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이길보라 영화감독, 임명묵 작가를 지난 9일 서울 중구 한 모임공간에서 만났다. 지독한 경쟁체제와 대물림된 계층화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이들은 90년대생을 뭉뚱그려 ‘공정 세대’로 규정하는 것을 불편해했다. 최근 공정성 논란들에는 ‘선택적 공정’이란 지적이 나온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오늘날 20대는 집단적으로 억울하다.” <공정하지 않다: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에서 박원익·조윤호 작가는 이렇게 적었다. 일자리, 소득, 자산, 주거 문제처럼 긍정적인 지표에서 이들은 늘 가장 바닥 낮은 곳에 자리했다. 이전 세대들과 견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도 2030 청년 세대는 노동시장에서 최악의 경쟁에 내몰려 있다. 양질의 일자리 부족이 저소득으로 이어지고, 그사이 주택시장은 월세로 재편되면서 그럭저럭 살 집조차 구하기 힘겹게 되었다. 부모인 386세대의 지위가 대물림되는 사회구조는 더 단단해지고, 부자 또는 권력자 부모를 둔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사는 게 ‘게임의 룰’처럼 고착화하고 있다. “이건 어딘가 공정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청년들 사이에서 높아지는 이유다. 쌓여온 불만은 양질전환을 거쳐 분노 또는 증오로 변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1990년 세대’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들 청년 세대의 이야기를 들었다.
1990년대생은 힘겹다. 많은 이들이 20대 대부분을 취업준비생으로 보내고, 사회에 진출하더라도 ‘비정규직’ 딱지를 다는 경우가 많다. 서울연구원은 지난해 낸 보고서 ‘장벽사회, 청년 불평등의 특성과 과제’에서 90년대생들과 관련한 암울한 분석을 내놨다.
“자산 불평등의 정도는 20대가 30대보다 훨씬 심각했다. 2000년대 이후 좋은 일자리가 계속 줄어들어 청년들은 노동시장에서 극심한 경쟁으로 내몰렸다. 20대 실업률도 30대와 달리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20대 가구주의 주거 환경은 더욱 열악해졌으며 주거 부담도 크게 늘어났다.”
사회 구조가 경직화되면서, 90년대생은 부모로부터 경제력과 학력, 심지어 직업까지 대물림하는 구조에 갇힌 세대로 꼽힌다. 그중에는 더 나은 삶을 물려받는 이들이 있지만, 조그만 신분상자에 갇히거나 딛고 올라설 사다리마저 걷어차인 경우가 훨씬 많다. 부모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뛰어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보고서는 “경제활동을 하는 20대 청년 가운데 70% 정도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보다 낮아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한다.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탈출구는 오히려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 와중에 부동산 양극화,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사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 특혜 논란 같은 ‘공정성’ 논란도 잇따라 불거졌다. 이들은 모바일과 함께 태어난 세대답게 온라인에서 분노를 결집한 뒤, 사회에 분출한다. 화두는 공정, 주전장은 온라인 공간인 셈이다.
이들이 말하는 ‘공정’은 무엇일까. 또 이들이 분출했다는 힘은 어디까지 유효한 것일까. 그리고 ‘90년대생 세대’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최근 90년대생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주목받은 1990년생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지금은 없는 시민>, 한겨레출판)과 이길보라 영화감독(<당신을 이어 말한다>, 동아시아), 1994년생 임명묵 작가(<케이(K)를 생각한다>, 사이드웨이)를 지난 9일 서울 중구 한 모임공간에서 함께 만났다. 이들은 스스로 90년대생을 대표하거나, 자신이 속한 세대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90년대생 담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답을 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들의 이야기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90년대생들의 분노, 증오, 결핍이 주목받고 있다. 어디서 시작된 현상일까?
