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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디지털성범죄 피해 다룬 기사·보고서가 ‘피해물’ 될 수 있다”

등록 2021-08-25 13:08수정 2021-08-25 13:46

친족 성폭력 생존자로 디지털성폭력 상담가 된 김영서 작가
“상세한 가해사실 전달, 모방범죄 부추겨”
“댓글에 피해물 정보 있을까 피해자는 벌벌 떨며 확인해”
김영서 작가.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김영서 작가.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지난 19일,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들의 행선지가 묘하게 겹쳤다. 이낙연 후보는 서울 중구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를 찾았다. 이재명 후보는 경기도 수원에 있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원스톱 지원센터로 갔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디지털성범죄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고 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불법촬영이 유행하는 곳은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며, 불법촬영물 시장이 형성돼 있는 국가도 한국 말고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김영서 작가는 첨단 기술을 숙주 삼아 날로 일상을 잠식해가는 ‘K-디지털성폭력’에 2년째 맞서고 있다. 친족 성폭력 생존 수기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이매진·2012)를 펴낸 작가이자, 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다. 그는 2019년 9월부터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상담도 하고 있다. 김 작가는 성폭력의 피해 당사자이자, 가해를 예방하는 교육자, 피해자를 돕는 지원자까지 성폭력 사건의 주요 주체를 두루 거쳤다. 가장 내밀한 공간인 ‘집’과 극도로 광범위한 공간인 ‘온라인’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직접 겪거나 곁에서 지켜봤다.

지난 23일 서울의 한 스터디 카페에서 김영서 작가를 만났다. 그는 “디지털성범죄 피해는 ‘종결’이 없고,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피해자를 끝나지 않는 고통의 ‘무한궤도’ 속으로 몰아넣는다”고 했다. 피해자에게는 ‘유포’ 가 가장 큰 고통이기에 언론과 포털이 특히 더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도 했다. 다음은 김영서 작가와의 일문일답.

-다른 성폭력 피해자와 달리,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만이 겪는 특별한 고통이 있을까?

=내가 겪은 친족 성폭력 피해도 정말 심각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상담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피해는 누군가에게 찍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정도로 디지털성범죄 피해는 고통스럽다. ‘종결’이라는 게 없다. 가해자를 처벌해도 불법촬영물이 누군가의 컴퓨터에 남아있다가 재유포되기 시작하면 피해자는 이전과 똑같은,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피해를 처음부터 다시 겪는다. ‘무한궤도’에 들어서는 것이다. 나는 가해자가 사망했고 피해가 20년 전 일이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이 옅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어느 정도는 시간이 약이었다. 반대로 디지털성범죄 피해는 시간이 독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이 보고, 유포하고, 소유하게 된다. 게다가 불법촬영물은 다운로드 숫자가 뜨지 않나. 디지털성범죄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범죄이고 트라우마다. 가해자가 명확했던 나와 달리, 영상을 시청, 소지, 유포한 가해자가 불특정 다수고 너무 많다는 점도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만이 겪는 고통 중 하나다.

-디지털성범죄 가해, 피해 연령이 점점 어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현장에서 이를 체감하나?

=처음 상담 시작했던 2년 전에는 피해자가 10대 후반 20대 초반이었다. 요즘은 10대 초반도 있다. 통계도 이를 보여준다. 디지털성범죄 가해자의 약 70%, 피해자의 90%가 1020세대다.(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이들에게 스마트폰은 오장육부 같은 ‘장기’나 다름없고, 의미있는 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적으며, 심심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들이 다수다. 그러다 보니 온라인 그루밍(친근한 사람으로 가장해 피해자를 유인한 뒤 성착취하는 것)에 노출되는 아이들이 생기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디지털성범죄 피해의 특성과 피해자의 대부분이 1020 세대인 걸 고려할 때, 언론이 이를 다룰때 특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나?

=언론이 제공하는 사소한 정보가 ‘검색어’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유포’다. 언론이 가해 사실을 세세하게 보도할수록 피해자에 대한 여러 정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 정보가 곧 검색어로 활용된다. 디지털성범죄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유사한 불법촬영물의 조회수와 다운로드수가 출렁출렁한다. 그때마다 피해자는 초주검이 된다.

