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종의 와인을 모두 꺼냅니다. 다양한 와인을 마셔보자는 취지이니만큼 10㎖ 이내로 따라드립니다.”
어느 날, 한 와인바의 시음회 안내 문구였다. 80종이라니! 시음 시간 내에 80종을 다 마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설렜다. 한자리에서 그렇게 많은 와인을 마실 수 있다니! 한편으론 두려웠다. 아무리 10㎖라고 해도 여러번 받으면 취하지나 않을지.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남은 자리가 얼마 없다는 공지가 떴다. 세상에 나 같은 ‘와인 사냥꾼’들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놀라면서도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덜컥 신청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와인잔 1개와 80종의 와인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받고,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으로 시음회 장소에 들어갔다. 번호가 적힌 와인들이 진열돼 있었고, 마셔보고 싶은 와인을 달라고 하면 운영진이 10㎖씩 따라주는 방식이었다. 10㎖는 한 모금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양이라서, 처음엔 감질이 났다. 와인을 뱉을 수 있는 통도 마련돼 있었지만 내겐 필요 없는 물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입에만 갖다 대도 내 취향이 아닌 와인이 있었고, 이런 와인들은 가차 없이 버렸다. 또 더 마셔보고 싶은 와인들은 여러번 더 받아서 마셔보기도 했다. 3시간 동안 내가 마셔본 와인은 모두 37종! 절반을 채워보겠다는 목표엔 도달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맛을 보면서도 전혀 취하지 않았으니 꽤나 선방한 셈이었다.
그러나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었음에도 앞으론 지나치게 많은 종류의 와인을 마시는 시음회는 참석하지 않아야겠단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됐다. 조금씩 너무 많은 와인을 마시다 보니 점차 맛이 분간되지 않았다. 그저 명확하게 내 취향이 아닌 것들을 골라내는 정도였다. 마음에 쏙 든다 싶은 와인은 단 하나였다. 와인은 음식과 함께 마시며 시간을 두면서 그 맛을 음미하는 술이라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이 경험 이후로 시음회를 고르는 기준이 생겼다. 한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먹으면서 4~6병의 와인을 마시는 곳이 가장 좋다. 시음회는 큰 장소를 빌려 여러 수입사가 각자 부스에서 와인을 제공하는 유형, 음식을 코스로 제공하면서 각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곁들이는 유형, 와인을 중심으로 간단한 음식을 제공하는 유형 등으로 나뉜다.
첫번째 유형은 많은 종류의 와인을 마실 순 있지만 돌아다니면서 와인을 받고 마셔야 하기에 즐길 틈이 없다. 또 고가의 와인은 잘 내놓지 않고, 나온다 해도 금방 소진돼버려서 내 몫이 남지 않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음식에 집중하고 싶을 땐 두번째, 와인 자체에 집중하고 싶을 땐 세번째 유형을 선택한다. 그러면 한병당 최소 한잔 분량의 와인을 천천히 마셔볼 수 있고, 여러 음식과의 궁합도 비교해볼 수 있고, 각각의 맛을 기억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와인 한병만 진득히 마셔도 충분할 테지만 ‘와인 사냥꾼’에겐 정복하고 싶은 와인이 너무 많기에, 오늘도 각종 와인바의 에스엔에스(SNS)를 돌아다니며 전쟁터를 찾아 헤맨다.
<한겨레 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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