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최근 서울의 한 성매매 집결지 모습을 그래픽 처리한 것이다. 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가게에 가끔 기침을 하거나 감기 기운이 있는 손님이 옵니다. 손님과 저는 마스크를 끼지 않고 스킨십을 하고 시간이 끝나면 찝찝한 마음으로 방 정리를 합니다. 만약 방금 다녀간 손님이 코로나 확진자고 저도 감염이 된다면….”(예린, 필명)
이미 탈성매매를 하거나 탈성매매로 이행 중인 여성 12명이 작가로 참여한 책 <바다 위 정류장>의 한 편이다. 이 책은 지난해 2월부터 서울시 지원으로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부설 성매매피해상담소인 ‘여성인권센터 보다’(이하 보다)가 진행한 글쓰기 프로그램의 결과물이다. 책 표지에는 “천천히, 나에게 돌아가는 중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예린의 글이 “여전히 출근을 합니다”로 끝을 맺었듯, 코로나 시대에도 어딘가에서는 성매매가 이뤄지고 있다. 방역의 대표적 사각지대라는 성매매 산업의 실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방역은 결국 사람을 살리는 문제인데, 그곳 ‘사람들’의 상황도 알기 어렵다.
기자는 책을 만드는 글쓰기 프로그램 강사로 참여해 참가자들과 함께 책 속의 여흔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프로그램 참가자이자 책 필자로 참여한 3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2월16일부터 3월16일까지 수업을 통해 주고받은 이메일, 대면 인터뷰를 중심에 두고 전화로도 인터뷰했다. 이들은 필명이나 가명으로 이중, 삼중의 위기에 놓인 자신들과 주변인들 상황을 전했다.
김은수: 20대 중반(필명 밤)
업종: 일반 유흥주점
탈성매매 시점: 지난해 5월
이정화: 40대 초반(필명 해)
업종: 노래연습장
탈성매매 시점: 지난해 9월
박현희: 30대 중반(필명 달꽃)
업종: 성매매 집결지
탈성매매 시점: 2019년 초
“며칠간 해열제를 먹으면서 열이 떨어지길 기다렸습니다. 먹고, 먹고, 먹고, 또 먹었습니다. 밥보다 해열제를 더 많이 먹었습니다. 열이 오를 때마다 아파서 견딜 수 없으니 하루에 네다섯번 약을 먹었어요. 포털사이트에서 ‘해열제를 먹었는데도 열이 안 떨어져요’, ‘해열제 코로나’, ‘코로나 증상’, ‘코로나 38도’ 이런 것들을 검색해봤습니다. 결국 119를 불러 구급차를 타고 근처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Web발신] ○○병원에서 시행한 코로나19 검사 결과 [음성]으로 확인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예린, 같은 책)
지난달 24일 늦은 오후, 해열제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김은수씨의 첫 음성은 떨렸다. 말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종종 숨과 말이 엉켜 밭은 숨을 내뱉었다.
“같이 일하는 언니(동료)들이랑 매일 머리를 싸맸죠. 하…,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 언젠가 좋아질 테니까 지금은 몸을 사릴까, 아니야, (코로나19에 걸리면) 동선을 공개한다는데 이런 때일수록 출근을 빡세게 해서 돈을 모아 잠적을 하자. 이런 시국에 집에 다 있자고 하는데 꼭 출근을 해야 하냐. 그러다 민폐다, 저밖에 모른다, 갑론을박하고, 싸우고 막…. 사실 우리끼리 아무리 말해봐야 누구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막연하게 서로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그것도 너무 힘들더라고요.”