언론은 가해자가 얼마나 악랄한지 보여주기 위해, 혹은 범죄수법을 알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가해 사실을 자세하게 보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동의할 수 없다. 나쁜 사람의 나쁜 짓을 알려준다고 범죄가 예방되나? 모방범죄를 부추길 뿐이다. 정작 피해자인 아이들은 뉴스 안 본다. 피해 사실을 극사실주의로 묘사한 기사는 피해자에게 글로 된 피해물을 남기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도 지양해야 한다.

피해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일 대신 언론이 해야 하는 건 어른(부모, 교사 등)에게 디지털성범죄 피해가 발생했을 때 대처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절대로 아이를 야단치지 말 것’, ‘자녀의 불법촬영물을 직접 보지 말 것’, ‘잘못은 가해자가 했다는 걸 명심할 것’ 등이다. 그래야 아이가 어른을 믿고 피해를 터놓을 수 있다.

또 하나, 기사나 보도자료를 배포하기 전에 피해자에게 미리 보여달라. 언론이나 기관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정보여도 피해자에 대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했던 한 피해자도 같은 의견을 전해왔다. ‘자신이 특정될 수 있는 팩트(사실)를 미리 걸러낼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얼마 전 이 과정을 소홀히 여겨 문제가 됐던 적이 있다. 지난 6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가 한국의 디지털성범죄 실태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에 한 인터뷰 대상자가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정보를 노출했다. 피해자는 새벽에 뉴욕 본부까지 전화해 항의해야만 했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디지털성범죄 피해자가 바라는 정책이 또 있나?

=“힘이 되는 댓글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기억에 남는 건 악플이다. 무엇보다 기사 댓글에 누군가가 내 피해물에 대한 정보를 언급할까 봐 마음 졸이며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내가 상담했던 한 피해자가 전해온 말이다. 포털 사이트 성범죄 기사 댓글난에는 피해자 행실을 탓하는 2차 가해성 발언이 너무 많다. 또 불법촬영물 정보 공유 창구로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실제 유명 커뮤니티에서는 ‘○○사진 있으신 분?’ 처럼 불법촬영물 관련 정보를 요구하는 댓글이 쉽게 발견된다. 악플로 인한 연예인의 자살이 반복되자 네이버, 다음은 이미 스포츠·연예 기사 댓글난을 폐지했다. 포털은 불법촬영물 피해자가 죽어야만 성범죄 기사 댓글난을 닫을 것인가.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 이낙연, 이재명 후보 모두 디지털성범죄 근절 대책을 내놨다. 두 사람이 공약 중에 공통으로 빠져 있으나, 무엇보다 시급한 정책이 있나?

=경제적 지원이다.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피해자의 상당수가 가까운 지인을 통해 불법촬영물이 유포됐다는 걸 알게 되고, 직장도 그만둔다. 누가 언제 내 불법촬영물을 보거나 유포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회사 생활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범죄피해자지원금제도에 ‘경제적 지원’제도가 있으나 그 대상은 주로 강력범죄 피해자다.(법무부 홈페이지에는 ‘살인·강도·강간·폭행·방화 등 강력범죄로 인해 신체적 또는 정신적 피해를 당한 범죄피해자를 지원한다’고 되어있다. <한겨레>가 24일 법무부에 문의했더니 디지털성폭력도 ‘강력범죄’에 포함돼 지원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결국 기댈 곳은 정부의 긴급복지 생계지원이나 서울시 긴급복지지원제도인데, 두 사업 모두 주민센터나 시군구청을 찾아 사정을 설명해야한다. 피해자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불법촬영물로 인한 피해 사실을 말해야 하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대부분의 주민센터는 공간이 협소해 상담 공간이 따로 마련된 곳도 거의 없다고 알고 있다. ‘유포’가 가장 두려운 피해자가 개방된 장소에서 피해를 말할 수 있겠나.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면 바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국가가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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