이길보라(이하 이길) “기성세대들이 ‘우리 때는 데모 다 하고도 직장 잘 들어갔다. 너희는 뭐 하는 거냐, 왜 짱돌을 들지 않는 거냐’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짜증나게 싫고, 화가 난다. 이전 세대들과 견줘 우리가 처한 현실에는 제대로 된 사회에 진입하기에 너무나 비좁은 문이 놓여 있다. 엄청난 경쟁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현실이 너무 다르다. 다른 선택지도 거의 없다 보니 일확천금을 노린다는 비판을 알면서도, 주식이랑 코인(가상화폐)을 하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놓고 ‘너네는 왜 그렇게 사니? 코인 말고 다른 거 하라’고 한다. 너무 이상한 일이다.”
임명묵(이하 임) “앞선 세대들이 고도성장을 거친 것과 달리 90년대생들은 저성장이 자연스러워진 사회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 이전 세대와 비슷한 삶을 유지하려면, 우리 세대는 훨씬 많은 경쟁과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언론이 계층 격차와 금·은·흙수저 차이에 주목하면서 90년대생들은 현실을 더 또렷이 확인하게 됐다. 불행과 결핍의 심화가 집단적 분노의 에너지가 된 것 같다.”
강남규(이하 강) “두분 의견에 동의한다. 덧붙여 언론이 90년대생들의 분노, 증오, 결핍을 소재로 기사를 쏟아내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정치권에서는 표심을 챙길 수단으로 이 부분에 주목하면서, 90년대생들을 대표하는 이미지처럼 자리잡게 됐다. 이렇게 재생산된 분노와 결핍이 다른 90년대생의 동조를 거쳐 주류적인 정서로 확대된 측면이 있다.”
화두는 공정, 주전장은 온라인
“대물림 못 받으면 선택지 적어
살아남기 위해 공정룰 요구
밥그릇 위한 선택 지적도 맞아”
‘공정성에 대한 예민함’은 90년대생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가뜩이나 삶이 힘겨운데 “공정한 과정과 정의로운 결과”를 말하던 문재인 정부가 잇따라 불공정 논란을 일으키자 집단적 분노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반면, 이들이 말하는 공정이 개인 또는 집단의 밥그릇 챙기기를 위한 명분의 하나로, 득실을 따져 달라지는 ‘선택적 공정’이라는 비판도 있다. 강남규 위원은 책 <지금은 없는 시민>에서 “공정하게 불평등한 나라, 그게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는 공정성 담론의 논리”라고 풀이했다.
―90년대생 하면 떠오르는 화두가 공정이다.
이길 “내 책 <당신을 이어 말한다>에서 ‘옆 사람과 비교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고 썼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제대로 된 사회에 진입할 문이 너무 좁아졌다. 가령 내 경우, 예술인 임대주택에라도 들어가려면 옆 사람과 가난을 비교해야 한다. 그래야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옆 사람을 탈락시키고 내가 임대주택에 들어가는 건 맞는 걸까. 임대주택에 지원조차 못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지금 시스템이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애초 더 나은 지위를 물려받은 이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겐 선택지가 거의 없다. 공정을 넘어 정의를 고민해야 한다.”
임 “지금 논의되는 공정이 껍데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인국공 사태) 등 최근 공정성 논란들이 논리적, 철학적으로 공정의 가치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만큼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줘’라는 감정적, 정서적인 요구에 가깝다. 우리가 너무 힘들고 불안한데, 기존 시스템은 못 믿겠으니 취업시험이라도 수치화해서 예측 가능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단어로 ‘공정’을 찾은 것이다. 정치권과 언론이 ‘얘들은 공정을 좋아하는구나’라고 취급해 ‘공정 세대’란 이름을 붙이면서 확대재생산된 거 같다. 그렇다면 시험 쳐서 점수만으로 평가하는 건 진짜 공정일까? 시험을 치는 과정에서 인적 자본을 만드는 데도 부모들의 지원이 들어간다. 이미 불공정하다고 판명된 사회적 시스템이 앞서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자기 이해와 무관한 것에는 굳이 분노하지 않는 ‘선택적 공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90년대생 세대가 실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동물권 등 주변 약자에 대해 정유라 사건, 조국 사태처럼 집단적 목소리를 내지는 않는 것 같다.
