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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랑의 노래를 불러라, 평화의 춤을 추어라

등록 2020-11-28 09:05수정 2020-11-30 10:38

[토요판] 커버스토리
늦봄의 편지

58살에 시작된 123개월 옥살이
새로 발견된 첫 수감 때 첫 편지 등
부모님, 아내, 자녀들에게 보낸
‘삶의 통찰’ 800여통 아카이브로

“나의 사랑·기쁨…신나게 삽시다”
아내 박용길 향한 끝없는 애정
“아름다운 사랑의 꿈 꾸어라”
자녀들에게 보낸 무한한 축복

주변 항상 아끼고 돌보는 마음이
민중과 평화 생각하는 발걸음으로
“민주도 통일도 자주도
그 본질은 민중의 생존 자체”

3·1운동 완성하는 길이 ‘통일’
생명사랑 이루는 길이 ‘평화’
“나무가 나무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꿈”
민주화운동가, 통일운동가, 신학자, 목사, 시인. 여러 이름을 가졌지만 어느 이름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늦봄 문익환(1918~1994)의 옥중편지가 디지털 아카이브로 되살아난다. 1999년 발간된 <문익환 전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오픈 아카이브에도 그의 편지 내용과 원본 이미지가 일부 실려 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통일의집은 문 목사가 1976~1993년 사이 6차례, 123개월의 수감 생활 동안 쓴 옥중편지 800여통 전체의 전문과 이미지를 새달 1일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를 열어 공개한다. 수장고에 보관 중이던 것과, 첫 수감 40일 만인 1976년 4월11일 처음으로 아내 박용길 장로에게 쓴 것을 비롯해 최근 새로 발견한 편지 49통 등 포함돼있다. 이 가운데 89통을 골라 실은 책 <늦봄의 편지>도 같은 날 발간한다. 책은 비매품으로, 12월7일까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프로젝트를 후원하면 받아볼 수 있다. 위 사진 봉함엽서 수신인 ‘문바우’는 그의 손자고, 까맣게 칠해진 곳은 사전 검열로 삭제된 것이다. 그의 편지에서 ‘문익환’의 현재적 의미 네 가지를 찾아봤다. 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사진 통일의집 제공
민주화운동가, 통일운동가, 신학자, 목사, 시인. 여러 이름을 가졌지만 어느 이름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늦봄 문익환(1918~1994)의 옥중편지가 디지털 아카이브로 되살아난다. 1999년 발간된 <문익환 전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오픈 아카이브에도 그의 편지 내용과 원본 이미지가 일부 실려 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통일의집은 문 목사가 1976~1993년 사이 6차례, 123개월의 수감 생활 동안 쓴 옥중편지 800여통 전체의 전문과 이미지를 새달 1일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를 열어 공개한다. 수장고에 보관 중이던 것과, 첫 수감 40일 만인 1976년 4월11일 처음으로 아내 박용길 장로에게 쓴 것을 비롯해 최근 새로 발견한 편지 49통 등 포함돼있다. 이 가운데 89통을 골라 실은 책 <늦봄의 편지>도 같은 날 발간한다. 책은 비매품으로, 12월7일까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프로젝트를 후원하면 받아볼 수 있다. 위 사진 봉함엽서 수신인 ‘문바우’는 그의 손자고, 까맣게 칠해진 곳은 사전 검열로 삭제된 것이다. 그의 편지에서 ‘문익환’의 현재적 의미 네 가지를 찾아봤다. 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사진 통일의집 제공

▶ 기록은 역사다. 다만, 누구든 쉽게 접근하고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현재에 울림을 주고 미래에 방향을 제시하는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통일의집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던 문익환 목사의 옥중편지 내용과 원본 이미지를 모두 디지털로 바꿔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를 여는 이유다. 아카이브와 12월1일 발간되는 옥중편지집 <늦봄의 편지>에서 문 목사가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네 가지 열쇳말로 정리했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이렇게 한 번 더 편지를 쓴다는 기쁨이 홀로 사는 생활의 외로움을 무지개로 날려 버리는군요. 이 작은 흰 지면은 저에게는 금싸라기같이 소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제 마음의 무늬를 옮겨 놓으면 날 것 같은 기분이 된답니다. 몸과 마음을 깎아 사랑해 주시는 아들 드림”(1982년 11월24일 아버님께)

