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두 디아바테(39)는 부르키나파소에서 온 음악가이자 마음치유사이다. 공연에 혼신의 힘을 쏟는 한편, 부천 ‘송내동 청소년 문화의 집(나래)’에서 서아프리카 음악과 문화를 가르친다.
화나고 슬픈가요? 자, 나와 발라폰의 대화에 귀 기울여 봐요. 투명하고 경쾌한 발라폰 소리가 그대 안의 폭풍을 잠재우고 신비한 치유의 바람을 불어넣어줄 거예요. 그래요, 이제 미소 짓는군요. 그대 마음에 행복과 평화를 드리는 나는 ‘젤리’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오로다라는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작은 마을이죠. 우리나라에는 63개 말을 쓰는 63개 종족이 있어요. 나는 그중에서 소수 종족인 시아무족이죠. 우리 집안은 대대로 시아무족의 젤리예요. 내가 73대니까 우리 집안이 2천년 가까이 젤리로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젤리는 시인이자 영혼을 달래는 음악가이고, 갈등을 잠재우는 중재자이자, 우화와 속담으로 인생의 가르침을 전하고, 노래와 이야기로 수천년의 역사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그리오’라 불러요. 우리 음악은 사람들 삶에 특별한 에너지를 불어넣어요.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마음과 마음을 이어줍니다. 내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는 온 정성을 기울여 발라폰을 연주했대요. 그렇게 아버지의 영혼과 음악적 재능이 나에게 스며들었어요.
아버지는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 태어나서, 프랑스가 우리말과 문화를 빼앗은 것에 크게 분노하며 살았어요. 우리가 프랑스와 싸워가며 지금까지 버텨왔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요. 무엇보다 큰 문제는 프랑스가 젤리를 없애려 했던 것이었어요. 사람들에게 역사를 전하고 인생의 지혜를 전하는 일은 학교가 가져갔어요. 경찰서와 법원이 모든 갈등을 잡아채고 처벌했어요. 젤리가 나서서 중재할 수도 없도록 사람들 관계를 무너뜨렸어요. 프랑스에서 독립한 뒤에도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로 남았죠.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어요. 프랑스 말과 문화를 가르치는 학교는 젤리에게 배움을 줄 수 없다며 아들딸을 아버지가 직접 가르치셨죠. 나는 아버지와 형들에게 음악과 역사를 배우고 옳고 그름과 세상 이치를 배웠어요. 다섯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마을의 희로애락을 함께했어요.
마을에서 농사일을 할 때는 음악으로 힘을 주고, 일주일 내내 이어지는 결혼식에서 행복을 연주하고, 누군가 돌아가시면 가신 이가 행한 좋은 일을 노래로 불러 자손들에게 자긍심을 줬어요. 아기가 태어나면 축하 음악을 연주하고, 결혼하고 싶은 청년들을 위해 양가를 오가며 중매도 섰답니다. 누군가 죽자 사자 싸우고 있으면 다독이는 말과 연주로 싸움을 멈추게 했어요. 싸우던 이들은, 젤리가 없었으면 널 죽였을 거야, 하고 웃으며 헤어졌어요. 서아프리카에서 젤리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죠.
나는 젤리가 계속 이어지도록 고향에 젤리 아이들을 위한 학교 ‘띠아모뇽’(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감)을 만들었어요. 내 친구와 가족들이 아이들에게 전통의 가치와 음악, 춤을 가르쳐요. 나는 뮤배(나래 관장)와 함께 운영비를 지원하고요. 고향과 한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정말 행복해요. 이 두곳에 젤리 음악학교를 만드는 것이 내 꿈이죠.
나는 시아무족의 시암어를 해요. 우리는 글자가 없어요. 아버지는 시암 문자를 만들고자 하셨는데, 진전을 보지는 못했어요. 프랑스어를 언제 배우기 시작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딱히 배우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데 살다 보니 어떻게 하게 됐어요. 내가 열세살 땐가 아버지에게 발라폰을 사러 온 프랑스 아저씨가 있었어요. 발라폰 연주를 기가 막히게 하는 조그만 녀석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자기한테 가르쳐달래요. 나는 아저씨와 대여섯시간 같이 발라폰을 연주하고 마을을 구경시켰죠. 아저씨가 이게 뭐니, 저게 뭐니 물어대고, 나는 시암어에 프랑스어 단어 몇개 섞어가며 열심히 알려줬던 기억이 나요.