김씨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닥친 2015년에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애초 코로나19도 메르스와 다르지 않겠거니 생각했다. 메르스도 처음에는 코로나19 못지않게 떠들썩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분위기가 잠잠해졌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출근하지 말고 2, 3주만 쉬면서 지켜보자”고 한 것도 그래서다. 업소는 발끈했다. 세상은 떠들썩한데, “유난 떨지 말고 나오라”고 다그쳤다. 욕설이 섞였다. “대구도 아닌데, 오버하지 말라고, 감기 같은 거라고, 뉴스를 많이 봐서 염려증 걸린 거라면서 하도 닦달을 하니까, 그러니까 말 들어주는 시늉을 해야 할 거 같아서 그냥 출근하기로 했죠, 뭐.”
염려증이라니, 일터는 노래방과 비슷한 이름을 쓰지만 이른바 ‘2차’가 가능한 업소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학비와 생활비를 집에서 받을 처지가 못 돼 시작한 일이었다. 졸업이 코앞인데, 개인적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생활’이었다. 나가 보니 ‘언니’들은 이미 출근해 있었다.
“손님이 줄지 않더라고요. 진상은 점점 더 늘어나고. 이런 시국에 업소에 온 사람들이 제정신일 리 있겠어요? ‘나 말고 손님이 있냐.
내가 팔아주는 걸 고마운 줄 알아라’ 이런 식이죠. 코로나가 아니라도…, 정말 출근하기 싫더라고요.”
마스크를 쓰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심각한 걱정거리였다. 지난해 3~4월이면 마스크가 모자라 공적마스크를 지급할 정도로 마스크 착용에 대한 경각심이 최고조였을 때다. 하지만 그것은 “바깥의 일”이었다.
“쓰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내가 쓰고 싶다고 해도 또 유난 떠느니 뭐니 못 쓰게 했으니까요. 내가 하도 낀다고 하니까, 끼고 있다가 ‘초이스 보러 들어가실게요’ 한 다음에는 얼굴이 보여야 하니 살짝 내려 턱에 걸치도록 하긴 했는데, 그러고 끝. 나올 때까지 턱에 걸고 앉아 있는 거죠. 그렇게 하루 세 팀을 받았죠.”
김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자들의 안전을 담보로 희열을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 그건 현장에 있는 누구든 스스로를 해치는 행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두번의 코로나 대유행을 겪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마스크를 쓰고 벗을 수 있는 선택권이 그 안의 여성들에게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한 손님이 마스크를 안 끼는 게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인지 으스대는데…. 그 꼴을 보면서 이러다 안 되겠다, 병에 걸리고 말겠다는 생각이 끓어오르는 거예요. 그걸 견딜 수 없었어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설명이 될까요?”
마스크를 써야 할 때도 있었다. “참, 노크로 신호를 주면 그때 쓰라고 하더라고요. 단속이 나오는 거니까.” 하지만 이후로 노크 신호도, 마스크 착용도 기억에 없다. 방역당국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은 결국 폭발했다.
“불안한 게 쌓이니 답답하다가 이제는 화가 치미는 거예요. 뒤척이다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악, 하며 눈이 번쩍 뜨이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화가 나 벽에다 발길질을 했나 봐요. 그 자리에서 병원에 실려갔죠.”
“그때 손톱도 다 쥐어뜯어 곪아서 또 병원에 갔다”고 했다. 그렇게 두어달이 지났고, 몸도 마음도 한계를 넘은 지난해 5월 그는 일을 그만뒀다. 몇달 생활할 얼마의 돈과 잠잘 곳이 해결된 직후다.
서울의 대표적인 성매매 집결지인 이른바 미아리 업소 입구에는 미성년자 출입금지구역 팻말이 있다. 지난달 말 집결지 거리는 코로나19 영향 때문인지 한산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저라고 위험한 거 몰랐을까 봐요? 알면서도 그 일을 해야 하는 게 더 힘들었죠.”
하루 앞서 인터뷰한 이정화씨도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한 역설적 상황을 전했다.
“마이크를 서로 돌려가며 노래하고, 네가 먹었는지 내가 먹었는지 모르는 술잔이 있고, 비말이 얼마나 튀었는지 모르는 안주를 먹고, 몸을 부딪치고.”