가로 19㎝, 세로 30㎝ 봉함엽서는 늦봄 문익환 목사의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하다. 부모, 아내, 자녀, 손자녀, 동생, 조카, 지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엔, 한 달에 고작 한 차례 허락된 봉함엽서 한 장이 너무 작았다. 네 번째 수감된 1985년부터는 2~3일에 한 차례로 편지 쓸 기회가 늘었지만 지면이 비좁긴 마찬가지였다. 그렇잖아도 읽기 힘든 악필에, 행갈이도 띄어쓰기도 대부분 무시한 채 빽빽하게 쓴 편지는 감옥 담장을 넘어 서울 도봉구(현재 강북구) 수유동 527-30 자택(현재 통일의집)에 당도했고, 여러 장의 복사본으로 불어나 옥중의 문 목사와 세상이 함께 살도록 했다.

봉함엽서가 접히는 부분인 날개에까지 쓴 편지들은 보통 200자 원고지 20~30장 분량을 훌쩍 넘긴다. 58살에 시작된 6차례의 옥살이 도합 123개월 동안 남긴 800여통의 편지는 그대로 ‘문익환’이다. “우리 세대의 좌절을 너희 세대가 겪는다는 것은 바라지 않”(1979년 5월16일)고, 손자녀들의 “맑은 눈으로 들여다보아도 한 점 티 없는 생을 살려고”(1987년 3월3일) 했던 할아버지, 아픈 사람에게 도움이 될 지압점을 알려주며 유치원생 같은 그림을 그리고는 “내 그림 솜씨, 이만하면 근사하지?”(1992년 7월4일, 새로 발견된 편지 가운데 하나)라고 웃음을 안겨주던 아버지, “무언가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네 친구들의 생을 밀고 가는 힘이라고 했지? 그게 양심인데, (…) 양심이 오늘의 복잡한 역사적·사회적 현실에서 나침반 구실을 하려면, 정말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1986년 12월13일)고 조언했던 큰아버지. 어떤 이에게든 존경할 만한 ‘어른’이 문 목사였다.

1979년 12월 두번째 출소 뒤 서울 수유동 자택에서 어머니(왼쪽 둘째) 등과 함께 기뻐하는 문 목사(가운데). 통일의집 제공
1979년 12월 두번째 출소 뒤 서울 수유동 자택에서 어머니(왼쪽 둘째) 등과 함께 기뻐하는 문 목사(가운데). 통일의집 제공

이런 면모는 수감된 지 40일 만인 1976년 4월11일 처음 박용길 장로에게 쓴 편지, 1979년 9월10일 아내에게 ‘용서’에 관한 생각을 밝힌 편지, 박 장로가 양심수 서예전 등의 참석차 일본과 프랑스를 방문해 한국에 없었을 때인 1992년 4월21일~7월10일 큰아들 호근씨에게 보낸 편지 등 최근 발견된 편지 49건을 통해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문익환 평전>을 쓴 김형수 작가는 “어떤 수난과 시련 속에서도 문 목사는 온기와 사랑을 잃지 않고 삶의 환희를 만들어냈다. 그의 옥중 편지는 지금도 시련에 빠진 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사랑, 마음을 행동으로 구체화하는 동력