강 “90년대생이 공정을 말한다지만, 특혜의 대상이 됐을 때 이익을 내려놓으면서 공정을 말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자신의 이익을 찾는 과정에서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가치중립적이거나, 더 가치를 품은 듯한 단어로 찾아낸 게 ‘공정’이란 말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내 이익을 챙겨달라, 내가 노력했으니 대가를 받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90년대생들은 더 나은 위치로 진입할 문이 좁지만 그래도 안으로 들어갈 기회가 열린 세대이다. 그래서 더 강하게 공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길 “조국 사태나 정유라 문제 때도 보편적 공정이란 가치 때문에 싸운 것 같지 않다.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쟤들이 대물림을 하니까 내 파이가 없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선택적 공정이란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상대할 때도 평소에는 ‘오케이, 그건 알아서 하세요’라는 정도로 나이스하게 대한다. 그들이 내 걸 뺏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자기 파이를 잃게 되면 불같이 화를 낸다. 공정이란 프레임을 가져와서 밥그릇 싸움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대 내부 젠더갈등 격화
“평등 배웠는데 현실은 달라
메갈리아 통해 진영싸움 양상
언론·정치권이 확대재생산해”
젠더 문제는 90년대생들 내부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다. 지난달 부경대 지방분권발전연구소가 발표한 ‘2021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유권자 정치의식 조사’ 결과를 보면, 20대 유권자 셋에 하나(32.9%)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심하다고 느끼는 갈등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젠더 갈등’을 꼽았다. 성별에 따른 대우가 ‘전혀 공정하지 않다’고 답한 20대도 19.8%로 전 연령대에서 가장 높았다. 젠더 갈등이 부각되면서 ‘이대남’(20대 남자), ‘이대녀’(20대 여자) 같은 유쾌하지 못한 말도 유행하고 있다.
―90년대생 내부의 젠더 갈등은 왜 시작됐다고 보나?
이길 “어렸을 때부터 누구나 평등하다고 배웠다. 현실은 여성과 남성 문제에서도 책과 달랐다. 젠더 불평등 문제에 대해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키워온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생 사이에 젠더 갈등이 심하다고 하는데 이대남, 이대녀 문제만이 아니다. 그 위로 올라가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더 많은 여성들이 존재한다. 90년생이 도드라져보이는 것뿐이다. 여성들이 마이크를 쟁취하고, 발언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언론이 이대남, 이대녀를 자꾸 얘기해서 더 갈등이 심해지는 부분도 있다.”
강 “지금 20대 남성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험 성적 같은 데서 여성에 압도당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여성 지위가 과거보다 한결 높아졌다고 보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일부 남성들이 ‘상황이 이런데 여성들이 뭐가 꿀리는 게 있다고, 계속 약자라고 이야기하지?’라면서 부동의하고, 갈등의 원인이 된 것 같다. 2015년 여성혐오를 미러링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메갈리아’가 형성되면서 기저에 있던 여성들의 불만을 공개적으로 실천하는 커뮤니티가 처음 등장했다. 현실에서 남성과 여성의 위치는 평등하지 않지만 커뮤니티를 계기로 진영 대 진영의 싸움으로 비치게 됐고, 온라인 공간에서 남녀가 사이버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인식하도록 변질된 게 아닌가 싶다.”
임 “90년대생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함께 성장했는데, 젠더 갈등도 여기서 시작된 부분이 있다고 본다. 2009년 한 방송에서 여성 출연진이 ‘키 작은 남자는 루저다’라고 비아냥거린 전설적인 ‘루저 사건’이 있었다. 앞서 남성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김치녀, 된장녀라는 식의 여혐 서사를 벌인 적이 있다. 남성들이 주요 온라인 공간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반면, 여성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불만을 축적했다. 2015년 메갈리아 사이트가 등장했고, 이후 진영 간 대립으로 자리잡으면서 서로 피해의식과 피해 서사를 축적해 소통이 사라진 상황이 된 것 같다.”
