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오후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 단지 후문 인근에 택배 상자들이 쌓여 있다. 연합뉴스
지난 겨울 눈이 올 때마다 택배 기사 원영부(51)씨는 자괴감을 느꼈다고 했다. 아파트 출입로 한쪽에서 눈썰매를 타는 주민들과 아이들을 지나쳐 손수레를 끌고 경사를 오르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원씨 담당 구역인 경기도 성남시 판교의 한 아파트는 3년여 전부터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고 지하주차장 출입만 허용했다고 한다. 그는 단지 입구에 차량을 세우고 택배를 하나하나 손수레에 옮겨 몇번을 왔다 갔다 하며 배송했다. 업무 시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는 “요샌 1주일에 70~80시간씩 일한다”고 했다. 17년 차 택배기사인 원씨는 “코로나 시대 필수적이라는 택배노동자를 왜 이렇게 취급하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 택배는 시키면서 택배차량 출입을 막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토로했다.
최근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가 택배 차량 지상 출입을 막아 ‘택배 대란’이 벌어진 가운데 비슷한 일들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8일 전국택배노동조합이 택배노동자들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는 아파트는 전국 100곳 이상인 것으로 집계됐다. 택배 기사들은 “아파트뿐 아니라 회사도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는 지난 설 이후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았다. 담당 택배기사 박종훈(47)씨는 한 달 넘게 해당 아파트를 담당하다 이번주부터 담당 구역을 바꿨다. 박씨는 “단지 입구에 택배 차량을 세워놓고 두 번은 왔다갔다 해야 한 동을 끝낼 수 있다”며 “지난주 토요일(3일)엔 비가 왔다. 손수레를 끄느라 비를 쫄딱 맞으니 ‘이렇게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도 지하 출입구 높이가 2.3m라 일반 택배 차량으론 진입이 불가능하다. 정부는 2019년 1월, 택배 차량 출입을 위해 지상공원형 아파트 지하주차장 입구 높이를 2.7m로 만들라고 정했다. 그러나 박씨가 담당하는 아파트는 정부 지침이 나오기 전에 건축 승인을 받은 곳이다.
이런 아파트의 지하 출입을 위해선 높이가 낮은 ‘저상차량’을 써야 하지만 택배 기사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저상차량으로 개조하려면 백만원 넘는 비용이 드는데 개인사업자 신분에 가까운 택배 기사가 전액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상차량으로 개조해도 차량 높이가 낮아져 실을 수 있는 택배 물량이 줄어드는 것이 문제다. 원씨는 “저상차량으로 개조하면 적재 물량이 줄어드니 터미널에 한 번 더 들렀다 와야 한다. 판교 쪽 터미널은 용인이다. 왔다 갔다 하면 업무시간이 너무 늘어난다”고 하소연했다.
아파트 쪽은 ‘안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박씨가 담당하는 고양시의 아파트 관계자는 “지난해 말 택배 차량이 후진하다 노인을 쳐 지상출입을 금지하게 됐다. 지속적으로 저속 운행을 요청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원씨가 담당하는 아파트 관계자도 “어린이들이 다칠 수 있으니 입주민 안전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상 출입을 막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 한 아파트에서 손수레를 통해 지하주차장에서 택배를 운반하는 모습. 원영부씨 제공
입주민 ‘안전’과 택배기사 ‘과로’라는 쟁점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택배 회사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민욱 택배노조 교육선전국장은 “택배 기사는 하청노동자이자 특수고용노동자라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다. 노동자 건강권을 위해 택배회사들이 지상운행을 막는 아파트를 배송불가 지역으로 선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택배노조는 이날 오전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은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아파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아파트 쪽은) 택배노동자와의 어떠한 사전 논의도 없이 ‘갑질’ 행위를 벌였다. 손수레 이용으로 아파트 배송에 소요되는 시간이 기존보다 3배가량 증가했다. 14일부터 아파트 입구까지만 배송할 예정”고 밝혔다. 이들은 택배회사에도 “지상 출입 금지 조치 아파트를 배송불가지역으로 지정하라”고 촉구했다. 택배노조는 “234명 택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 179개 아파트(중복 포함)가 택배 차량 지상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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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차량 금지’에…손수레 끌다 퇴근마저 3시간 늦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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