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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부서진 고향에 남은 사람들 “부흥보다 지속이 중요하다”

등록 2021-03-13 04:59수정 2021-03-15 13:14

[토요판] 커버스토리
3·11 ‘재난 10년’ 현지 르포

쓰나미 피해 컸던 미야기·이와테현
10년간 진행된 일본 정부 ‘부흥계획’
거대 건축물 만드는 토건계획 집중
개발형 부흥시설 유지는 지자체 몫

재해지역 달리는 산리쿠철도 타보니
이와테·미야기·후쿠시마 432㎞ 길이
부흥예산의 핵심 ‘거대벽’ 방조제
“지금 당장 평가하긴 어렵지 않을까”
방조제 정비는 국가의 직접사업으로 부흥예산이 투여됐다. 재해 이후 태평양 연안부 6개 현 621곳에서 정비가 계획되었고, 현재는 대부분 완성돼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3개 현 해안선에서 총연장 432㎞에 이르는 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높이는 5m부터 건물 4층과 맞먹는 최고 15.5m에까지 이른다. 사진은 게센누마시 고이즈미 해안에 건설된 방조제. 사진 안은별
방조제 정비는 국가의 직접사업으로 부흥예산이 투여됐다. 재해 이후 태평양 연안부 6개 현 621곳에서 정비가 계획되었고, 현재는 대부분 완성돼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3개 현 해안선에서 총연장 432㎞에 이르는 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높이는 5m부터 건물 4층과 맞먹는 최고 15.5m에까지 이른다. 사진은 게센누마시 고이즈미 해안에 건설된 방조제. 사진 안은별

▶지난달 13일, 동일본대지진 발생 10주년을 한달쯤 앞두고 후쿠시마현 앞바다에서 리히터 규모 7.3의 강한 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대지진의 여진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지진은 ‘10년 전의 메아리’였던 셈이다. 2011년 3월11일, 재해가 발생하고 석달 뒤 일본 정부는 ‘동일본대지진부흥기본법’을 제정했다. 애초 10년간 유지하려던 이 계획은 2030년까지 법 적용이 연장됐고, 처음 19조엔이었던 예산은 32조엔(약 332조원)으로 늘어났다. 톱다운 방식으로 재해 지역으로 하달된 국비는 부흥청이라는 강력한 사령탑의 지시 아래 ‘신속한 복구’에 투입됐다. 하지만 빠른 속도는 잇단 문제나 반성의 계기도 함께 집어삼켰다. 지난 10년, 부흥을 중심으로 한 계획에 따라 굵직한 재건사업이 이뤄진 재난의 ‘현장’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원전 피해 지역인 후쿠시마현보다 사망자가 더 많았던 미야기현과 이와테현 피해 지역을 찾아가 ‘쓰나미 재난 이후’ 주민들의 삶을 취재했다.
2011년 3월11일 오후 2시46분, 일본 산리쿠 앞바다를 진원으로 하는 규모 9.0의 거대 지진이 발생했다. 이윽고 10m가 넘는 쓰나미(지진해일)가 닥쳐와 연안 각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쓰나미로 인해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최악의 원전 사고까지 발생했다. 사망자와 실종자, 이 재난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까지 합치면 약 2만22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례 없는 복합재해인 동일본대지진 이후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재해 직후 필자는 그 ‘현장’을 취재한 경험이 있다. 3월14일 니가타공항으로 입국해 렌터카로 센다이에 도착하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재해 지역에 물자가 부족해 자동차에 여분의 가솔린을 채워 가려 했는데 가솔린 통을 구할 수 없었다. 도로 파손이나 통제 등으로 피해지역에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삶의 터전을 잃고 당장 생존을 위해 슈퍼마켓 앞에 긴 줄을 서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 질문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일을 마치면 공항으로 퇴장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달 13일에는 후쿠시마현 해안에서 규모 7.3의 지진이 발생해 내가 사는 도쿄에도 상당히 오래 진동이 느껴졌다. 이날 지진은 10년 전 대지진의 여진이라 한다. 바닥 저 끝을 상상해보게 되는 진동에 10년 전 센다이총영사관에 침낭을 깔고 누웠던 밤의 여진과 냉기가 떠올랐다. 후쿠시마 앞바다 지진이 공포를 되살린 날 밤, 음성 기반 에스엔에스(SNS)인 클럽하우스에는 불안으로 잠 못 드는 사람들의 방이 열렸다. 후쿠시마 주민이나 10년 전 피해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이 밤의 경험은 상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10년 전의 메아리인 셈이었다. 그때 본 허물어진 마을들, 소중한 것들을 잃거나 일상이 파괴되거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3월4일, 3·11 동일본대지진 10돌을 일주일 앞두고 도호쿠(동북) 연안 지역으로 떠났다.

