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8일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연 교육공동체 벗 창립총회에서 작곡가이자 시인인 백창우(맨 오른쪽)씨가 노래하고 있다. 교육공동체 벗 제공
“새해 들어 매우 의미 있는 교육공동체가 만들어졌기에 소식을 전합니다.” 2011년 1월8일, ‘교육공동체 벗’(이하 ‘벗’)이라는 단체는 그렇게 세상에 탄생을 알렸다. 그와 함께 <오늘의 교육> 창간준비호도 세상에 나왔다. 2021년 10년이 되는 해에 <오늘의 교육> 신임 편집위원장이 되어 지난 10년을 돌아보는 글을 쓰기로 하고 보니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왜 교육단체가 아니라 ‘교육공동체’였고, 왜 ‘회원’이 아니라 ‘벗’이었는가? 서로를 ‘벗들’로 부르며 전국에서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 시작한 이 교육공동체 실험과 도전은 왜 시작되었던 것이며 어떻게 지금까지 왔는지, 먼저 시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봐야 했다.
“더 근본적이고, 더 철저하고, 더 넓고, 더 깊은 진보적 교육담론을 생산하고 나누는 매체를 만들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한두 사람이 기획하고 청탁해서 만드는 매체가 아니라 벗들이 함께 고민하고, 공부하고, 실천한 결과를 모아 만드는 매체여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10년 후에 올 사람을 기다렸던 것처럼 시작하는 사람은 이런 글을 남겨놓았다. ‘더 근본적이고 더 진보적인’은 이후에도 여러 글에서도 자주 나타났다. 그만큼 ‘근본’과 ‘진보’는 출범 당시 ‘벗’의 중요한 지향점이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당시의 교육담론과 실천이 근본과 진보성을 잃고 있다는 진단과 위기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런 고민에는 사회적 배경이 있다. 2011년은 어떤 해였던가? 이명박 정부 후기, 사회 전 영역이 광포하게 시장화되던 시기, 교육도 운동도 포획당하고 있던 때였다. ‘한 명이 백 명을 먹여 살린다’가 교육부의 이념이 되고, 경쟁 이데올로기와 기업가 정신이 학교와 사회를 동시에 파괴하던 시기였다. 탄압에 의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시민사회 내부로부터의 ‘자발적 후퇴와 타협적 노선 변화’도 분명 존재했다. ‘벗’이 만들어진 계기도 진보 교육전문지를 표방했던 <우리교육>에서 구조조정으로 해고당한 기자와 편집국 전원 집단 사퇴가 발단이 되어 여기에 저항하며 연대하는 필자, 독자들이 모인 것이 시작이었다. ‘교육공동체 벗’이 탄생할 즈음 새로 선출된 전교조 신임 위원장은 ‘투쟁 중심에서 탈피’하여 수업 개혁과 학교 개선에 집중하겠다며 노선 대전환을 선언하고 있었다. 대안교육 운동, 혁신학교 운동 등 현장 운동도 제도화되면서 초기의 급진적 상상력과 실천력을 조금씩 잃어갔고, 진보 운동 내부의 저항과 투항의 교차는 우파 정부에서 추진하는 교육시장화를 막아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좌초하곤 했다. 한마디로 담론과 운동의 위기가 동시에 심화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오늘의 교육>은 그런 시기에 창간되어 제일 먼저 ‘교육 불가능’을 선언한다. 지금 이곳이 근본적으로 교육이 가능한 사회인가에 대한 물음은 큰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벗’의 교육 불가능 선언은 냉소나 포기가 아니었다. 포기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교육 현장에 대한 정직한 절망이었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는 고통스러운 자기인식이었으며, 함께하자는 교육 주체들에 대한 호소였다. 근본적 질문을 누락하고서는 현실을 제대로 직면할 수도, 제대로 된 방향으로 싸워나갈 수도 없으니까. 근본적 물음은 생략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제도와 정책의 보완을 통해 개선하는 척만 하는 것은, 진짜 문제를 숨기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현상에 머물게 하고 파편화시키는 통치술이었다. ‘근본적으로’라는 말은 지배자의 통치술에 쉽게 속임당하지 않기 위한 스스로의 경구였던 셈이다. ‘근본’을 궁구하는 이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지금 더욱 중요해졌다. 교육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 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기후정의 운동이 탄소배출 조절 정책으로 수렴되어선 안 되는 이유와, 입시교육의 병폐를 수능 제도 개편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는 동일하다. 교육은 계급, 노동, 정치, 경제, 문화, 생태, 젠더 등 다른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문제 현상이 나타날 때는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연결된 맥락을 이해하고 근본적 원인을 파악할 때에만 올바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더 근본적일 때라야만, 더 진보적일 수 있는 것이다.
2010년 9월 교육공동체 벗 창립 준비위원회 회의 장면. 교육공동체 벗 제공
‘벗’은 교육담론장 안에서 ‘삐딱이’를 자처하고, 스스로의 역할로 삼았다. 전교조나 진보교육감과 혁신교육 등 진보교육 내부의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폭력, 안전, 민주주의, 페미니즘 같은 문제가 교육운동과 담론장 안에서 충돌할 때는 민감한 문제라도 회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부분의 특집기획은 그런 이슈들을 둘러싼 담론적 실천적 대결과 긴장을 다룬 것이다. <오늘의 교육>을 통해, 이를테면 폭력 자체를 범죄화하고 외부화하려는 학교폭력 정책에 맞서 하위문화의 생동하는 힘들과 건강한 폭력성을 성찰하고, 그 힘들을 어떤 방식으로 분출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폭력론’을 다시 쓰기도 했고, 세월호 이후 ‘안전’이 전 사회적 요구로 집결되고 학교 현장으로 ‘안전 교육’이 대책으로 들어올 때, 이런 안전 담론과 보호국가가 어떻게 새로운 억압을 생산하는지를 지적하며 반대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교육에서 ‘다양성’이 옹호되기 시작할 때 다양성에 감춰진 ‘선택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교육기본권으로서의 ‘학습권’을 소비자적 주체성에 기반한 ‘개인의 권리’로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 비판하고, 교육 혁신주의자들이 획일적 줄세우기 교육을 비판하면서 ‘각자의 탁월함’을 추구할 때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의 원리를 통해 수월성 교육이 ‘반민주주의’를 교육과정에서 체화시키는 수단임을 비판하기도 했다. 시험 제도나 교과, 수업 방식의 개선 및 기술적 혁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을 벗어나 ‘더 근본적으로’ 성찰하려 했던 수많은 사례 중의 일부다.