“붉게 달아오는 수줍은 볼을/ 선들바람에 식히며 쳐다보는/ 코스모스 꽃송이 하나/ 너무 깨끗하여/ 싱거운 달은 소리 없이 내려와/ 그 앞에 무릎을 꿇었지/ 이렇게 시작된 꿈길은 어느새 33년/ 우리는 이 꿈속에서 사랑을 익혔고/ 익어가는 사랑 속에서 꿈들을 낳았지//(…)// 호근아, 은숙아,/ 영금아, ---아,/ 의근아, ---아,/ 성근아, ---아,/ 마침내 이 길이 하늘과 맞닿아 끝내준/ 그 산등성이에/ 초롱초롱한 다람쥐 눈알 같은 꿈을 묻어/ 반달만 한 무덤을 만들고/ 둘레에 코스모스 꽃씨를 뿌려다오/ 그리고 가을만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코스모스 꽃잎 하나씩 따 물고/ 꿈을 꾸어라/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꿈을 꾸어라”(‘꿈길’ 1977년 6월10일)

‘꿈길’은 문 목사가 아내 박용길 장로와의 결혼 33주년과, 딸 영금씨의 결혼을 앞두고 보낸 편지에 담은 시다. 민주화 투사의 거친 이미지와 달리, 이 시의 갈피갈피엔 박 장로와 자녀들을 향한 문 목사의 애틋함이 넘쳐난다. ‘코스모스’는 문 목사가 박 장로를 부르던 애칭으로, ‘사랑꾼 문익환’의 면모를 보여준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39년 4월24일, 요코하마 한인 교회에서 열린 관동조선신학생회 모임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1944년 6월17일 결혼해 1994년 1월18일 문 목사가 별세할 때까지 50년 동안 사랑하는 부부로, 민주화 운동의 든든한 동반자로, 맑은 신앙의 동지로 지냈다.

봉함엽서 한 장에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담아야 했기에 문 목사의 옥중편지는 ‘어머님’ ‘영금아’ ‘바우야’처럼 한 통에도 수신인이 여러 명이었는데, 박 장로가 빠진 적은 거의 없었다. 편지에서 “내 사랑” “당신의 사랑” “나의 봄길(문 목사가 지어준 박 장로의 아호)님” 같은 표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꿈길’이 실린 편지에서도 그는 “(당신은) 나의 사랑이요, 기쁨이요, 찬양이오. 우리 총각 처녀로 다시 만나 새로 사랑하며 새로운 ‘꿈길’을 신나게 살아가 봅시다”라고 적었다. 결혼해 자녀를 기르는 이들한테는 사랑과 신뢰에 기반한 단단한 부부관계가 가족 행복의 중심임을 증명해 보인 셈이다.

이 시에선 문 목사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두드러진다. 호근, 영금, 의근, 성근은 그의 아들딸이고, 은숙은 큰며느리다. 줄표로 비어 있는 자리는 미래의 사위, 며느리다. 자식을 얼마나 아꼈으면,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자식의 배우자까지 하나하나 부르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꿈”을 빌어줬을까. “아빠가 비는 축복은 바다 같”았다. 자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위, 며느리도 ‘○서방’ ‘새아기’가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며 이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세심하게 의견을 전했다. ‘한국적 오페라’를 구상한 오페라 연출가 호근씨에게는 오페라에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과 ‘민중의 숨결’을 불어넣도록 권하고, 오페라 가수이자 성악가인 은숙씨에게는 목소리와 건강관리를 걱정해주는 식이었다. 나이 든 자녀 부부도 스스럼없이 고민을 나눌 수 있었던 자상하고 올곧은 아버지였기에, 녹음도 기록도 허락되지 않은 그의 재판에 의근·성근씨가 참석해 모든 발언과 재판 진행 과정을 복기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대의에 복무해야 하므로 가족을 살필 틈이 없다는 아버지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문 목사는 부모를 생각하고 존경하는 마음도 극진했다.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결혼 70주년에 그가 보낸 편지다(1911년 결혼한 두 사람은 1985년 문재린 목사가 별세할 때까지 74년을 해로했다). “아버님, 어머님의 한 점 부끄러울 것 없는 티 없이 맑은 영광스러운 생을 이어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다시 이어주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은 (…) 돈으로는 도저히 계산되지 않는 엄청난 유산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것은 맑고 뜨거운 마음이요, 만인이 우러러볼 수 있는 높은 ‘삶’이었습니다. 저는 이 유산을 손상을 입히지 않고 후손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무언가 자그마한 것이라도 보태어 전하고 싶습니다.” 문 목사가 며느리, 사위도 이름을 부르며 자식으로 여긴 것도 “이 나이에 ‘익환아!’ ‘용길아! 이름을 불러 주시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거, 이건 정말 특별한 축복 가운데 특별한 축복”(1982년 12월3일 박 장로에게) 덕이었다.