센다이시 아라하마 지구의 쓰나미 피해를 전해주는 진재유구 아라하마초등학교 내부에 꾸민 전시실. 대지진 당시 쓰나미가 2층까지 밀려와 교직원과 주민 320명이 옥상으로 피난해 구조를 기다렸다. 사진 안은별
센다이시 아라하마 지구의 쓰나미 피해를 전해주는 진재유구 아라하마초등학교 내부에 꾸민 전시실. 대지진 당시 쓰나미가 2층까지 밀려와 교직원과 주민 320명이 옥상으로 피난해 구조를 기다렸다. 사진 안은별

다시 가기, 다시 그 시간을 경험하기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정의 기점은 센다이시였다. 도호쿠 지방 최대 도시인 이곳에서 피해가 집중된 지역은 동부 연안의 ‘아라하마 지구’로, 지진 발생 이후 닥친 쓰나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센다이로 가는 길목, 2015년 개통된 지하철 도자이선의 종점인 아라이역 ‘센다이 3·11 메모리얼 교류관’에서는 ‘나는 떠올린다’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 지역 익명의 여성이 2011년 첫아이를 낳고 쓴 10년간의 육아일기를 3·11 이후의 날짜를 눈금 삼아 보여줌으로써 ‘그날 이후’를 산다는 것을 되새겨보게 했다.

이 역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에 있는 ‘진재유구 아라하마초등학교’를 찾았다. 지진 재해로 인해 폐허가 된 건물들 가운데 철거하지 않고 교훈과 교육을 위해 꾸며놓은 시설을 ‘진재유구’(震災遺構)라고 한다. 1층과 2층에는 학교 건물 피해 상황과 재해 직후 사진을, 4층에는 지진 발생 당일 옥상에 피난한 이들이 27시간 걸려 전원 구출될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영상과 사진을 전시했다. 이 건물은 전시물 중 하나인 쓰나미가 닥쳐온 시간에 멈춘 시계처럼 한 시점에 박제되어 과거의 기억을 담아놓았지만 옥상에 올라가면 아라하마 지구의 ‘지금’이 보인다. 깨끗하게 지워진 장소들 위로 굴착기들만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쓰나미 피해지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 풍경은, 일본 정부가 내세워온 단어인 ‘부흥’을 상징한다. 재해 한달 뒤 열린 ‘부흥구상회의’의 활동 끝에 ‘부흥제언’이 보고되고, 이를 토대로 6월24일 ‘동일본대지진부흥기본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이듬해 설치된 부흥청은 애초 올해 3월로 활동이 종료될 예정이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에 따라 2030년까지 연장됐다. 처음 19조엔으로 출발해 이젠 총 32조엔으로 추산되는 부흥예산은 많은 비중이 도로, 방조제, 고지대 이전, 주택 건설 등 공공토건사업에 들어갔다. 부흥청이라는 강력한 사령탑의 존재는 ‘신속한’ 복구를 추진할 수 있게 했지만, 바로 이 속도 때문에 수많은 문제나 반성의 계기도 휩쓸려갔다. 일본 정부가 2016년부터 2020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재해 지역의 ‘부흥’을 선전하려고 하는 것에 많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부흥’은 어떻게 작동했는가

동일본대지진은 지역에 따라 피해의 성격이 다르다. 지진, 쓰나미, 원전 사고라는 복합재해 가운데 이시노마키시는 막대한 쓰나미 피해를 입은 태평양 연안 지역 중 하나다. 시 면적의 16%가 침수됐고, 전체 주택의 76%에 이르는 5만3000여채가 피해를 보았다. 무엇보다 3000명 이상이 숨져 모든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곳에서 가장 피해가 큰 곳은 구기타카미강 하구에 있는 미나미하마 지구다.