2012년 6월 경기도 여주에서 연 ‘농사학림’ 행사 모습. 농적인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해 고민하는 조합원들이 모여 교육농에 관해 고민한 결과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교육공동체 벗 제공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것들을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고 함께 만들자는 무모한 시도”는 조금씩 현실이 되어 <오늘의 교육>은 벌써 60호에 이르렀고, <교육 불가능의 시대>부터 최근의 <능력주의와 불평등>까지 70종이 넘는 단행본을 펴냈다. 공방, 강좌, 읽기모임, 교육농, 연대투쟁 등으로 학습과 실천의 현장을 결합하고 확장하려 노력해왔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살펴본 지난 10년간의 <오늘의 교육> 전체 목록은 이런 도전과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매체답게 10년의 교육 현장과 운동사를 빼곡히 담은 증언집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 길을 항상 똑바로 걸어왔던 것은 아니다. 내적인 불화도 없지 않았고, 외적인 압력과 부침도 있었다. 교사와 부모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청소년과 학생의 목소리를 더 많이 담고, 대도시·중산층·입시 중심의 의제에서 벗어나 농촌이나 학교 밖 청소년들, 특성화고 고졸자와 대학 거부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결식·빈곤·돌봄·폭력 같은 교육장 밖으로 밀려나는 문제에 착목하려 노력해왔지만 단행본과 매체의 지면 배분을 보면 목소리의 평등은 여전히 멀다. 다행인 것은 단단한 관성을 깨기 위한 내부의 자기비판도 끊임없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교육 의제에서도 상층화 경향이 더 뚜렷해지면서 중상층 위주의 교육 담론과 실천에서 탈피하려는 노력과 ‘더 근본적으로, 더 진보적으로’라는 지향은 지금 더 중요한 현실 과제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세태로부터의 부침을 겪기도 한다. 대주주의 영향이나 소수의 지배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공부하고 실천하며, ‘모두가 필자가 되고 모두가 독자가 되는 관계’, ‘모두가 가르치고 모두가 배우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협동조합형 교육공동체를 만들었지만, 사회적으로 점점 강화되는 소비권력으로부터 ‘벗’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정치를 팬덤으로 소비하듯이 자기의 운동이나 공동체도 그런 관점에서 ‘선택’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입장이나 논조가 불편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절독’으로 응답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그런 세태 변화는 편집위원회에서 일종의 자기검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지금 같은 시기에 이런 주제를 다뤄도 될까?” 공동의 적을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내부의 이해충돌 문제는 지면에서 다루기가 어렵다. 최근에는 ‘학교 돌봄’이 그런 주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의 교육> 구독자는 돌봄노동자보다 정규직 교사가 훨씬 많다. 조합에서 조합원의 이탈은 재정난과 경영난으로 직결되는 문제지만 편집위에서 의제를 논의하면서 그런 후폭풍까지 고려를 해야 한다는 것이 좀 서글프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직은 조금 더 힘이 세다. ‘해도 될까’가 아니라 ‘왜 해야 하는가’와 ‘우리가 이것을 말하지 않을 때 누가 말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한다. 앞으로도 양비론과 양시론에 빠지지 않고, ‘벗’의 입장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힘을 보태줄 이들이 좀 더 찾아와 벗들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10평 남짓한 작은 공방에서는 매일매일 신나는 공부 모임들이 이루어지고, 카페는 벗들의 삶이 담긴 이야기들로 늘 훈훈합니다.” 지난 10년간 조합원 수는 10배 가까이 늘었지만, 규모가 커진 반면 작은 공동체를 데웠던 뜨거움은 조금씩 식었다. 10년 동안 세상은 더 각박해졌고, 우리는 더 바빠졌고, 그렇게 재밌던 인터넷 카페의 공론장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신세계로 흡수되었다. 교육 불가능의 현실은 더 강고해졌고, 폐허는 더 깊어졌는데, 처음에 꿈꾸었던 대항 담론과 저항의 실천공론장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지금 ‘벗’은 교육의 생태주의적 전환과 대안적 교육연구소와 강좌 등 실천 프로그램을 앞으로의 10년 속에 그려보고 있다.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것을 시작하고, 할 수 있는 실천을 행하며, 우리 자신부터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목표다.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더욱 간절해졌고, 실패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결국 가야 할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틀거리더라도 정의의 길로 갈 수밖에. 그 길에 벗으로 모인 사람들과 “카페는 벗들의 삶이 담긴 이야기로 훈훈합니다”라는 저 이야기를 다시 10년 후에 올 사람에게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 격월간 교육지 <오늘의 교육>을 펴내는 협동조합 형태의 지식공동체 ‘교육공동체 벗’이 1월8일 창립 10년을 맞았다. 단행본 출간과 공방·강좌 등 대안적 공동체 활동을 이어온 이곳에서는 현재 교사와 시민단체 활동가, 청소년/청년, 대학(원)생, 직장인, 학부모 등 820여명의 조합원들이 함께한다. 이들의 10년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