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위안부 피해자 2차 손배소 선고 공판을 마치고 나온 이용수 할머니.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에서 패소한 21일, 법정에서 이를 지켜본 이용수 할머니는 “재판 결과가 어떻든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가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판결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들도 “법원이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하고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책무를 저버렸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재판장 민성철)는 이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을 상대로 1인당 위자료 1억원씩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렸다. 2016년 처음 소송을 제기한 뒤 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원고로 나선 피해자 10명 중 생존자는 현재 4명뿐이다.
이 할머니는 판결을 듣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한복 차림으로 법정에 출석했지만 패소 취지의 선고 내용을 듣자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법정을 나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이 할머니는 눈물을 닦은 뒤 취재진 앞에서 “너무 황당하다. 결과가 좋게 나오건, 나쁘게 나오건 국제사법재판소에 꼭 가겠다.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밝힌 뒤 법원을 떠났다. ‘위안부’ 문제 ICJ 회부 추진위원회’는 입장문을 통해 “이용수 할머니는 부당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판결 항소 등 다음 수순을 고민 중이고, 다른 할머니분들을 위해서도 일본의 위안부 제도 범죄사실 인정, 진정한 사죄, 역사교육, 위안부 왜곡이나 부정 반박 등을 요구하는 운동은 끝나지 않았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 네트워크와 대리인단도 이날 법원 판결을 강하게 비판했다. 피해자 대리인인 이상희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는 “재판부는 선고 내내 피해자들이 손해배상 청구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인 인간으로서의 피해회복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의 이익을 강조하며 일본에 대한 강제집행을 전제로 국익을 우려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또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위안부 문제 책임을 행정부와 입법부로 돌렸다”며 “이번 판결을 통해 국제질서 인권 최후 보루인 법원이 피해자 인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도 “(법원이) 지난 30년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고발하고, 국제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투쟁한 피해자들의 활동을 철저히 외면했다. 국가는 다른 나라의 법정에서 피고가 되지 않는다는 ‘국가면제’를 주장한 일본 정부 입장을 받아들인 것”이라며 “자국의 국민이 중대한 인권침해를 입었음에도 가해자가 외국이라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인가.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하고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책무를 저버린 오늘 판결을 역사는 부끄럽게 기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도 이날 판결에 대한 유감을 표시했다. 아놀드 팡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관은 “오늘 판결은 일본군 성노예제 생존자들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도중 그들과 같이 잔혹 행위에 시달린 뒤 이미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는 큰 실망을 안겼다”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이 지났다. 일본 정부가 더 이상 생존자들의 권리를 빼앗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성곤)는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서, 이같은 인권침해 사건에는 국가면제 이론을 적용할 수 없다며 배상책임을 인정한 바 있다. 이날 판결은 민사34부 판결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변호사는 “이번 판결로 지난 1월의 판결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9개국 410명 법률가가 해당 판결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국제인권법적 흐름에 역행하는 이번 판결은 유감이다”라고 했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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