여기서 강을 따라 2㎞쯤 떨어진 중심 시가지 쪽에서 에도시대부터 이어진 그릇가게 간케이마루혼텐을 운영해온 스다 다스쿠(80), 스다 히로미(74) 부부를 찾았다. 피해 당시 상황을 묻자, 스다 다스쿠는 어디선가 네 귀퉁이가 구겨진 A4 용지 두 장을 꺼내 왔다. 건물 출구가 막혀 고립된 3월11일 밤부터 피신했다가 귀환한 4월 말까지 그가 겪은 일이 단문으로 기록돼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도쿄에서 2013년 이후 이시노마키로 옮겨온 아들 스다 마사키(50)와 배우자 도미나가 아스카(47)도 기록을 처음 본 듯 놀라워하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3/11 밤 미나미하마에서 화재. 3/12 눈이 쌓여 욕봄, 가쿠타씨 집 화재. 3/14 통로를 만듦, 2층에서 점포 출구까지. 3/15 금고를 열어 서류를 꺼냄. 3/17 도서관에서 휴대전화 충전. 3/18 휴대전화 통화 가능. 3/21 자위대 급수 개시. 3/26 오쓰씨 댁에서 입욕. 4/3 시에서 봉사자들이 옴. 4/6 피스보트가 와서 점내 정리를 개시. 4/16 이시노마키 6:30 출발, 도중 지진으로 1시간 정도 교통 멈춤, 17시 오이소에 도착해 전원 집합, 아스카 등만 숙박. 4/24 오이소 출발 이시노마키로 귀환. 4/25 저녁에 전기가 들어옴.’

이시노마키시 구기타카미 강변에서 에도시대부터 영업해온 그릇가게, 간케이마루혼텐에서 쓰나미 당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스다 가족과 가게의 스태프. 당시 70살이었던 스다 다스쿠의 기록이 그날을 되살아나게 했다. 사진 오쿠노 데쓰야
이시노마키시 구기타카미 강변에서 에도시대부터 영업해온 그릇가게, 간케이마루혼텐에서 쓰나미 당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스다 가족과 가게의 스태프. 당시 70살이었던 스다 다스쿠의 기록이 그날을 되살아나게 했다. 사진 오쿠노 데쓰야

무수히 많은 삶이 파괴된 ‘최대의 피재’ 이후 그해 연말, 시는 부흥의 기본계획을 책정했고 이듬해 2월 실시계획을 발표했다. 피해를 본 바닷가 평지는 제방 정비 및 도로 성토를 해 이중 방제 기능을 확보하고, 주거지는 도로의 내륙부 농지에 조성해 집단 이주를 촉진한다는 내용이었다. 거주 기능을 교외로 옮기는 계획은 이전부터 공동화되고 있던 중심 시가지의 쇠퇴를 더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에 부딪쳤지만, 시는 택지 73.9헥타르를 조성해 재해공영주택 30동 총 924호를 건설, 단독주택 1111호의 분양지까지 갖춰 집단 이전을 실현했다. 그 결과 신시가지 인구는 증가했지만 행정서비스는 미비했고, 반대로 중심 시가지는 공공시설이 들어섰지만 사람은 모이지 않아 불균형이 생겼다. 부흥예산을 지렛대로 중심 시가지의 ‘재부흥’을 노리며 ‘서로 돕기 센터’ 같은 교류시설을 잇달아 만들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시가 공을 들인 시가지에 자리잡은 스다의 그릇가게 주변에도 재해 이후 부흥예산으로 지어진 교류센터와 민영 시장이 있다. 스다 히로미는 “정작 교류는 없는데 교류센터가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도미나가 아스카가 지역 상점가 재개발조합에 참여해보니, 복구 계획은 주민조합이 원하던 ‘작은 개발’이 아니었다. 피해지역 개발에 컨설턴트로 관여한 부동산개발회사와 지자체는 ‘큰 개발’로 수익과 많은 보조금을 기대하며 대도시형 재개발 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결국 부흥예산을 중앙정부가 전담하고 속도를 중시하다 보니 주민 의견을 수렴할 시간이 부족했고, 하드웨어 건설 우선의 ‘개발형 부흥’으로 치닫게 되었다. 부흥예산으로 지어진 인프라 등 공공시설 유지는 이후 고스란히 지자체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중심 시가지에서 3㎞가량 떨어진, 재해 직후 임시주택이 들어섰던 가이세이 지구에는 ‘이시노마키 복합문화시설’이 3월 말 개관을 앞두고 있었다. 유명 건축가 후지모토 소스케의 설계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 새하얗고 천진난만한 외관은 지역의 현실과 영 동떨어져 보였다. 이시노마키를 떠나면서 이 시설의 애칭인 ‘마키아토 테라스’를 트위터에서 검색해보니 지역의 랜드마크가 돼줄 거란 기대감 속에서 이런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시노마키 시장 선거 입후보자는 재해 이후 건설한 대량의 공공시설이나 인프라, 방조제 유지 비용의 비전을 정직하게 다뤄줬으면 한다. 시는 적자 단체가 될 게 분명하니까.”