이씨는 원래 2019년 초 성매매 집결지를 나왔다. 하지만 “가진 게 없어서 당장 굶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마땅한 대안도 찾지 못해” 이른바 보도 사무실에 나갔다. 노래방 도우미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코로나19가 닥쳤다. 이씨는 근면했다. “평균 5개를 돌아야 10만~15만원을 손에 쥐었”다. 저녁 7시가 넘으면 출근해 늦으면 새벽 3시를 넘기는 날도 있었다. 김씨에 비해 동선도 넓고 접촉하는 사람 수도 많았다.
결국 그만둔 것은 2차 대유행 직후다. 지난해 봄 1차 대유행의 공포 속에서도 노래방 일을 멈추지 않았던 그였다. 9월 2차 대유행이 끝나고는 왜 갑작스럽게 일을 접었는지 물었다. 그는 2019년으로 시간을 되돌렸다. 그때 업소 화재로 가까운 ‘언니’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 삶이 자신의 삶일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거기에 “이제는 아이랑 건전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 보태졌다.
말 속에 아이가 등장하면서 그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이를 생각하면 일을 시작하면 안 됐”지만 “아이 때문이라도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고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코로나가 아이까지 집어삼키면 어쩌나 걱정이 생겼다.
“불안하죠. 그래도 당장 밥이 걸려 있는데, 동시에 챙길 수는 없으니까. 1년 내내, 내가 감염되면 너도 감염되는데, 그래도 너를 굶길 수는 없고, 너랑 나랑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너랑 나랑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고민 속에 살았죠.”
여전히 생계와 안전 사이에서 흔들리는 듯한 그는 지난해 여름 2차 대유행을 겪으면서 생각의 큰 줄기가 바뀌었다. 결정적인 국면은 대구가 아닌 서울에서 확진자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다. “아이가 우선이었다. 가진 것 없는 내가 일할 곳이 없나, 다시 찾게 됐다”고 했다.
김씨와 이씨는 자신들이 일하던 그곳은 여전할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서울 강남 쪽에는) 단계가 낮아지면서 대기 손님까지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어차피 노래방에서 도우미랑 술 먹는 것 자체가 불법이지만 단속되나요? 행여 단속 뜨면 간판에 불 내리는 것까지 똑같을 것”이라고 했다.
지방이라 해서, 발병 우려가 폭증했다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최민혜 대구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지난해 12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발행하는 <여성과 인권> 기고에서 “코로나 초기뿐만 아니라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때도 성매매 집결지는 성행했다”며, 신천지 교인 집단 감염으로 대유행을 겪은 대구 상황을 전했다. 당시 거리가 텅 빌 만큼 도시가 마비됐지만 성매매 수요는 줄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최 대표는 지난 16일 전화 인터뷰에서 “취약한 계층의 사람이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대구 (성매매 현장) 곳곳에서 드러나 있었다”고 했다.
“그때 한 여인숙 집결지를 방문했어요. 마스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일회용 마스크를) 락스로 깨끗이 빨아 쓰고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마스크가 귀한 때이긴 했죠. 그걸 감안하더라도 일회용 마스크는 세탁 후 재사용이 안 된다는 기본적 정보조차 전달되지 않았던 거죠.”
돌팔매는 현장의 여성들에게 집중됐다. 최 대표는 “지난해 4월 서울 강남 한 업소에서 확진자가 나왔을 때 유일하게 여성만 직업이 공개됐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언론은 여성만 집중 조명했다. 방역당국은 여성의 동선을 공개하고 그를 고발했다. 동선 공개가 알려지면서 성매매 현장 여성들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인터뷰한 이들도 그때를 기억했다. 김은수씨는 “그때 주위에서는 동선 공개가 되느니 아파도 차라리 집에서 죽고 만다는 말을 하곤 했다”며 “2주간의 동선을 공개하는 것을 보고는 아무리 아파도, 죽을 거 같아도 참았다가 2주 뒤에 병원에 간다고도 했다”고 말했다.
