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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나와 친구의 평범하지만 고유한 삶을 잘 기억해두어야겠다

등록 2020-10-10 09:42수정 2020-10-10 09:44

[토요판] 이런 홀로
40대 앞둔 비혼의 코로나 추석

어딘가 파괴적인 사이버 성묘
밥과 국 이미지 드래그해 추모
차례상은 게임에 불과했나

40대 앞둔 비혼, 친구와 만나
세상의 기준에 붙들렸던 시간과
벗어난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난달 8일 인천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에서 ‘온라인 성묘 서비스’를 시연하고 있다. 성묘객들이 공원을 방문하지 않고 비대면 방식으로 성묘하는 서비스다. 연합뉴스
지난달 8일 인천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에서 ‘온라인 성묘 서비스’를 시연하고 있다. 성묘객들이 공원을 방문하지 않고 비대면 방식으로 성묘하는 서비스다. 연합뉴스

불현듯 다른 시대가 도래해버린 것 같은 나날이다. 추석 풍경도 뒤집힌 듯했다. 사이버 성묘, 랜선 차례, 영상통화 명절 인사 같은 말들이 마치 ‘비대면’ ‘코로나 시대’ ‘추석 풍경’에 걸맞은 뉴스를 위해 맞춤 제작된 유행어처럼 떠돌았다. 사이버 성묘란 것은 어딘가 파괴적인 구석이 있었다. 고인의 사진을 선택하고 차례상의 음식을 선택한 뒤, 헌화대에 올릴 꽃을 골라 드래그하고 밥과 국과 수저를 차례로 이미지 위에 끌어다 놓고, 추모 글을 작성하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은 피자 만들기 게임처럼 느껴졌고, 현실의 우리가 오랜 시간 열성을 바쳐온 이 모든 의례가 게임에 불과했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 말고 정말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태어나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차례도 없고 가족 스트레스도 없는 평화로운 명절을 보냈다는 어느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니, 과연 코로나19가 새로운 시대를 끌어다 우리 앞에 강제 붙여넣기 하고 있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명절증후군이나 추석 스트레스에 대해 내가 진짜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바는 많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이 상상에 가깝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와 별로 상관없는 세계에서 살아온 지 오래다. 차례를 지내러 가 친척들로 복닥거리는 명절을 보내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고, 아직까지 찾아가 기억하고 싶거나 감사하고 싶은 고인도 내 주위에는 없다. 서로의 가족을 신경 써야 할 배우자도, 눈치 보이는 시집 식구들도, 부모님께 손주 재롱을 보여드려야 할 자식도 내게는 없다. 마침 올해는 아버지만 다녀오곤 했던 큰집 차례도 코로나19로 생략하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서울시설공단 누리집
서울시설공단 누리집

나훈아가 “테스 형” 부르짖을 때

나는 서울에 사는 부모님 댁에 하루 다녀왔고, 나머지 연휴 기간에는 나훈아가 “테스 형!”을 부르짖으며 코로나 바이러스를 불태워 폭파하는 비대면 콘서트를 흘끗흘끗 지켜보면서 부지런히 새로 이사 온 집 정리를 했다. 새 벽지로 도배를 하고, 붉은색의 부엌 타일을 흰색으로 칠하고, 여기저기 벗겨지고 틀어진 몰딩을 보수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창문 틈을 막고, 나무색 창틀에 흰 시트지를 붙였다. 그러는 동안 호쾌한 가수는 미련도 후회도 없이 ‘사내답게 살다가 사내답게 갈 거’라며 마침내 불에서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나는 페인트로 엉망이 된 옷자락에 손을 닦으며 사내다운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40대를 바라보는 나와 같은 혼자 사는 여성들은 명절 연휴를 어떻게 보낼까. 나는 가까운 친구들끼리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눠 먹거나, 보통 때 갈 수 없는 조금 긴 여행을 떠나곤 했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인지 몰라도 좀 다른 연휴를 보낸 것 같다.