재해 당시 20미터 넘는 쓰나미가 닥쳐온, 게센누마시 고이즈미 해안의 방조제 밑에서 보이는 추도식을 알리는 전광판. 시가 자랑하는 관광 명소였던 해안에 높이 14.7m, 길이 820m, 최대 56단에 이르는 방조제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뜨거운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진 안은별
재해 당시 20미터 넘는 쓰나미가 닥쳐온, 게센누마시 고이즈미 해안의 방조제 밑에서 보이는 추도식을 알리는 전광판. 시가 자랑하는 관광 명소였던 해안에 높이 14.7m, 길이 820m, 최대 56단에 이르는 방조제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뜨거운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진 안은별

방조제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

쓰나미 피해지역의 지난 10년은 ‘방조제 건설’의 시간이기도 했다. 차를 타고 산리쿠 해안을 달리는 동안 많은 곳에서 새로 건설된 하얀 벽을 볼 수 있었다. 복구 후 2019년 산리쿠 철도의 리아스선으로 개통된 옛 제이아르(JR) 야마다선 구간을 달리면서도 차창에는 끊임없이 방조제의 풍경이 이어졌다. 관광객이 ‘로컬 철도’에서 기대하는 낭만적 전원 풍경이 아니라 재해 이후의 ‘현실’이 재생된다.

내려서 보면 더욱 기묘하다.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시는 주거지의 고지대 이전으로 몇 군데의 진재유구만이 남아 있는 드넓은 평지 저편에 높이 10m의 방조제가 둘러쳐져 있고, 그 부근에서는 굴착기와 인부들만이 분주하게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방조제 정비는 잔해물 처리나 부흥도로 건설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직접사업으로 부흥예산이 투여됐다. 재해 이후 태평양 연안부 6개 현 621곳에서 정비가 계획되었고, 현재는 대부분 완성돼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3개 현 해안선에서 총연장 432㎞에 이르는 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높이는 5m부터 건물 4층과 맞먹는 최고 15.5m에까지 이른다.

방조제는 초기 정비 단계부터 논란이 거셌다. 경관을 해쳐 관광업에 피해를 준다는 비판, 생태계를 파괴하고 어부들의 바다 접근을 어렵게 한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그러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논리가 경관이나 바다를 잃은 슬픔, 환경을 고려한 방재라는 문제제기를 압도했다.

17m 높이의 쓰나미로 1340헥타르가 침수됐던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시 다카타마쓰바라 쓰나미부흥기념공원 부지. 과거에 시립중학교였던 건물을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무엇을 보존하고 어떤 교훈을 전할지 등 ‘유구’ 또한 피해지역에서 뜨겁게 논의되는 대상 중 하나다. 사진 오쿠노 데쓰야
17m 높이의 쓰나미로 1340헥타르가 침수됐던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시 다카타마쓰바라 쓰나미부흥기념공원 부지. 과거에 시립중학교였던 건물을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무엇을 보존하고 어떤 교훈을 전할지 등 ‘유구’ 또한 피해지역에서 뜨겁게 논의되는 대상 중 하나다. 사진 오쿠노 데쓰야