문 목사가 쓴 문장들은 내 가족과 친지를 귀하게 여기는 데서 역사와 사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시작됨을 보여준다. “나의 하나밖에 없는 사위, 성수야. 부디부디 행복하여라. 너희가 정말 행복해야 남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는 법이니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기도 하고. 행복이란 상대편이 행복한 것을 보면서 받는 인생의 ‘덤’이라는 것.”(1977년 7월8일)

민중, 발바닥의 역사

아내 박용길 장로와 함께. 박 장로는 문 목사의 가장 든든한 동지였다. 통일의집 제공
아내 박용길 장로와 함께. 박 장로는 문 목사의 가장 든든한 동지였다. 통일의집 제공

“역사의 유적은 손이 남기지만, 역사의 자취는 발바닥이 남기는 게 아닐까요? 손이 남기는 유적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발바닥 자국에는 이름이 남아 있지 않아요. 거기는 인정이 찍혀 있을 뿐이지요. 우리는 이제 손이 남긴 역사의 유적들을 밀어내고, 그 밑에 덮여 있던 발자국의 역사를 찾아야 할 것 같군요. 가도 가도 식지 않는 발바닥 자국들의 용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 아닐까요?”(1982년 10월 박 장로에게)

자기가 발 디딘 곳의 역사적 좌표를 아는 이, 아니 자신이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임을 자각하는 이의 사랑은 이웃과 사회로 확장된다.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문 목사의 사랑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 독재로 이어지는 수난을 100년 가까이 감내한 이 땅의 민중에게로 흘렀다. 그는 온갖 험한 곳을 밟고 다니고 누구도 소중함을 알아주지 않지만 생명을 길러내는 땅의 진실에 맞닿아 있는 발바닥이, 역사의 주인인 민중이라고 봤다. 1988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등에서 문 목사와 함께 활동했던 소설가 정도상 작가는 “목사님이 옥중에서 파스치료법을 개발했는데, 집회 등의 현장에서 아픈 사람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양말을 벗기고 발바닥을 만져주면서 경락점을 찍어서 파스를 붙여줬다. 갑자기 만난 사람들이니까 발 냄새가 날 수도 있는데, 그런 덴 전혀 신경을 안 쓰셨다”며 “대지의 삶을 살아온 발바닥이 곧 문 목사”라고 회고했다.

이런 행로를 당연하게 만든 물꼬는 윤동주와 장준하였다. 윤동주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문 목사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함께 자랐다. 두 사람은 교회와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학교, 용정 광명학원 중학교를 같이 다닌 죽마고우다. 숭실학교에서 만난 장준하는 동갑이었는데, 동생인 문동환 목사와 같은 반이어서 처음엔 문 목사가 그를 동생으로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신대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됐고, 절친한 친구가 됐다.

1975년 8월17일,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하던 장준하가 경기 포천군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했다. 문 목사는 이 죽음을 정권이 저지른 타살로 확신했다. 당시 신·구교 공동성서 번역 등 종교 활동에만 매진했던 그의 삶은 이 일을 계기로 완전히 달라진다. 58살이 된 이듬해, 문 목사는 유신 체제를 비판한 ‘3·1 민주구국선언’을 작성하고 신·구교 인사들의 발표를 주도해 구속됐다. 이후 눈감을 때까지 18년 동안 이어진 민주화 운동가, 통일 운동가로서의 삶과, 감옥 밖의 시간보다 더 길었던 옥고의 시작이었다.

