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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투기판이 된 땅, 떠나지도 돌아오지도 못하는 농민들

등록 2021-05-07 20:11수정 2021-05-08 02:30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지난 4월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황산리에서 본 서해선 철도 안중역 공사 현장. 길 건너편 세 필지(총면적 2만6201㎡)짜리 밭은 한 농업법인이 일부 지분을 사들여 2016년부터 전국 각지로 지분을 쪼개 팔았다. 소유자가 각각 26명, 25명, 20명에 이른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지난 4월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황산리에서 본 서해선 철도 안중역 공사 현장. 길 건너편 세 필지(총면적 2만6201㎡)짜리 밭은 한 농업법인이 일부 지분을 사들여 2016년부터 전국 각지로 지분을 쪼개 팔았다. 소유자가 각각 26명, 25명, 20명에 이른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땅값 금값 됐슈. 얼마나 비싼데. 시골 사람은 땅 못 사.”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황산리에서 만난 한 농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산리는 흔한 카페나 편의점 하나 없는 조용한 농촌 마을입니다. 그런데도 평생 도시에서만 살아온 제게 ‘어딘가 낯선데 이상하게 친숙한’ 곳이었습니다. 이 마을의 첫인상을 비유하자면, ‘갓 지은 아파트에 부동산 업소만 딸린 텅 빈 상가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근에 가게라고 할 만한 게 없을 만큼 한적한 곳인데, 부동산 중개소만 유독 10곳이 넘었거든요.

안녕하세요. <한겨레>가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서 일하는 변지민입니다. 지난 3일치 <한겨레> 1면(<한겨레21> 제1361호)에 보도된 ‘‘투기밭’이 된 경기도 농지, 평택은 외지인 매수가 84%’(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993586.html) 기사를 취재하기 위해 평택시 서해선 안중역 공사 현장과 주변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경기도 농지가 진짜 농사보다 투기 목적으로 거래되는 현실을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최근 3년10개월간 경기도 농지 거래 16만4145건 중 농지가 속한 시·군과 매수인이 거주하는 시·군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10만5639건(64.4%)에 이르렀습니다. 경기도 안에서 외지인 매수 비율은 평택시가 84.2%로 가장 높았고, 평택시 안에서도 황산리는 무려 97%로 최상위권이었습니다. 실제 이곳에선 마을 진입로에서부터 부동산 업소가 외지인을 먼저 반겼습니다. 그리고 도시에서 흔히 볼 만한 현상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황산리 토지 평균가격은 최근 20년간 무려 7배 넘게 뛰었습니다.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특별경제구역의 하나인 황해경제자유구역 조성 등으로 평택시에 불어닥친 개발 바람이 고루 영향을 미쳤겠지만, 이 과정에서 특히 황산리 근처 서해선 안중역 개발의 영향이 컸습니다.

황산리 마을 주민들 이야기를 취재하며 ‘젠트리피케이션’이 떠올랐습니다. 낙후지역이 발전했는데 정작 원주민들이 쫓겨나듯 지역에서 밀려나는 현상 말이죠. 기획부동산을 비롯한 투기가 수년간 이어지면서 황산1리 농지 면적의 67.6%는 이미 외지인 손에 넘어갔습니다. 여러 이유로 황산리 주민 상당수는 소작농이 됐습니다. 농사지으려는 농민은 황산리 논밭을 사서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너무 비싸져서 타산이 안 맞거든요.

비슷한 ‘오버랩’은 또 있었습니다. 외지인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현지 주민의 신세가 한편으론 도시의 비정규직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최근 3년10개월간 외지인 농지 매수 비율이 96.5%인 현덕면 도대리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소작인이 농사직불금을 받으려고 임대차 계약서를 써달라고 하면 지주가 ‘당신 농사짓지 말아’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한테 준단 말이야. 내가 볼 때 직불금 받는 소작인은 50%도 안 돼요.” 땅 주인이 양도소득세를 감면받기 위해 자신이 직접 농사짓는다고 거짓 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아, 정작 농민은 정당하게 농사짓는 대가로 정부로부터 받아야 할 ‘공익직불금’을 못 받는다는 말이었습니다. 근로계약서 없이 일하다 노동법의 보호를 못 받는 수많은 프리랜서 노동자의 이야기가 떠오른 건, 우연일까요.

평택시 안중읍 삼정리에서 만난 이영수(65)씨는 “농촌이 도시화되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좋은 뜻은 아닐 겁니다. 기획부동산이 버스로 도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마을의 논밭을 사가는 모습을 봤다며 한 말이니까요. 농촌의 논밭이 도시의 아파트나 빌라처럼 거래되고 있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살지도 않을 거면서 주택을 여러 채 사들이는 행위나, 농사짓지도 않을 거면서 논밭을 사들이는 행위는 본질적으로는 비슷하다는 뜻도 담겨 있겠지요.

경기도 농지 문제를 들여다보자고 마음먹은 것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엘에이치) 직원들의 3기 새도시 투기 의혹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지켜보며 ‘엘에이치 직원만 처벌하면 공정성이 회복될까’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헌법과 법률에 농지는 농사짓는 사람만 소유할 수 있다고 적혀 있지만, 현실은 아득히 멀리 있습니다. 고위 공직자 청문회 때마다 ‘농지법 위반’은 단골손님입니다. 최근 3년10개월간 서울시민이 평택시민보다 평택 농지를 2배 많이 사들였습니다. 서울시민보다 평택시민의 농업인 비율이 49배 높은데 말이죠. 공직자는 걸리면 욕이라도 먹지만, 평택 농지를 사들인 ‘서울 농부들’은 걱정이나 할까요. 농촌 고령화와 맞물려 농지는 본래 목적을 잃고 차츰 ‘투기성 부동산’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마을을 지키며 농사짓는 어르신들이 떠나고 나면, 농지에는 정말 가격표만 남겠지요. 10년, 20년 뒤 도시민의 쇼핑몰이 된 농촌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요.

변지민 <한겨레21>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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