집이 그런대로 정리된 연휴 마지막 날, 친한 친구를 집으로 불러 만났다. 미국에 사는 그는 오랜만에 한국에 다니러 온 참이었다. 2주간의 격리 기간이 지난 지도 오래였지만, 공교롭게 한국의 코로나 상황이 좋지 않아지는 시기와 맞물려 우리는 예전보다 가까이 있음에도 영상통화를 통해 더 자주 얼굴을 보았다. 미국에 떨어져 있을 때도 잘 하지 않던 영상통화인데,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게 수주 만에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내 나이에 나와 같은 조건의, 그러니까 가족 없이 홀로 일하며 삶을 꾸려가는 싱글 여성인 친구는 생각보다 귀하다. 고등학교 친구인 우리는 10대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많은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보냈다. 서른살 무렵 서로 다른 도시로 흩어져 비슷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았다. 몇년 전부터인가 서로의 삶의 모양을 그려보고 겹치거나 이어보기 시작했고, 표준 생애주기(라는 게 있다면)에서 비켜난 여성으로서의 우리의 삶이 대화의 주제가 되곤 했다. 문득 돌아보니, 다른 친구들은 모두 분주히 정착과 전세대출과 육아의 세계로 떠나 있고, 이렇게 여기에 친구와 내가 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코로나로 세상이 뒤집힌 한국의 추석 명절에, 서울과 뉴욕에 살던 우리는 영상통화를 반복하다, 비로소 새로 이사한 내 집에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우리는 망했고 세상도 망했다며 웃었다. 그리고 각자의 허영과 야망에 대해, 세상의 기준에 붙들렸던 시간들과 거기서 벗어난 놀라운 순간에 대해, 난자 냉동과 아이에 대한 바람에 대해, 지나간 연애와 남자들과 자신의 한계에 대해, 소녀였던 우리와 각자의 자리에서 변해가는 지금의 우리에 대해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뒤로 추석의 보름달이 깨질 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친구는 내게 노년의 한 예술가 여성이 쓴 사랑스러운 소설 한권을 선물하고 돌아갔다. 그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레몬빛 커버의 책이었다. 거기에는 그 노년의 여성이 기억하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작고 신비스러운 이야기들이 가득 쓰여 있었다. 사랑, 죽음, 기억에 관한 이야기였다.

‘혼자 사는 늙은 이모’는 어떨지

가족들로 북적대는 미디어 속의 추석 풍경을 바라보다가 가끔 먼 미래를 생각하면 ‘○○○는 자식을 둔 적이 없었고 그가 죽은 뒤 그에 대한 기억은 흩어져버렸다’와 같은 문장이 떠오른다. 명절 무렵이면 우습게도 어느 소설에 등장할 법한 ‘조카와 친밀한 혼자 사는 늙은 이모’와 같은 인물을 생각하며, 내 조카가 어른이 되어버린 모습과 그가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이 어떨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나는 시간이 흘러 우리가 늙고 우리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흩어져버릴 때, 코로나 추석을 맞아 태평양을 건너 이곳에서 만난 40대를 앞둔 우리의 시간을, 친구의 이야기를 잘 기억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에 태어나 대한민국 서울의 어느 동네에서 자라 각자 홀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는 나와 친구의 평범하지만 고유한 삶. 우리가 최근 몇년간 이야기를 나누며 나와 그가 걸어온 시간들도 역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서로의 삶을 기억하고 떠들어대는 것은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사는 여성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작은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명절에 대한 생각은 또 조금씩 변해갈 것이다. 몇년 후엔 결혼해서 시집 욕을 해대며 ‘명절증후군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고? 내가?’ 하고 있을지도. 더 시간이 지나 늙고 약해지면 내가 죽고 나서 누구라도 좋으니 사이버 차례상에 계반삽시(밥그릇 뚜껑 열어 숟가락 꽂는 의식) 하고 술잔 아이콘이라도 하나 올려주기를 바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듯한 코로나 대유행 한가운데에서 보낸 2020년의 추석은 그랬다는 이야기. 긴 연휴는 끝났고 친구에게선 미국에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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