하지만 방조제를 높게 세운다고 쓰나미로부터 모두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와테현 미야코시 북부의 다로 지구에는 기존에 ‘만리장성’이라 불리던 높이 10m의 방조제가 있었지만 동일본대지진 당시 그것을 넘어서는 쓰나미가 닥쳐와 파손됐다. 이에 대한 대응은 기존 것보다 4.7m 높은 방조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포함해 이번에 정비된 방조제는 ‘수십년부터 백수십년에 한번 발생할 정도의 해일’(L1)에 대응하는 것으로 10년 전과 같은 ‘최대 수준의 해일’(L2)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진행됐다. 이것이 부흥계획의 핵심어인 ‘감재’라는 사고방식과도 연관된다. 재해는 언젠가 반드시 일어나고 방조제는 모든 재해를 막을 수는 없다. 이를 위해 ‘다중 방재’가 도입돼 있지만 결국 ‘상정 외’ 상황에서는 각자의 피신에 맡길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방조제에서 안심을 느끼지만 누군가는 오히려 불안을 느끼는 이유다.

“(방조제 계획의 성공 여부를) 지금으로서는 평가하기가 어렵고,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야 그것이 옳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리쿠젠타카타시 피해지역에 조성된 전승관 앞 휴게소에서 만난 방문객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라면 또 다른 재해 이후라는 먼 시점으로 판단이 유보됨으로써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논리로 모든 방조제가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초점을 방조제 그 자체가 좋은가 나쁜가, 언젠가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각 지역에서 방조제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이 어떠했는가로 옮기는 것이 이 풍경을 비평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일지도 모른다.

이와테현 가마이시시 도니정의 ‘도니초등학교’ 교정에서 보이는 고지라하마 지구 모습. 재해 전 12.5미터의 방조제는 쓰나미로 파손되었고, 재해 후 더 높은 방조제를 쌓았다. 사진 안은별
이와테현 가마이시시 도니정의 ‘도니초등학교’ 교정에서 보이는 고지라하마 지구 모습. 재해 전 12.5미터의 방조제는 쓰나미로 파손되었고, 재해 후 더 높은 방조제를 쌓았다. 사진 안은별

10년을 넘어, ‘수리’ ‘지속’으로

미야기현의 작은 바닷가 마을 오나가와정 또한 10년 전 막대한 쓰나미 피해를 입었다. 전체 인구의 약 10%가 희생되는 비극을 겪었고, 마을 전체의 80%가 유실돼 재건은 완전히 ‘백지’에서 출발해야 했다. 이 마을은 비교적 회복이 빨랐던, 마을 만들기의 성공 사례로 이야기돼왔다. 방조제 높이가 정해져야 성토할 지반 높이가 결정되고, 그다음에야 마을 만들기가 진행되는데, 이곳은 재해 직후부터 지역 주민들 의견을 발빠르게 수렴해 방조제 건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2014년 발표된 마을 만들기의 기본 콘셉트는 “어디서라도 바다가 보이는, 살고 싶은, 방문하고 싶은, 자랑하고 싶은 풍경”이었다. 또한 마을 만들기에서 젊은이와 외부인 힘을 적극적으로 빌리고, 관광객을 ‘활동 인구’로 포함시키는 등 혁신을 도입했다.

하지만 금요일 저녁에 방문했는데도 역 앞으로 펼쳐진 임대 상점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코로나 영향도 있겠지만 같은 날 이시노마키시의 중심 시가지(쇠퇴했다는!)의 작은 점포들의 활기와 대조되었다. 그러나 애초 이 마을에 활기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방조제를 거부한 마을’이라는 매력적인 프레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을까. 일본 정부의 권위적인 부흥 대 단결된 주민의 목소리에서 후자가 이겼다는 상상적인 구도 말이다. 시가지 회복이 빨랐기 때문에 홍보도 일찍부터 이뤄졌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변했습니다’라고 발표하는 시점에는 많은 관심과 발길이 향할 수밖에 없다. 이후의 ‘유지’가 모든 지자체의 고민이다. 이날 기대를 배반한 풍경은 오히려 마을 만들기의 시행착오나 ‘부흥 이후’의 어려움을 짐작하게 했다.