―최근 ‘이준석 현상’도 ‘2030 여성차별은 현실에 없는 것’이라는 식의 반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을 부추긴 게 동력이 됐다. 90년대생 세대의 젠더 갈등이 악용되는 셈이다. 접점은 없을까?
임 “남녀 양쪽이 모두 피해자라고 얘기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당장 실마리를 찾기 쉽지 않은 문제다.”
이길 “정치권과 언론들이 이런 문제를 조장하는 것도 문제다. 여성과 남성을 딱 절반으로 50 대 50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여성 안에서만 봐도 다양한 성격과 규모의 페미니즘 운동이 산재해 있다. 그런데도 여성과 남성을 1 대 1 구도로 만들어서 갈등한다고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우리 사회가 상대방 얘기를 잘 듣지 않고, 잘 보지 않고, 잘 말하고 있지 않다. 학교나 사회에서 이런 훈련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고, 갈등을 해결할 시스템이 없는 것이다. 젠더 갈등이 우리 사회 다른 갈등과 유별나게 동떨어진 게 아니다.”
강 “비슷한 생각이다. 언론에서 젠더 갈등을 남성과 여성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져 진영 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우리 주변을 보면, 실제로 그런가? 일부 온라인 남초 사이트에서 남녀가 동등한 세력이 갈등한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언론이 이를 그대로 보도하면서 생기는 착시 현상인 것 같다. 어느 정도 젠더 갈등이 실존하는 것은 맞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글쎄… 그럴듯한 의견을 내보라고 하면, 당장은 패스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정치권에서는 90년대생들이 가진 분노의 힘을 새삼 주목하고 있다. 위력이 극명하게 드러난 게 지난 4·7 재보궐선거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90년대생이 대거 포함된 18~29살 사이 유권자 55.3%가 국민의힘에 투표하며 선거판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2019년 책 <공정하지 않다>에서 박원익·조윤호 작가는 “오늘날 20대는 집단적으로 억울하다”며 “90년대생들이 할 일은 세습자본주의와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90년대생들은 공정성을 화두로 캐스팅보트 구실을 하며 기성세대와 일전을 벌였다.
―90년대생 세대는 어떤 존재인가?
임 “사회·경제적 계층화가 심각해진 세대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도, 90년대생들의 경제력, 학력, 직업 면에서 계급 고착화는 심화된 것 같다. 한편으로 모바일과 함께 자란 정보화 세대라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 구분된다고 본다. 모바일 커뮤니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익숙한 세대여서 온라인에서 사회, 정치, 문화적인 여론을 만들거나, 불만을 잘 결집해 폭발시키는 특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대론적 특성이 칼로 베듯 나이대별로 나눠지는 건 아니다. 90년대생이란 특성을 가진 집단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들과 연속성이 있고, 어찌 보면 엑스(X)세대 때부터 등장한 트렌드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더 밀도 있게, 강하게 드러난 세대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이길 “저는 90년생이라 조금만 일찍 태어났으면 80년대생인데, 그렇게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세대론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90년대생 세대론을 얘기하지만, 그렇게 뭉뚱그려 정의된 프레임 안에 ‘저와 제 친구들, 우리들의 이야기’는 없더라. 그래서 세대론에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너네가 말하는 그런 세대론은 잘 모르겠고, 내가 좋아하는 걸 한다’는 태도가 이전 세대와 우리 또래들을 구분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90년대생으로 자기를 소개하지 않는 이들이 태반이다. 어떤 세대를 대표하는 데 관심도 없는 경우가 많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동료이자, 90년대생이라고 본다.”
강 “저도 이길 감독과 같은 나이고, 비슷한 생각이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가 ‘88만원 세대’로 분류됐다. 시간이 흘러 90년대생 세대론이 나오니까, 태어난 연도에 맞춰 이쪽에 포함됐다. 세대담론이란 게 인위적인 것이어서, 무 자르듯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다.”
