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로 인한 손해를 산정할 수 없어 지원이 어렵습니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 ㄱ씨는 올해 초 법무부에 경제적 지원을 문의했다가 이런 답변을 들었다. 법무부는 ‘범죄피해자 경제적 지원 제도’를 통해 △살인·강도·강간·폭행·방화 등 강력범죄로 인해 △신체·정신적 피해를 입은 피해자에게 △심리치료비 등 치료비, 생계비, 학자금, 장례비 등을 지원한다. 법무부는 이 ‘강력범죄’에 디지털 성폭력도 대외적으로 포함된다고 밝혔지만, 막상 실무자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 ㄱ씨는 “언제 어디서 나를 찍은 불법촬영물이 유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는 회사에 다닐 수 없었다. 내 잘못이 아닌, 범죄로 인해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는데도 국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다니 절망스러웠다”고 했다.
주요 범죄 피해자의 일상 복귀를 지원하는 국가의 사회안전망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사실상 배제되어 피해자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 증가 추세는 가파르다. 경찰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사이버 성폭력 발생 건수는 4831건으로, 전년도 2690건에 견줘 79.6% 증가했다. 같은 기간 피해자도 크게 늘었다. 여성가족부 산하 기관인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운영하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피해자 지원 건수는 2019년 10만1378건에서 2020년 17만697건으로 68.3% 늘었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심리·법률·삭제 지원 제도를 운영하지만, 생계비 지원 등은 하지 않는다.
법무부는 일반
범죄피해자를 대상으로 재정 지원도 가능한 범죄피해자 지원 제도를 운영하지만,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는 여기서도 수혜자가 되긴 어려워 보인다. 최근 <한겨레>가 법무부를 통해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범죄피해자에게 지원한 경제지원 내역을 확인한 결과, 법무부가 2019~2020년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에게 제공한 경제적 지원은 총 3억6369만원이었다. 같은 기간 전체 지원금액 188억6354만원의 1.92%에 불과하다. 이는 2019년 발생한 전체 강력범죄(3만5066건) 가운데 디지털 성폭력이 20.95%(7347건)에 달하는 실태(대검찰청 ‘범죄분석’)만 봐도 극명히 대비된다.
법무부의 또다른 지원 경로인 검찰청 피해자지원실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규모도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사각지대에 놓인 실태는 다른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와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는 지난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을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50명 가운데 경제적 지원을 받은 피해자는 9명(18%)에 그쳤다. 나머지 41명은 △제도 자체를 몰라서(27명·65.8%) △해당자가 아니라고 해서(6명·14.6%) △절차가 복잡해서(3명·7.3%) 지원받지 못했다고 했다. 법무부는 누리집에서 ‘살인·강도·강간·폭행·방화 등 강력범죄’ 피해자에 대해서 경제적 지원이 가능하다고 안내하고 있을 뿐, 디지털 성폭력은 따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운영하는 긴급생계지원 제도도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가 의지할 만한 제도로 보기는 어렵다. 정부와 지자체는 “갑작스럽게 생계 곤란 등 위기 상황에 부닥쳐 긴급한 도움이 필요한 자”를 대상으로 긴급생계비 지원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생계 곤란’ 사유에 ‘디지털 성폭력’은 없다. “가정구성원으로부터 가정폭력 또는 성폭력을 당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서울시의 긴급복지지원제 역시 대상을 “가정폭력을 당해 가구구성원과 함께 원만한 가정생활을 하기 곤란하거나 가구구성원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박윤숙 한국성폭력위기센터 소장은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는 그 피해 특성상 가족에게도 도움을 구하기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퇴사하거나 심지어 회사로부터 퇴사를 권유받는 사례도 있다. 범죄 피해로 인해 생계 불안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국가가 범죄에 책임지는 차원에서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별도 경제적 지원 제도를 운영해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성범죄 피해자들은
일상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로 ‘경제적 지원’을 꼽는다. 하지만 장벽은 높아 보인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여가부가 기획재정부에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 제도 예산편성을 요청해도 기재부의 ‘중복성’ 검토를 통과할 가능성은 낮다. 법무부가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에게 제도를 충분히 안내·홍보하고, 법무부·여성가족부 간 연계를 강화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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