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 시절에 ‘세월호 7시간’ 의혹을 제기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 등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로 지난 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했습니다.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는 헌정사상 처음이고 탄핵 사유도 중대한 것이라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데요, 여기에 좀 특이한 상황이 겹치면서 궁금증을 낳고 있습니다. 즉 임성근 부장판사의 임기가 2월28일 종료되기 때문에 공직자 신분을 잃게 되는데, 그래도 탄핵 결정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원래 임 부장판사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첫 탄핵 재판은 26일 열릴 예정이었는데 임 부장판사가 재판관 기피신청을 내는 바람에 연기됐습니다. 결국 그의 임기가 끝난 뒤에야 재판이 시작되는 셈인데요, 기피 신청을 낸 것도 이 점을 노린 게 아닌가 의심됩니다.
결국 탄핵은 해당 공직자를 자리에서 쫓아내기 위한 것인데, 이미 그만둬버렸으니 재판의 실익이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퇴임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하나의 사례를 보여줬습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사태와 관련해 1월13일 하원 의회에서 내란선동 혐의로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됐고, 일주일 뒤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를 마쳤습니다. 미국은 우리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해당하는 절차를 상원의회가 맡는데요, 이 절차는 트럼프 대통령의 퇴임 이후 시작됐습니다. 그러니까 ‘탄핵소추→임기종료→탄핵심판’이라는 순서가 이번 임성근 부장판사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이미 퇴임한 대통령이 탄핵 대상이 될 수 있는지가 주요 쟁점이 됐는데 상원의회는 가능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다만 유무죄 표결에서 가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무죄 선고가 났습니다.
‘탄핵소추→임기종료→탄핵심판’이라는 순서가 이번 임성근 부장판사의 경우와 같다. 한겨레TV
이 과정에서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법리적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탄핵 제도를 규정한 미국 헌법에 퇴임한 공직자도 탄핵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쪽에서는 탄핵의 주된 목적이 공직 박탈인 만큼 퇴임 뒤에는 탄핵의 의미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미국 헌법은 탄핵의 효과로서 공직 박탈뿐 아니라 이후 다른 공직 취임도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탄핵당할 행위를 저지른 공직자라면 다른 공직도 맡을 수 없도록 해야 법질서와 사회를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이것이 탄핵 제도를 만든 또 하나의 핵심 이유라는 것입니다.
한 법학자는 이런 비유를 합니다. 양떼를 돌보던 목동이 양을 훔친 경우 재판에서 유죄가 확인되면 그 양떼의 주인으로부터 해고될 뿐만 아니라 다른 양떼를 돌볼 자격도 박탈하는 법이 있는데, 양을 훔친 목동이 재판받기 전에 즉시 해고됐다는 이유로 아예 재판을 받지 않도록 한다면, 그래서 다른 양떼를 돌볼 기회를 주게 된다면 법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역사적인 선례도 있습니다. 1876년 육군성 장관인 윌리엄 벨크냅이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하원의회가 조사위원회를 꾸렸습니다. 위원회는 증거를 확보한 뒤 의회에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시간 전에 벨크냅이 사임한 뒤였습니다. 하원의회는 그래도 탄핵이 가능한지 논쟁을 벌인 끝에 만장일치로 탄핵소추를 의결했고 상원도 탄핵심판을 진행했습니다.