1986년 12월12일에 박 장로에게 쓴 편지엔 윤동주·장준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동주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면서 살아갈 때, 그 다짐을 하고 그 다짐으로 살다가 죽은 동주는 그대로 양심인 거지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 거울 앞에서 너나없이 마음가짐, 몸가짐을 바로잡는 것 아닙니까?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으려고 살다가 간 장준하가 또 하나 다른 민족의 양심이요, 우리의 거울인 거죠.”

문 목사한테 윤동주·장준하인 ‘양심’은 “아픔을 아는 마음”이자 “공동체적인 마음”으로 사회성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의 양심을 말해야 하는 거고, 인류의 양심을 말해야 해요. 따라서 양심은 사회적인 깊이를 투시하는 예리한 통찰력을 갖추어야 하고, 넓이를 둘러보고 구석구석을 이해할 수 있는 시야를 갖추어야 하지요.”(1987년 2월20일 박 장로에게)

이런 양심은 민중과 함께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민주도 통일도 자주도 그 핵심은, 그 본질은 공순이·공돌이가 대표하는 민중의 생존 자체”로 “민주·통일·자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1989년 9월22일)인 것이다.

영화 <1987>의 마지막 장면으로 더 유명해진 문 목사의 연설은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전 나이 일흔 살이나 먹은 노인입니다. 이젠 살 만큼 인생을 다 산 몸으로 어제 풀려나와 보니까 스물한 살 젊은이의 장례식에 조사를 하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 한잠 못 잤습니다.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 밤을 꼴딱 새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많은 열사들의 이름이나 목이 터지게 부르고 들어가려고 나왔습니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 이한열 열사여!” 스물다섯 명의 이름과 광주 이천여 영령을 부르는 내내 “일흔 살이나 먹은 노인”의 목소리는 단 한 차례도 꺾이지 않았고, 단전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담긴 “열사여!”를 그가 부르짖을 때마다 장례식장에 모인 이들의 눈물은 오열로 변해갔다.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 문익환 목사. 통일의집 제공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 문익환 목사. 통일의집 제공

그해, 문 목사는 ‘동주야’라는 시를 썼다. “(…)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평화,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빛나는 몸짓

“(…)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 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동해바다가 굽어 보이는 산정에 다다라/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꿈을 비는 마음’, 1977년 10월14일)

문 목사가 대중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각인된 사건은 1989년 북한 방문이다.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이었던 문 목사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초청으로 그해 3월25일부터 열흘간 북한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하고, 자주적 평화통일 구상이 담긴 ‘4·2 남북공동성명’을 조평통과 함께 발표했다.

문 목사는 1989년 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왼쪽)을 만나 &lt;겨레말큰사전&gt; 편찬도 제안했다. 사진은 문 목사가 김 주석에게 박용수 작가의 &lt;우리말 갈래사전&gt;을 선물하는 모습. 통일의집 제공
문 목사는 1989년 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왼쪽)을 만나 <겨레말큰사전> 편찬도 제안했다. 사진은 문 목사가 김 주석에게 박용수 작가의 <우리말 갈래사전>을 선물하는 모습. 통일의집 제공

정부의 허가 없이 이뤄진 방북으로 문 목사는 다섯번째 징역을 살게 된다. 일흔이 넘어서도 옥살이가 뻔한 길을 간 배경은 “3·1운동은 민족통일로 완성되어야 할 빛나는 역사의 횃불”(1982년 3월17일 부모님께)이라는 편지에 담겨 있다. 자주독립으로 귀결되지 못한 3·1운동을 완성하는 길이 통일이었던 셈이다.

그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독재·군부세력과 그에 저항하는 청년들의 죽음이었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이들이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하면서 민주화와 역사 발전이 지체됐으므로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고 평화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니 민간에서라도 북한을 방문해 남한 정부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게 문 목사의 생각이었다. 1986년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 이후 계속된 대학생들의 분신, 1988년 6월10일 ‘남북청년학생회담’을 열자며 판문점으로 가려던 대학생 1만여명을 상대로 최루탄을 동원해 벌인 폭력 진압 등은 문 목사의 방북 결심을 더욱 굳혔다.