이튿날 미나미산리쿠정에서는 피해지역 주민이 마을 만들기에 참여한다는 구체적인 사례를 접할 수 있었다. 이곳 시즈가와 지구에서 신사를 운영해온 구도 마유미(48)의 궤적은 지난 10년의 시간, 전시행정적 건설에서 피해 주민들이 거대 서사에 반드시 휩쓸리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양식업과 수산가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리쿠 지방의 전형적인 마을들 중 하나인 미나미산리쿠정에서는 10년 전 쓰나미로 인구 1만7000명 중 사망·실종자가 800명이 넘는다. 주택의 약 70%가 파괴됐는데, 가마쿠라 시대부터 있었다는 신사 옆에 있던 구도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재해를 마주했을 때의 기억을 묻자, 그는 어디선가 종이 연극 패널을 꺼내와 피난소 생활 당시 직접 그렸다는 그림들을 보여줬다. 당시 4살이던 아들 유스케가 ‘내가 왜 도망쳐야 했는지 몰랐다’고 말한 것을 계기로, 쓰나미를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그리고 지역을 도우러 찾아오는 봉사자들에게도 그때의 경험을 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일기를 5행의 단가(短歌)들과 함께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홀로 장을 보러 나왔는데 큰 흔들림이 왔고, 바닥에 엎드려 큰 소리로 유스케의 이름을 외쳤죠. 집으로 허겁지겁 달려와 부모님과 아들을 데리고 고지대인 녹지공원으로 갔어요.” 공원엔 이미 많은 이들이 와 있었고, 갑자기 눈이 내렸다. 추워서 모포를 가져올까 고민하는 사이, 쓰나미가 거대한 “갈색 손”처럼 닥쳐와 마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더 높은 곳으로 도망치는 그들 옆으로 집과 자동차가 떠내려갔다. “도망치는 동안 유스케는 영문을 몰라 화난 얼굴이었고, 남편은 ‘이건 영화다’라는 말을 반복했어요. 저는 제발 멈춰달라고 소리쳤지요. 그러나 멈춰주지 않더군요.”

가족은 신사 뒷길로 근처 초등학교 체육관에 도착했고, 그날 밤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종이 상자며 체조 매트리스며 이것저것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휩쓸려간 마을의 잔해 너머로 바다는 무심히 잠잠했고, 집으로 가보니 평범하고 소중했던 일상은 사라져 있었다. 체육관에서 시작된 피난 생활은 이후 센다이의 친척 집,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의 가미마치의 교류센터 등을 거쳤다. 네번의 추첨 끝에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도메시의 가설주택 배정을 받은 것은 7개월 정도 흐른 뒤였고, 거기서 5년을 생활했다. 그는 가설주택 생활에서 뜻밖에도 긍정적인 경험을 말했다. 주민들이 더 가까이 어울릴 수 있었고, 외부 봉사자도 많이 찾아왔다. 그리고 욕망이 제한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은, 삶의 기본이 무엇인지 실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노라는 것이다.

시즈가와 가미노야마 하치만구 신사 사무실에서 구도 마유미가 피난소 생활 당시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대지진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을이 휩쓸려 나가는 모습을 봐야 했던 그날, 왜 도망가야 했는지 몰랐던 아들을 위해 제작한 이 내용은 <쓰나미의 그림책>이라는 책으로도 출판됐다. 사진 오쿠노 데쓰야
시즈가와 가미노야마 하치만구 신사 사무실에서 구도 마유미가 피난소 생활 당시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대지진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을이 휩쓸려 나가는 모습을 봐야 했던 그날, 왜 도망가야 했는지 몰랐던 아들을 위해 제작한 이 내용은 <쓰나미의 그림책>이라는 책으로도 출판됐다. 사진 오쿠노 데쓰야