“제 동선이 밝혀지면 사람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까요. 웬 정체도 알 수 없는 외진 건물에 제가 몇시간 동안 머물렀는데 그 건물이 키스방이라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아무리 저를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라도 그 순간만큼은 이성보다 창녀에 대한 혐오감, 공포감, 분노 이런 감정들이 앞설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예린, 같은 책)
여성만을 희생양으로 삼는 접근은 제대로 된 해법으로 이어지기도 힘들다. 기본적 방역조차 부실한 상태로 방치되는 것이다.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유흥업소 종사자 2명이 양성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출입자 명부가 제대로 작성돼 있지 않아 역학조사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업소는 강남 대부분의 업소가 그러하듯 집단 감염이 늘 우려되던 곳이다. 누구의 잘못일까? 명부 작성을 거부하는 남성들의 잘못일까? 그것을 권하지 못하는 업소의 잘못일까? 아니면 이를 관리하지 않은 당국의 잘못일까?
성매매를 벗어나도 삶이 고되긴 마찬가지다. 이정화씨는 지난해 9월 노래방 도우미 일을 접은 뒤 쿠팡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하필 집단 발병이 일어난 그곳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처음에는 불안했는데 이곳은 더 안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엇보다 ‘내가 너를 구매했다’ 이런 느낌을 주는 사람도 없고, 외모로 나를 평가하지 않고, 그래서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고,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편하다?”
심야 업무를 택했다. 수당 때문이었다. 밤 9시부터 아침 6시까지 일하면 10만원이 조금 넘었다. 5개월을 열심히 일했다. 그마저도 몸에 탈이 나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자영업 위기에, 대면 접촉을 꺼리는 분위기에, 가난한 이들의 일자리가 더 위축됐다. 김은수씨의 경험이 그랬다. “베이비시터부터 식당, 공장, 택배 알바까지 여럿 문의를 넣었지만, 코로나 여파로 힘들어서인지 답장조차 오지 않았다”고 했다. 모아둔 돈도 떨어져갔다. 그는 재난지원금도 받지 못했다.
“저만 아니라 주변에서 못 받는 언니들이 태반이었어요. 가정폭력 때문에 집이랑 연락을 안 하거나 인연을 끊고 사는 경우가 많거든요. 전입신고를 하면 부모가 찾아올까 봐 못 하는 경우도 있고요. 게다가 어릴 때 집을 나와서 전입신고 하는 법도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돈을 받을 방법이 없는 거죠.”
김씨도 마찬가지다. 그도 가정폭력 피해자다. 부모와의 연락은 사실상 끊겼다. 이대로라면 그는 앞으로도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 성매매 여성 지원 단체를 찾았다. 그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운이 따랐기 때문이다. 몇달을 버틸 생활비가 있었고, 부양할 가족도 없었다. 그러다 올해 1월 한 직장에도 자리를 잡았다. 인턴이지만 정식 채용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현희씨는 애써 딴 자격증들이 무용지물이 됐다. “메이크업 국가자격증, 피부관리 국가자격증, 네일아트 국가자격증, 속눈썹 1급 민간자격증, 속눈썹 강사 민간자격증, 해외 호환 자격증, 국비학원 수료증….” 박씨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자격증을 셌다. 코로나 발병 전인 2019년 초 탈성매매를 한 그는 ‘자활’ 참여 조건으로 받는 월 100만원 안 되는 수입으로 버텼다.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코로나는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자격증을 딴 뒤에 미용실이나 이런 곳에 취업을 하게 되면 (탈성매매 지원) 단체에서 1년 정도 급여를 대신 지급하게 되거든요. 가게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죠. 늘 일손이 부족한 곳이니까. 그런데 정작 자격증을 따도 코로나19 때문에 가게에서 사람을 뽑지 않는 거예요. 모든 게 일시정지, 멈춰버린 거죠. 코로나19가 내가 해놓은 것들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망연자실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30대 중반으로) 나이도 많고, 경력도 없고, 학벌도 좋은 것도 아니고.” ‘학벌’이라는 단어에서 멈칫했다. “원래는 자격증을 준비했던 미용학원에서 강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죠. 그런데 이력서를 내니 ‘국비학원은 4년제 대학을 한 사람만 강단에 설 수 있대. 미안해, 현희씨’ 이렇게 말하고는 연락이 없네요.”
