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 중 5명. 성평등을 공약 전면에 내세운 후보가 이렇게 많은 적은 없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여파로 치러지는 4·7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후보들의 성평등 정책 대결이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비록 지지율 1% 미만(리얼미터 기준)의 소수정당·무소속 후보들이지만 이들의 총득표율에 따라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기호 6번 신지혜(기본소득당), 8번 오태양(미래당), 11번 김진아(여성의당), 12번 송명숙(진보당), 15번 신지예(무소속·팀서울) 후보가 선보인 정치 비전은 당의 크기나 지지율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대체로 성평등, 노동권 보장, 기후변화 대응, 성소수자 존중, 동물권 등을 중시하면서도 세부 공약은 각각 차이가 있다.
연간 기본소득 300만원 지급을 공약한 신지혜 기본소득당 후보는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 되겠다고 나섰다. 공직사회 성폭력 근절, 디지털 성범죄 추방, 서울시 성별 임금 격차·유리천장 없애기 등을 공약했다. 특히
신 후보는 지난해 12월 예비후보 등록 때에도 서울시내 25곳 보건소에 임신중지 약물(미프진) 상비, 여성 전문 공공병원 설립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신민주 기본소득당 젠더정치특별위원회 위원장은 “그동안 가정에서 희생했던 여성들이 복지를 누릴 수 있는 독립된 개인으로 존중받는다는 측면에서 우리 당의 기본소득 정책이 의미 있다”고 했다. 지난해 전국민에게 지급된 1차 재난지원금은 세대주가 신청해 받는 구조였다. 대부분 남성이 세대주인 상황에서 세대주가 아닌 이들을 배제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차별 없는 서울’을 내세운 송명숙 진보당 후보는 노동권과 젠더 관점을 연결했다. △서울형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실업수당 지급 △30인 미만 사업장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및 예방교육 의무화 △고용상 차별행위 금지조례에 고용 성차별 금지 조항 명시 등을 공약하며 일자리에서의 성평등을 강조했다.
시장 후보와 여성안전부시장, 성평등부시장, 성소수자부시장 등 6명의 부시장 후보가 팀으로 출마한 신지예 무소속 후보와 팀서울은 지방자치단체장의 권력 분산에 역점을 둔 공약을 제시했다. 이들은 “제왕적 시장의 권력을 나누고 협력하는 정치로 시정을 돌볼 것”이라고 했다. 또 분야별 부시장 자리를 모두 여성으로 채우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공약을 전면 여성정책으로 구성한 후보는 김진아 여성의당 후보다. 김 후보는 ‘여자 혼자도 살기 좋은 서울’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여성안전, 주거, 일자리, 의료, 학교폭력 등 5대 공약을 제시했다. 기성 정당이 지금껏 여성 유권자를 위한 공약이라며 육아와 돌봄 등 가정 내 여성을 위한 정책,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를 강조해온 것과 차별화한 지점이다. 김 후보는 정치권 주요 타깃 유권자로 떠오른 적 없는 비혼 여성을 위한 정치를 약속했다.
31일 서울 동대문구선거관리위원회에서 한 직원이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용지를 들어 보이고있다. 연합뉴스
오태양 미래당 후보는 성소수자 인권을 전면에 내세웠다.
오 후보는 서울시를 ‘성소수자 자유도시’로 선언하고, 동성결혼 가족 지원 조례 제정과 ‘소수자청’ 신설 등을 약속했다. 오 후보는 성평등을 두 개의 성이 아닌 모든 성정체성 존중으로 접근하며 성소수자 정책에서 앞서 나갔다.
성평등을 전면에 내세운 후보들이 여럿 등장한 것은 긍정할 만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은 “이 후보들은 기득권 정당의 여성 정치와는 다른 비전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성평등이란 공통가치로 왜 후보가 여럿이냐 하지만, 그만큼 여성들의 욕구와 열망이 다양함을 나타낸다. 소수정당 합산 표가 전체의 10%가량 된다면 기성 정치판을 흔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현실적인 한계도 크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젊은 정치인들이 페미니즘을 내걸고 나오는 건 고무적이지만 결집된 모습이 아니라 아쉽다”며 “각 후보가 거대 정당의 주요 후보와 맞붙어 자신의 특징과 색깔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데 토론회마저 군소후보끼리 따로 한다. 후보들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