옛 미국 육군성 장관 윌리엄 벨크냅. 한겨레TV
벨크냅의 경우는 탄핵소추도 이뤄지기 전에 사임했기 때문에 탄핵 절차가 개시되는 시점에서부터 아예 민간인 신분이었습니다. 이 점이 트럼프 대통령과 다른 점인데요. 트럼프는 적어도 탄핵소추가 이뤄지는 시점에는 현직 신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탄핵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미국 의회조사국 보고서. 한겨레TV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법 제51조. 한겨레TV
국회법 제134조 제2항. 한겨레TV
미국 의회조사국은 이런 다양한 법리와 선례를 조사해, 퇴임한 공직자도 탄핵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습니다. 탄핵의 의미는 한 개인의 공직을 박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직자가 어떤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헌법적 가치의 선언이라는 한 법학자의 지적도 보고서에 소개가 돼 있습니다. “탄핵당한 개인의 운명보다 선언되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례 이야기가 길어졌는데요. 독일의 경우에는 연방헌법재판소법에 명문 규정을 둬 이 문제를 간명하게 해결했습니다. 대통령 탄핵에 관한 규정(제51조)에서 “탄핵 절차의 개시와 진행은 대통령의 사임이나 임기만료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명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처럼 퇴임한 공직자의 탄핵에 대한 명문 규정이 없지만, 국회법(제134조 제2항)을 보면 탄핵소추가 된 공직자는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사직하거나 해임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리 공직을 그만둠으로써 탄핵결정을 피하는 꼼수를 차단한 것인데요, 이런 규정에 비춰 보더라도 탄핵소추가 된 뒤 임기가 종료된 공직자도 탄핵 대상이 된다고 볼 여지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파면된 공직자는 5년간 다른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헌법재판소법 제54조). 한겨레TV
헌법재판소가 탄핵 결정을 하면 해당 공직자는 ‘파면’됩니다. 파면된 공직자는 5년간 다른 공직에 취임할 수 없습니다.(헌법재판소법 제54조) 법관의 경우 파면되면 변호사 개업도 5년간 제한됩니다.(변호사법 제5조 제4호) 미국 사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직 박탈뿐 아니라 추가적인 공직 취임 제한을 통해 ‘나쁜 목동’에게 양떼를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게 탄핵 제도의 취지인 것입니다. 임기가 종료했다는 이유로 이런 추가 제재를 피해갈 수 있게 한다면, 공직자가 임기 막바지에 반헌법적인 행위를 하는 경우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헌법재판소가 이 쟁점에 대해 탄핵 제도의 본질에 걸맞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길 바랍니다.
임성근 부장판사가 임기 종료 뒤에도 탄핵 대상이 된다고 하면, 다음 쟁점은 그의 행위가 탄핵 사유에 해당하느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법관 탄핵 전례가 없으니, 외국에서는 어떤 사유로 법관 탄핵이 이뤄졌는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모두 7명의 법관이 탄핵됐는데, 탄핵 사유에는 열차에서 불법촬영을 한 행위, 법원 직원을 스토킹한 행위, 골프채와 양복 등을 뇌물로 받은 행위 등 재판 이외의 일탈행위와 함께 영장발부와 관련한 부정, 조정절차에서 선처 요청 등 재판과 관련된 사안도 포함돼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연방 차원에서 모두 8명의 법관이 탄핵됐습니다. 부적절한 선물 수령, 부패, 조세포탈, 재산 허위신고, 위증, 음주 재판 등의 사유들이었습니다.
임성근 판사 직권남용혐의 판결문. 한겨레TV
임성근 부장판사가 탄핵소추된 혐의는 ‘세월호 7시간’ 관련 명예훼손 재판에 개입해 판결 내용을 바꾸도록 하고 재판장에게 법정에서 피고인을 질책하라고 지시한 행위, 쌍용차 집회 관련 민변 변호사들의 형사사건에서 선고가 끝난 판결문 중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수정하도록 한 행위, 유명 야구선수 원정도박 사건에서 벌금형을 선고하도록 유도한 행위 등입니다. 이런 재판 개입 행위는 재판의 독립을 규정한 헌법 제103조에 위배되는 중대한 비리입니다. 미국에서 1994년 탄핵당한 펜실베니아주 대법관 롤프 라센의 혐의 중에는 재판과 관련해 담당 판사와 부적절한 대화를 나눈 행위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데도 임성근 부장판사는 일부 혐의에 대해서만 견책이라는 가벼운 징계를 받는 데 그쳤고, 형사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위헌적 행위는 맞지만 현행 법상 처벌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단죄 수단은 탄핵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박용현 한겨레 논설위원. 한겨레TV
얼마 전 참여연대 등이 주최한 좌담회에서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무죄 판결을 내린 법원, 오랜 기간 지체하다가 임기 만료 직전에 탄핵소추한 국회, 다소 아쉬운 속도감을 보인 헌법재판소까지 모든 국가기관이 중대한 위헌적 행위가 발생했음에도 면책용으로 최소한의 행동만 할 뿐 해당 문제를 회피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국가기관도 책임지지 않고 결국 위법한 행위를 한 법관은 전관 변호사가 되어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상황, 헌법이 사실상 중단된 상황에 대해 누가 책임져야 할지 질문해야 한다”는 질타입니다.
여기에 답할 수 있는 주체는 이제 헌법재판소밖에 없습니다.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헌재의 탄핵심판은 사법 독립과 공정한 재판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는 마지노선인 셈입니다. 헌재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획·출연 박용현 기자 piao@hani.co.kr 연출·편집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