발라폰은 길이가 다른 나무를 가죽으로 나란히 묶고 아래쪽에 조롱박을 달아 소리가 울리게 하는 악기예요. 실로폰과 비슷한 모양이죠. 발라폰은 서아프리카 사람들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이라 할 수 있어요. 마림바, 실로폰, 피아노 같은 서양 악기가 아프리카 악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도 있어요. 기록을 찾을 수 없으니 크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우리끼리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우리는 악보가 없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가르쳐서 후대에 전하고 있어요.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혀 모르다가 얼결에 오게 됐어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아프리카예술박물관에서 우리 마을에 공연자를 물색하러 왔을 때, 우연히 오디션을 봤다가 계약까지 하게 됐어요. 월급 600달러(한화 66만8천원), 하루 식비 2500원. 처음에 10명이 같이 오고, 다음에 10명가량 더 오고. 2012년 일입니다. 올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서 왔는데 정말 놀라운 일을 겪었어요. 와서 보니 한국은 물가가 너무 비싸 600달러로는 절대 못 살 나라였어요. 그 돈은 한국 최저임금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것도 나중에 들었어요. 우리 공연자들은 박물관에서 제공한 곰팡이 핀 숙소에 살며 썩은 쌀을 먹어야 했어요. 계약을 위반한 박물관과 노동 조건을 협상해보려 했지만 쉽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일부가 못 견디고 뛰쳐나가자 박물관 쪽은 기다렸다는 듯이 남은 사람들 여권을 빼앗아갔죠. 우리는 한국 인권단체와 힘을 합쳐 싸웠고 결국 사과와 임금을 받아냈어요. 단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한국이 생각났어요. 박물관에 콕 박혀 지내느라 한국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속상했어요.
박물관에서 같이했던 형과 둘이 다시 한국에 왔어요. 형의 제안으로 쿨레칸(뿌리의 외침) 팀을 만들어 활동하며 한국을 새롭게 경험했어요. 좋은 사람들도 만났어요. 아내도 그렇고, 지금 같이 일하는 뮤배도 그렇고요. 박물관은 나에게 나쁜 일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해요.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어쨌든 박물관 때문이고, 그 덕분에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내 아들도 만났으니까요.
한국과 내 고향은 많은 부분에서 달라요. 특히 가족 관계가 그래요. 고향에는 가족이 많아요. 아무리 많아도 아침에 일어나서 일일이 인사해요. 누가 며칠 안 보이면 걱정하고 안부를 묻죠. 다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많지 않은 가족인데도 서로 연결되지 않아요. 혼자 사는 게 편해 보여요. 한국인과 가족을 이루어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 나는 한국 방식을 존중하고 따르려고 해요. 하지만 쉽지 않네요. 양육방식도 상당히 달라요. 나는 되도록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가르치고 싶어요. 무엇이든 어려서부터 직접 해보며 익히게 하고 싶어요. 나는 발라폰이나 젬베 만드는 것을 어릴 적에 아버지와 형들 따라 하며 배웠어요. 가족이나 공동체에서 삶에 필요한 여러 기술이나 지식을 서로 가르쳐주고 따라 익히며 협력을 배웠는데, 한국에서는 전혀 달라요.
한국은 무척 복잡한 사회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요.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오냐오냐 무조건 다 해주고, 뭔가 배워야 할 때는 다 학원으로 가요. 내가 아이에게 무언가 하라고 시키는 것은 아이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가 나를 아빠로 알고 존중하도록, 내가 하는 일을 아이가 따라 하며 배우도록 하고 싶은 거죠. 하지만 아내는 달라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주려고 해요. 나는 걱정이죠. 아이에게 배움의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 자립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야 하지 않을까.