1979년 7월9일 박 장로한테 쓴 편지에서 문 목사는 이렇게 밝힌다. “조국이라는 말에는 어제, 오늘, 내일의 역사가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조국의 통일은 갈라진 우리 역사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조국 통일은 갈라진 역사의 두 흐름을 합류시키는 일이죠. 맞서 싸우느라고 우리의 창조적인 힘을 파괴적으로 소모해 간 슬픈 역사를 청산하고 힘을 모아서 우리의 역사에 새로운 꿈과 창조적인 힘을 불어넣는 일이 바로 조국 통일이라는 말의 뜻인 것을.”

1990년 6월20일 박 장로에게 쓴 편지. “독일은 1990년이 가기 전에 통일이 된다는데”라는 문장만 23차례 반복된다. 통일의집 제공
1990년 6월20일 박 장로에게 쓴 편지. “독일은 1990년이 가기 전에 통일이 된다는데”라는 문장만 23차례 반복된다. 통일의집 제공

방북 사건으로 전주교도소에 있던 문 목사가 1990년 6월20일 박 장로에게 쓴 편지엔 “독일은 1990년이 가기 전에 통일이 된다는데”라는 문장만 23차례 반복된다. 그러고는 “아 ─ 흐흐흐흐흐흐. 6·25 40주년을 맞으면서 당신의 늦봄은 흐느낄 뿐입니다”로 마무리된다. 그가 통일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절절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문 목사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UN)군에 자원해 극동사령부에서 근무하면서 1951년 7월부터 2년여 동안 판문점에서 이어진 정전회담에서 통역을 맡았다. 강대국의 각축과 약소국의 무기력을 직접 목격한 그에게 분단은 비극 이상의 것이었다. “아시아의 새 질서가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정신적으로 한반도가 튼튼해야 합니다. 튼튼한 한반도의 선결 요건은 통일”(1989년 9월27일 자신의 변호사들에게)이라고 강조했던 이유다.

그런 점에서 남북의 통일을 주춧돌 삼은 평화는 문 목사의 궁극적인 지향일 수밖에 없었다. “(평화란) 모든 것이 최고의 상태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마냥 아름답고 즐겁고 복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평화는 빈곤을 거부한다. 빈곤 자체가 평화의 부재를 말하는 면도 있지만, (중략) 전쟁이 빈곤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거 아니겠니? 빈곤과 대비해 봐도 평화는 역시 생명 사랑이구나.”(1990년 1월8일 호근씨에게)

신앙, 전 존재를 던진 실천

“모든 가치 있는 것의 총화와 완성은 생명 사랑으로 귀결된다. 모든 가치의 총화요 완성으로서 평화 운동, 곧 생명 사랑 운동이 구체적으로는 민주화 운동이요, 민족통일 운동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민주화 운동이나 통일 운동은 정치 운동에 멎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전 존재를 투입한 신앙 운동이요, 기독교의 화해의 복음, 평화의 복음의 실천이다.”(1990년 1월9일 호근씨에게)

민주화와 통일 운동가에 앞서, 문 목사는 히브리어에 능통한 구약 권위자이자 한국 개신교·가톨릭교계가 함께 성서 번역 작업을 한 ‘대한성서공회 신구약 공동번역위원장’이었다. 종교인과 신학자라는 정체성은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권사한테서 이어받은 것이다. 문 목사 집안의 어른들처럼 구한말, 조상 대대로 살던 함경도를 떠나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를 일구었던 조선 망명자들에게 기독교는 신학문과 서양 문명을 배우고 일제를 물리칠 수 있는 길이었다. 기독교계 학교로 문 목사와 윤동주, 송몽규가 다녔던 명동학교가 북간도 항일운동의 중심이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이렇게 민족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진 기독교 공동체, 명동촌의 공기는 문 목사 삶의 원형질이 된다. 더구나 3·1 운동 때 국민회(미주 지역 한국인을 중심으로 꾸려진 항일운동단체의 하나) 소속으로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으로 네 차례 옥고를 겪은 문재린 목사, 명동교회 여성 교인들과 ‘여자비밀결사대’를 꾸려 모금운동을 하고 독립군을 지원한 김신묵 권사, 안중근도 드나드는 등 “문씨네 밥을 먹지 않은 독립운동가는 없다”(<문익환 평전>)고 할 정도의 집안 분위기는 문 목사에게 신앙이 교회 안에 갇힌 것일 수 없도록 만들었다.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이후 문 목사가 열사들의 장례식에서 망설임 없이 절을 하고, 무당의 춤판에 어울리거나 예수를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에 빗대어 본 것은 이런 집안에서 나고 자란 문 목사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던 셈이다.