그러나 그 역시 강조했듯 단지마다 풍경이 달랐으며, 입주자 개개인의 조건도 천차만별이었다. <아사히신문>이 지난 8일 일본 경찰 집계 결과를 인용해 보도한 것을 보면, 지난 10년간 가설주택이나 재해공영주택(부흥주택)에서 고독사한 사람은 614명에 이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정서적 고립감에 시달렸을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지 헤아려볼 수 있다. 당시 함께 입주했던 이웃 중에는 자녀교육 등을 이후로 그대로 인근 도시인 도메시로 이사한 사람도 많다. 미나미산리쿠정은 피해지역 가운데서도 지난 10년간 인구가 격감한 곳이다. 구도는 오랫동안 마을의 대소사나 마을 사람들의 정체성과 관계해온 ‘신사 사람’이기에 애초부터 미나미산리쿠를 떠날 생각이 없긴 했지만, 재해 이후에는 기존 신사의 역할을 넘어 적극적으로 마을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미야기대학이 위탁 운영한 ‘마을 만들기 추진원’에 임시고용돼 3년간 지역민들의 목소리를 길어올려 예산 사용처를 정하는 일을 했다. 가설주택 맵도 만들고,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마을 만들기 ‘선배’들을 가설주택 집회소로 불러 재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써나갈 것인가 경험을 듣는 행사도 열었다. “처음 1, 2년은 불만도 많았습니다. 재해 이전부터 존재했던, 행정이 하는 대로 맡겨버리자는 의존적 체질이 보이기도 했어요. 주민들도 행정 쪽도 서툴렀죠. 쉽게 대립 구도로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 이재민이기도 하고 지원자이기도 한 사람들이 번역자나 중개자가 되었습니다.”

구도는 이재민이자 지원자로서 한 일 중 중요한 사례로 방조제 위치와 방향성에 대한 주민 의견을 현의 계획에 관철시킨 일을 꼽는다. 2013년 5월 하드웨어적 부흥사업에 대해 주민 의견을 전달하기 위한 ‘갈매기의 무지개색 회의’를 만들어, 지속적인 학습모임과 의견교환을 통해 방조제를 기존 계획보다 뒤로 물려 세우자는 주민 합의를 도출하고 현에 의견을 제출했다. 이때의 합의 형성 경험을 그는 강조한다. 이런 교섭이 없었다면 방조제는 그것이 서 있는 몇십년이나 그 이상의 시간, 재해 이후를 살아가야만 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납득 불가능한 것, 그야말로 그들을 고립시키는 벽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가 마을 만들기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인상 깊었다. 가설주택에서 신사로 출퇴근하던 어느 날 유스케가 시즈가와를 “부서진 고향”이라 말했다는 것이다. “고향이 사라진 게 아니라 부서졌을 뿐이라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서 조금이라도 되돌려볼 수 있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됐어요.” 나는 이를 ‘부흥’에 대항하는 수리의 사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지금 재해 이후 “남아 있는 환경”에서 무엇을 배울지와 부흥을 계기로 지어진 시설의 활용, 그리고 마을의 작은 프로젝트들과 그 연결의 유지에 관심을 둔다. “지난 시간, 지역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일이나 크기를 키우는 일이 중요했어요. 그러나 그게 꽤 과잉의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중심만 지킨다면 오히려 작은 편이 좋고, 무엇보다 지속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2020년 10월12일에 개원한 미나미산리쿠정 재해부흥기념공원 ‘기도의 언덕’에서 보이는 시즈가와 마을 모습. 지면에서 약 10미터 위로 성토하여 공원과 상점가 등을 정비했다. 사진 안은별
2020년 10월12일에 개원한 미나미산리쿠정 재해부흥기념공원 ‘기도의 언덕’에서 보이는 시즈가와 마을 모습. 지면에서 약 10미터 위로 성토하여 공원과 상점가 등을 정비했다. 사진 안은별

재해 이후를 가본다는 것

이번 여정에서 내가 본 것들은 동일본대지진 이후 도호쿠 지방의 모습 중 극히 일부로, 그 가운데서도 비교적 복구가 빨리 이뤄진 산리쿠 해안의 쓰나미 피해지역이었음을 재차 언급해둔다. 거기에는 재해 이전부터 진행돼왔던 쇠퇴 위로 ‘부흥’이라는 장밋빛 청사진과 ‘국가적 방재’라는 논리가 끼얹어져 말끔하지만 어딘가 뒤틀린 풍경이 있었으며, 동시에 이 조건 속에서 활동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 고민들이 있었다.