지금 미디어에 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미디어가 불편해요. 자기들 입맛대로 내 삶을 왜곡하니까요. 전에 이주민 이야기를 다루는 방송에 나간 적이 있는데, 그들은 나를 가족 생계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나더러 이삿짐센터에 알바 가는 시늉을 하래서, 나는 영문도 모르고 따랐죠. 나중에 방송을 보니, 돈벌이 못해서 전전긍긍하던 내가 한국인 도움으로 일거리 찾아 사람 노릇 하는 장면이 나오는 거예요. 황당했어요. 나 정말 그런 사람 아닙니다. 무슨 이익이 있다고 외국인을 그렇게 무능한 사람,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는 겁니까. 오죽했으면 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나한테 2만원을 주십니다. 불쌍하다고, 열심히 살래요. 아픈 마음을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방송에 항의하지 않았어요. 젤리는 분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치유하는 사람이니까요. 어릴 적, 아버지는 친구랑 싸우는 나에게 가르침을 주셨어요. 아미두, 젤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란다. 우리는 기쁘고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야, 아픈 사람 낫게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니까 싸우지 마라.
나는 그 말씀을 새기며 젤리로 자랐어요. 닫혀 있는 한국인들 마음에 다가갈 때도 ‘젤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말을 생각해요. 더 여유 있게 말하려고 노력하고 먼저 다가가려 애써요. 물론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었어요.
한국인들은 내 모습을 무척 낯설어해요. 커피숍에서 나와 마주친 사람이 흐억! 하고 놀랍니다. 나는 더 놀랐죠.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말했어요. 그런 거 하지 마요. 나 사자 아니에요. 커피숍에 사자는 절대 못 와요. 지하철에 탔는데 안에 있던 사람이 또 헉! 하고 놀라요. 저기요, 여기 지하철이잖아요. 뱀은 지하철 타러 못 와요. 뱀이라도 만난 것처럼 그렇게 놀라면 나도 놀라잖아요. 그러지 마요. 나에게 음악 배우는 아이들이 나를 무척 좋아해요. 매달리고 올라타고 난리도 아니죠. 그 아이들이 길에서 나를 보고 좋아서 달려오면 부모가 앞을 가로막아요. 아이는 시무룩해지죠. 부모님한테 부탁하고 싶어요. 그러지 마요. 아이가 슬퍼하잖아요.
밤늦게 공연 마치고 나오면 발라폰에 젬베에 짐이 많은데 택시가 안 태워줍니다. 나를 무서워하는 걸까요? 최악의 경험이라면 역시 지하철이죠. 빈자리에 내가 앉으면 옆자리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다른 데로 가버려요. 나한테 냄새 나는가 싶어 킁킁거려 보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그냥 내가 싫은가 봐요. 너무 마음 아팠어요. 내가 애니멀 아니고 사람이잖아요. 나는 슬픔과 분노를 다 가슴에 담아요. 나는 좋은 말을 해줘야 하는 젤리지만, 이런 일을 겪으면 나 역시 상처받아요. 그럴 때면 조용히 악기를 연주합니다. 내 마음을 가만가만 위로하죠.
외국인한테 뭐 도와준다고 하는데, 물건 주는 게 도와주는 거 아니에요. 마음 편하게 해주는 게 최고예요. 우리는 다 사람이잖아요. 블랙, 화이트, 옐로, 그런 색깔이 다 무슨 상관이랍니까.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옆 사람이 조금 낯설어도, 조금 불편해도 서로 참아주면 어떨까요.
그럼요, 인생 쉽지 않죠. 그럴수록 서로 받아들이고 나누고 살면 더 행복할 수 있어요. 나도 힘 보탤게요. 마음 아픈 일 있나요? 그럼 젤리를 찾아오세요. 어서요!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일꾼. 국경을 넘어와 새 삶을 꾸리고 있는 이주민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이 있다. 떠나온 사회와 살아내야 할 사회에 하고픈 말이 많지만 그 말은 발화되지 못한 채 눈동자에 잠기곤 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내 당사자 시점으로 전한다. 4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