문익환 목사가 민주화 운동가, 통일 운동가, 신학자, 시인으로 살았던 의지의 밑바탕엔 북간도 명동촌의 경험이 있다. 사진은 평양 숭실학교 친구들. 뒷줄 가운데가 문 목사고, 맨 오른쪽이 명동촌에서 함께 자란 윤동주다. 왼쪽이 장준하, 앞줄이 정일권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통일의집 제공
문익환 목사가 민주화 운동가, 통일 운동가, 신학자, 시인으로 살았던 의지의 밑바탕엔 북간도 명동촌의 경험이 있다. 사진은 평양 숭실학교 친구들. 뒷줄 가운데가 문 목사고, 맨 오른쪽이 명동촌에서 함께 자란 윤동주다. 왼쪽이 장준하, 앞줄이 정일권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통일의집 제공

“이렇게 우리를 한국인으로 자각하고 한국의 역사에 뿌리를 박고 한국의 문제를 부둥켜안고 진지하게 몸부림치면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이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버님, 어머님은 그런 몸가짐으로 역사를 살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역사를 우리에게 넘겨주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한국의 역사에 접목시킨다고 생각하고 보면, 신앙생활을 교회의 울타리 안에 국한시키고 천당 갈 준비나 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1981년 4월6일 부모님께 쓴 편지에서 문 목사는 이렇게 얘기했다. 문 목사의 조카이자, 동생 문동환 목사의 딸인 문영미 통일의집 상임이사는 “종교란 사회, 역사와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같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종교의 의미는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런 게 문 목사의 신념이었다”고 설명했다.

문 목사의 신앙적 실천은 수감 생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데서 정점을 이룬다. “지난 16년 동안 생일을 열한 번 감옥에서 쇘으니까, (…) 수도 생활의 연속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나의 수도 생활은 전연 예상 못했던 거대한 성과를 올렸다는 걸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한마디로 과분한 축복이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겠어요.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난 인생을 헛살 뻔했다, 예수를 헛믿을 뻔했다고 확신을 가지고 고백할 수 있으니까요. 남에게서 얻어들은 하느님이 아닌 역사 속에서, 나의 살 속, 뼛속에서 숨 쉬는 하느님을 그냥 믿는 게 아니라 체험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감옥 수도 생활 덕택이라고 해야겠지요.”(1992년 3월7일 박 장로에게)

기독교의 ‘용서’를 삶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문 목사는 1979년 9월10일 박 장로에게 이렇게 썼다. 이 편지는 최근 새로 발견된 것들 가운데 하나다. “용서란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쓸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맺혔던 매듭을 풀고 적대 관계에 있던 관계가 사랑과 평화의 관계를 이루는 일. (…) 이것을 개인의 일로서가 아니라 민족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는 거라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사람, 푸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 좀 더 구체적으로는 원한을, 적대 관계를 푼다는 말이 되겠죠. 원한에서 풀려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해요.” 신앙이 돈이고 용서가 인맥이 된 시대, 문 목사가 남긴 경종이다.

통일의집이 최근 발견한 문 목사의 옥중편지. 처음 옥살이를 시작한 지 40일 만인 1976년 4월11일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것이다. 통일의집 제공
통일의집이 최근 발견한 문 목사의 옥중편지. 처음 옥살이를 시작한 지 40일 만인 1976년 4월11일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것이다. 통일의집 제공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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