그래도 살아야 했다. 10개월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한 이·미용 자격증은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가 찾은 곳은 콜센터다. 학력과 나이 제한이 없어 바로 취업이 가능했다. 그런데 코로나 3차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일하던 콜센터에서 확진자가 나왔다. 이곳에서도 문제는 마스크였다.
“마스크를 끼고 말하면 고객들이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벗고 일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업체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직원들이 벗고 일한다는 걸 보건소나 구청에서 알았는지, 가끔 단속이 나오긴 했어요. 그러면 센터로 무전이 오죠. ‘옵니다~’ 그럼 마스크를 쓰고, 공무원들이 돌아가면 다시 벗고…. 그렇게 일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위험했어요.”
박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시작한 콜센터 일을 해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둬야 했다. 이씨처럼 몸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3월 초 광주 콜센터에서 벌어진 집단 감염을 보면 남 일 같지 않다. 을지로에 남은 동료들의 얼굴이 선하다.
박씨의 삶이 다시 한번 멈춰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업소다. 주춤하면 그 틈에 파고드는 손짓 같아 정말 징글맞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다시 하자고. 네 새끼 먹이려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돈만 생각하면 가고 싶은데…. 어렵게 나왔고, 어렵게 버티고 있으니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거긴 지옥일 텐데….”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돼도, 재난지원금이 지급돼도 전화는 온다. 업소는 붐빈다고 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네가 필요하다고 조른”다. 박씨는 혼란스럽다.
“다시 해야 하나. 다시 갈까. 이런 생각이 안 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곰곰이 생각해보죠. 역시 지금까지 해온 게 너무 아깝더라고요. 이렇게 노력한 게 살면서 처음이고. 새로 얻은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고. 나를 보면서 너희들은 역시 어쩔 수 없구나라고 할까 싶은 생각도 들고. 일단 하루씩 버티고 있죠.”
그는 “결정적 순간에 코로나19로 막혀 할 수 있는 게 없는 느낌”이라고 했다. 막막한 건 박씨만은 아니다. 아직은 비정규직 인턴인 김씨나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5개월 경험한 이씨도 속이 속이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인데도 강남의 룸살롱은 ‘열렬한 성원에 힘입어’ 성업 중이다. 손님들은 30분은 대기해야 한다는 안내를 듣고서도 기다리고 업장은 하루에 손님을 500명씩 받는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섹스는 못 잃어’라니. … 사회에 절망하면서도 정 안 되면 업소로 가면 어떻게든 먹고살 수는 있겠구나 안심하는 내가 있다.”(밤, 같은 책)
밤은 김씨의 필명이다. ‘어떻게든 먹고살 수는 있겠구나 안심하는 나’라고 쓴 대목에 관해 물었다.
“사람 마음이 어떻게 하나겠어요. 업소를 때려치우고 싶으면서도 출근했던 것처럼. 가고 싶다면 말이 좀 이상한데, 거기 가면 돈은 벌 수 있는 건 또 사실이니까.” 김씨는 그래도 버텨보려 한다. 우선 하던 일을 계속해볼 작정이다. 혹시 몰라 토익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이씨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된 요즘 문득 남겨진 친구가 떠오른다.
“지금도 집결지에서 일하는 친구 한둘 연락하고 지내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그 친구들도 갈 곳이 없어서, 일을 찾다 찾다 택한 곳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거기에 그 친구는 여전히 놓여 있고. 그렇다고 나라고 별수 있나, 이런 생각도 들고. 먹고살려고 나를 내놓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뿐, 많이 있거든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요? 이 문제를, 네?”