이번에 찾은 스다의 그릇가게는 약 200년, 구도의 신사는 약 900년이라는 아주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 지진과 쓰나미로 집이나 가게의 크고 작은 파손을 겪은 센다이 시민들은 수십년 전부터 지켜온 자신들의 터전으로 기꺼이 이방인을 초대해주었으며, 취재 중 만난 도호쿠조선초중급학교의 현유철(48) 교장은 10년 전 대지진으로 파손된 뒤 철거할 수밖에 없었던 기존 교사 터와 함께 1965년 개교 이래 지난 역사를 담은 자료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무언가가 무너지고 사라진 흔적과 구성원이 1000명에서 30명으로 줄어드는 축소의 기록이었지만, 학교가 버텨온 시간에 관한 자긍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일본대지진 피난민은 아직도 4만명이 넘는다. 특히 후쿠시마현 원전 피해지역들 가운데는 문자 그대로 시간이 10년 전에 멈춰 흐르지 않는 곳이 여전히 있다. 사고 원전 인근 7개 시·정·촌에는 ‘귀환 곤란 구역’이 남아 있으며, 이들 지역은 언제 구역 지정이 해제될지 전망할 수조차 없다. 피난 지시가 해제된 곳의 주민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불안을 느껴 피난 중인 사람이 많으며, 차별 피해를 우려해 출신지를 숨기기도 한다. 피해지역 3개 현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재해 직후 그린 부흥 이후 고향의 모습에 비해 현재 상태를 어떻게 느끼는지 물은 조사 결과를 보면, ‘매우 나쁘다’와 ‘나쁜 편이다’라고 대답한 이는 49%였고, 후쿠시마현은 그렇게 답한 사람 비중이 62%로 특히 높았다.(<아사히신문> 3월10일치) 후쿠시마현의 경우 직접 사망자가 1614명, 관련 사망자는 2313명에 이르러 다른 현에 견줘 관련 사망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 또한 여전히 진행 중인 고통과 여전히 드러나지 않은 절박한 현실을 말해준다.

이 르포에 3·11이라는 재난 이후 10년의 고통을 비극적으로 담진 않았다. 떠나기 전, 현장의 절박함을 마주해야 한다는 고민과 함께, 피해지역의 모습을 ‘극적인 드라마’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내가 있는 ‘여기’와 그들이 사는 ‘저기’를 나누고 그들과의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비극의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석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걸어왔고 또다시 걸어나갈 사람들의 모습을 ‘바로 곁에서’ 볼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분명한 건 지금의 도호쿠는 영원히 갇힌 슬픔의 무대만이 아니라, ‘그날 이후’의 삶이 쓰이는 일상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재난이 계속되고 있다는 감각을 가리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해야 한다. 지난 시간, 일본 정부는 ‘귀환 곤란 구역’이 아니면 괜찮다는 식으로 널리 퍼진 방사능 오염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려 해왔고, ‘부흥’이란 기치 아래 일본이 재생되고 있다고 믿게 하는 사회적 담론을 생산해왔다. 그러나 피해지역 곳곳에서 신속하게 콘크리트벽을 쌓아올리며 다시 일어서는 도호쿠를 연출하는 부흥계획은, 원전 폭발이라는 최악의 인재를 일으킨 과학기술 신화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이는 3·11 이후의 일본이 결코 ‘남 일’이 아님을 뜻한다. 기후변화 위기 속, 무엇이 지속가능한 삶인지가 아닌 토건과 성장만을 사고하는 한국의 상황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3·11과 재일 한국·조선인 문제 등을 다뤄온 아티스트 다나카 고키는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기에 갖는 ‘여유’에 책임을 느낀다며 “당사자의 다치기 쉬운 상태(vulnerability)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다시 도호쿠에 가야 한다. 여기서의 ‘가다’는 거리를 극복하고, 관계를 맺으려는 행위로서의 ‘가다’다. ‘저쪽’의 특수하고 불운한 과거의 재해로서가 아니라 각자 서 있는 ‘이곳’의 근미래에 반복될 수도 있는 일로 3·11을 바라볼 때 이 연결은 가능할 것이다.

안은별 재일 연구자, 전 <프레시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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