정치권에선 최근 90년대생을 재평가하고 있다. 4·7 재보궐선거 뒤, 김웅 국민의힘 의원은 “이번 선거는 20대들이 국민의힘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온라인 공간에서 90년대생들이 이른바 ‘디지털 세력화’ 하는 양상을 띤다는 것이다. 집권여당에서는 송영길 대표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와 관련해 “집권여당이 국민과 청년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90년대생 세대의 힘에 주목하고 있다.
임 “온라인 커뮤니티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생각한다. 특정 사안이 벌어지면, 온라인에서 커뮤니티를 조직해 여론을 갑작스럽게 폭발시키는 능력은 탁월한 세대인 것 같다. 온라인에 워낙 익숙한 세대 아닌가. 친중 논란이 있었던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방영 폐지 요구를 관철시킨 건, 젊은층이 여러 커뮤니티를 이용해 한순간에 여론을 결집시키는 힘을 보여준 사례다. 다만 이런 게 90년대생이 정치·사회적으로 세력화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강 “정치권에서 필요하니까 만드는 말 아닐까. 90년대생들이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쉽고, 빠르게, 큰 규모로 모이는 것 같긴 하다. 예를 들어, 특정 사안에 대해 청와대 국민청원 총공(총공격: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사람들을 결집시켜 목적을 달성하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90년대생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더라도, 정치·사회적 힘을 과시하는 게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90년대생들은 조직이란 걸 거부하는 경향성도 보인다. ‘세력화’ 같은 말에도 거부감이 있다.”
이길 “90년대생들이 힘을 과시한다거나 세력화하고 있다는 건 이상하고 실체가 없는 말이다. 이전 세대들처럼 90년대생들이 오프라인에서 큰 규모의 시민단체를 꾸린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임 작가는 백수, 강 위원은 직장인, 저는 프리랜서다. 제 주변도 대략 그렇다. 세력화하려면 권력이 있어야 하는데….”
―많은 기성세대가 투기, 도박 정도로 인식하는 가상화폐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다른 것 같다.
이길 “제 주변에 저 빼고 거의 다 하는 것 같다. 기성세대들은 부동산 하고, 자산 증식을 했지만. 우리는 부동산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상화폐를 하면서, 대한민국 1%의 상류층이 되려는 게 아니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집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파트너와 함께 살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어느 정도 하고, 커피 한잔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여유 정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하나도 담보되지 않기 때문에 코인, 주식에 뛰어드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이 ‘얘들은 왜 이런 걸 하지? 투기나 도박을 좋아하나 봐’ 이런 얘기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최소한의 기본소득이나, 임대주택일지라도 살 집이 주어지면 옆 사람과 아득바득 경쟁하면서 살아갈까.”
청년세대 희망은 있을까
“구조 안 바뀌면 미래 어두워
집이나 기본소득이 있다면
이다지 아득바득 경쟁할까”
임명묵 작가는 책 <케이(K)를 생각한다>에서 90년대생의 상실과 관련해 “기득권 자본과 기득권 노동의 독점을 풀어 유연한 사회를 만든다면… (중략) 경쟁에서 탈락하고 불안감에 고통받는 다수도 성취감을 주는 경로를 찾을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이들에게 희망을 뿌릴 씨앗은 남은 것일까?
―사회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다. 90년대생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임 “90년대생들의 삶이 개선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솔직히 낙관적으로 보진 않는다. 특정 계층이나 세대에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점점 파괴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데 몰입하게 될 것이란 우려가 든다.”
강 “불합리한 사회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건 누구나 동의할 얘기다. 현실에선 구조를 바꿀 정치·사회적 세력을 세우지 않고는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 좋은 시스템의 작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바꾸는 일에 함께하자는 얘기를 하고 싶다.”
이길 “우리는 자기 노력만으로 내 집을 꿈꿀 수 없는 세대다. 우리가 꿈꾸는 게 행복주택이고, 저도 임대주택에 산다.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제발 파이를 나눴으면 좋겠다. 우리 세대한테 주어진 파이는 왜 이렇게 작게 정해졌을까. 우리한테 주어진 총량이 너무 적으니까 갈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회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을 기성세대와 정부가 함께 해야 한다.”
글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사진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