‘성매매 7할 이상 온라인 이동’ 분석 방역당국은 현장에서 모습 안 보이고 비대면 분위기 타고 규모·수법 변화 방역의 문제와 인권 함께 고민해야
성매매 피해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설치된 서울시립 다시함께상담센터의 자료를 보면, 상담 건수는 2020년 5297건으로 2019년(3775건)에 비해 40% 증가했다. 오승윤 상담팀장은 “사회적 거리두기 등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아웃리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채팅 앱,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 에스엔에스나 포털의 질의응답(네이버 지식인 등)을 활용하면서 온라인 상담 건수가 대폭 늘어났다”고 했다. 오 팀장은 “특히 코로나19와 생계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성매매를 하게 된 경우가 눈에 띈다”며 “코로나19로 알바 등 일감이 줄면서 조건만남 등 온라인 성매매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대출 사기, 불법 촬영, 폭행 등의 피해를 입었다는 사례들이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글쓰기 프로그램의 시작은 필사였다. ‘여성인권센터 보다’의 한 책장 서랍에는 12명의 노트가 보관돼 있다. 김은수(가명)씨가 꺼내든 노트에 손글씨가 가득하다. 김씨는 “어쨌든 그때그때 쓰고 싶은 걸 썼다. 그러다 쓴 글을 함께 읽으며 펑펑 울기도 했다”고 말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당장의 안전이 문제다. 이하영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공동대표는 “상담 사례를 보면 영업정지 등으로 일을 하지 못해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내용도 있지만, 그 반대편에는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영업을 계속하는 업소에 대한 불만도 있다”며 “특히 업소에서 마스크 착용 등 기본적인 개인 방역조차 사실상 불가능하고, 남성들은 신체 접촉을 당연하게 여기는 상황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담은 목소리는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방역당국이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송봉규 한세대 교수(산업보안학과)는 “그나마 집결지나 유흥주점 등은 코로나의 영향으로 위축되는 모양새이지만, 변종 성매매나 온라인을 통한 성매매 실태는 더 심각해졌다고 봐야 한다”며 “특히 성매매의 7할 이상이 온라인으로 옮겨 왔으며, 코로나19를 맞아 비대면이 강조되는 분위기를 타고 규모와 수법 면에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한달, 그새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세 사람의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지난 16일 수화기 너머의 박씨 목소리는 밝은 편이었다. 그새 “콜센터 한군데를 때려치웠다”고 했다. 그는 최근 다른 자활 프로그램에 참여해 글 대신 그릇을 빚는다.
물류센터 아르바이트 뒤 몸을 추스르던 이씨도 일상이 조금 달라졌다. “삼시 세끼를 너무너무 꼬박꼬박 집밥을 챙겨 드셔서 엄마를 허덕허덕하게 만들던” 아이가 3월부터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많이 먹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지만 낮에는 숨을 돌릴 수 있다. 그 또한 자활 프로그램에 개근하는 중이다.
새내기 직장인인 김씨는 기자를 경계하는 듯하던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기사가 나가기 전에 먼저 볼 수 있나요”라고 묻기도 했다. 첫 인터뷰처럼 목소리의 떨림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토익 점수는 850을 넘어섰다. 매일 두시간 가까운 거리를 통근하고 월급 절반은 저축하고 있다.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전국 463명인 오늘(3월19일)도 전국 34개 지역 1570곳(2019년 기준)에 이르는 성매매 집결지는 여전히 불을 밝힌다. 김씨가 뛰쳐나온 유흥주점이나 이씨가 일했던 노래연습장도 손님을 맞이할 것이다. 마스크 하나 제 뜻대로 쓰지 못하는 곳으로, 다른 김·이·박들은 출근할 것이다. 그곳은 방역과 동떨어진 밀집·밀접·밀폐 ‘3밀’의 현장이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