 담은 메모가 붙어 있다. 주치의 진료소는 아이, 여성, 고령자를 우선적으로 돌본다. 김해완 제공
가족주치의는 ‘마을 건강 보고서’를 쓴다. 주민이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건강 정보가 주치의에 의해 축적된다. 김해완 제공
“환자에 대해 아는 것만 말해도 3분은 모자라죠. 커피 들고 찾아온 환자랑 주치의가 일상적인 사담(수다)을 나누는 풍경도 흔하고요. 사실 ‘의사와 환자’는 근본적으로 동등하기 어렵겠죠.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지만, 그 환자를 도울 의사는 누구나 되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의사와 주민’은 동등해요. 쿠바에선 지역 출신이 가까운 지역 의대에 가서 국민이 낸 세금으로 무상교육을 받고, 지역으로 되돌아와 주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요. 의사와 환자 모두 ‘주민’의 범주로 묶이면서 균형 관계를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쿠바 의사들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헌신보다 동료 시민의식에 가까워요.”(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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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의대, 전교 1등 아니어도 ‘들어와~’
쿠바는 인구 1천명당 의사 수가 8.4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2018년 기준, 세계은행) 쿠바 의사 9만5천여명 가운데 진료소 주치의에 최적화된 가정의 비율은 48%(
2006년, 쿠바 보건성)다. 이렇게 일차보건의료에 집중하는 쿠바 공공의료는 사회주의 정책의 일부로서 ‘제한적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본래 일차보건의료(Primary health care)는 세계보건기구(WHO) 주도로 이뤄진 ‘알마아타 선언’(1978)을 통해 널리 알려진 개념이다.
감염병이나 환경성 질환으로 고통받는 개인과 가족에게 필수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사회 역량을 강화해 주민 스스로 건강 증진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다는 것이 알마아타 선언의 뼈대다. 무상의료(1961)를 시작으로 가족주치의 제도(1984)를 도입한 쿠바식 공공의료는 알마아타 선언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례로 널리 인정된다.
고령화에 따른 만성질환, 환경오염으로 인한 감염성 질환 및 환경보건 문제가 증가하는 오늘날, 예방 중심 일차보건의료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런 문제는 치료 중심의 임상의학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쿠바 21개 의대 커리큘럼은 일제히 예방 중심 일차보건의료를 담당할 의사를 양성하는 데 집중한다. 졸업 후에는 모두 동네 진료소에서 3년 동안 일해야 한다. 말하자면, 모든 의사가 ‘가정의학과 전공의’가 되는 셈이다. 이 과정을 마치고 가정의학 전문의 자격증을 따면, 그 후에 원하는 다른 전공을 택할 수 있다.
쿠바에는 세계 최대 의대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의과대학(ELAM·엘람)은 아예 저소득국가 공공의료 부문에서 일할 의사를 기르는 게 목표다. 엘람에는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등 다양한 국가 출신 유학생 1만여명이 와 있다. 의료 서비스가 취약한 지역 출신인지, 졸업한 뒤 조국으로 돌아가 지역에서 일할 것인지를 따져 학생을 선발하고, 성적은 크게 따지지 않는다. 등록금, 교재, 기숙사비는 모두 무료다.
쿠바 아바나 의대 정문. “여기서는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적힌 팻말이 서 있다. 김해완 제공
의대 기능을 겸하는 칼릭스토 가르시아 병원(아바나 소재). 정문에 체 게바라 사진과 그의 말이 붙어 있다. “단 한명의 목숨이 가장 부유한 인간의 재산보다 몇만배는 더 가치 있다.” 김해완 제공
외국인인 김해완씨와 정이나씨가 의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입시 성적만으로 학생을 뽑지 않는 쿠바만의 교육제도 덕분이다. <다른 십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 등 4권의 인문학 서적을 펴낸 작가이기도 한 김해완씨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문학·철학 공부와 글쓰기를 하면서 10·20대를 보냈다. 이후 문학을 전공하러 남미에 왔다가 돌연 전공을 틀었다.
“의대는 일종의 ‘보험’이었어요. 쿠바 의학이 워낙 지역사회와 밀접하니까 의대생이 되어 주민들과 교류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배우고, 또 앞으로 여기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죠.”(김해완) 사회인류학 박사인 정이나씨 역시 고등학교 졸업증명서와 건강검진, 범죄 조회 등 관련 서류를 내는 것만으로 의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내국인이 의대에 진학하는 것도 바늘구멍은 아니다. 성적 최상위권부터 입학시험 70점(100점 만점) 넘는 중상위권이면 의대에 입학할 수 있다. 의대 정원(아바나 의대의 경우 약 2천명) 자체가 많고, 2학년 과정을 마치면 학업 강도 등의 이유로 절반 정도가 그만둬 ‘티오’가 많이 생기는 현상도 ‘쉬운 입시’의 한 원인이다.
평범한 학생을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의사’로 가르쳐 사회에 내보낸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 참고 문헌: <쿠바 일차보건의료 성공 요인 분석: 진료소와 지역사회 관계를 중심으로>(2020, 라틴아메리카연구 제33권 2호) <통합의료체계는 어떻게 공동체의 건강형평성을 보장하는가?: 쿠바 사례를 중심으로>(2020, 이베로아메리카연구 제31권 2호) <쿠바 의료 외교의 유용성과 한계>(2019, 라틴아메리카연구 제32권 2호) <쿠바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고찰: 지역사회의학과 일차보건의료를 중심으로>(2017, 중남미연구 제36권 2호)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의료>(2010, 린다 화이트포드·로렌스 브랜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