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카’를 ‘불법촬영’이라 부른다. ‘음란물’을 ‘성착취물’이라 한다. <한겨레>가 2019년 11월 텔레그램에서 이뤄진 디지털 성착취 실태를 전한 뒤 목격한 변화들이다. 시민의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부터 관련 정책 수립과 법의 제·개정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폭도 넓었다. 하지만 성범죄의 실질적 감소와 피해 회복이라는 그림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신고·수사·재판 그리고 피해자 지원 등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이 적잖은 탓이다. 그 단계별 어떤 피해자의 고통도 소소할 수 없다. 하지만 관심은 천차만별이다. 덜 주목받았던 피해의 틈을 세세히, 계속해서 조명하려는 까닭이다.
“제도는 있는데, 제도까지 가는 ‘길’이 없는 느낌이에요.” 친족성폭력피해 생존자인 단단(활동명)씨는 성범죄 피해자 지원제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정부는 성범죄 피해자에게 법률·의료·주거 등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여태 단 한 번의 정부 지원도 받아본 적 없다. 단단씨만 운이 나빠 정부 지원에서 소외된 건 아니다. 그는 “함께 활동하는 생존자들 중에서 정부 지원을 받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경찰에 신고를 해도 피해자 지원기관을 연계해 주기보다는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경우가 잦고, 겨우 지원기관을 찾아도 상담가의 의지나 역량에 의해서 안내받는 정보의 편차가 큰 편”이라고 했다.
제도에 가닿는 길이 보이지 않으니, ‘국민청원’에 길을 묻는 피해자도 있다. 지난 7월1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성폭력 피해자인 제가 가해자와 동거 중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서울에 사는 19살 청소년이라고 소개한 청원인은 수년간 친오빠로부터 성희롱·성폭행 피해를 당했고, 지난 2019년 오빠를 경찰에 신고해 재판 중인데도 아직도 한집에 살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 게시글이 29만여명의 동의를 받자 여성가족부는 “피해 청소년의 의사를 신속히 확인해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입소, 심리상담, 의료 및 법률지원 등의 서비스를 지원하여 피해 청소년이 하루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그 뒤 청와대는 청원인이 정부 지원 시설에 입소해 맞춤형 보호·지원 조치를 받았다고 전했다.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 헌법 30조는 범죄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보호·지원을 의무로 규정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법률, 의료, 경제, 주거 등의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위원장 변영주·전문위)는 법무부·경찰청·여성가족부가 각각 따로 시행하는 성범죄 피해자 지원제도가 25개에 달한다고 했다.
문제는 ‘접근성’이다. 경황없는 피해자가 각 부처가 어떤 지원 사업을 하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경찰(피해자전담경찰)이나 상담가의 안내가 없으면 길을 잃기 쉽다. 제도를 겨우 찾아도 지원을 받으려면 무슨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지 알아보는 것만도 버거운 수준이다.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 활동가로 일하는 ㄱ씨는 “법무부와 경찰청에 지원을 신청한 한 피해자가 (제도를) 알아보다 지쳐서 ‘이럴 줄 알았다면 신청 안 했을 것’이라 말할 정도”라며 “제도가 일단 복잡하고, 구비 서류도 까다로우며, 여러 기관에서 반복적으로 피해를 말해야 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신청 ‘과정’ 자체에서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실제 지난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와 <닷페이스>가 디지털성폭력 피해자 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정부 지원을 받았다는 응답은 18%(9명)에 그쳤다. 나머지 41명은 △제도 자체를 모른다(27명, 65.8%), △해당자가 아니다(6명, 14.6%), △절차가 복잡하다(3명, 7.3%) 등의 이유로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피해자가 ‘지원제도’를 찾으면 다시 높은 벽에 맞닥뜨린다. ‘신청’은 각 부처에 따로 해야 한다. 예컨대, 법무부에서 생계비를 지원받고, 여가부가 운영하는 보호시설을 이용하려면 별도의 지원 신청서를 작성하고, 각기 다른 구비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심지어 같은 법무부 내에서도 치료비·거주이전비·경제적 지원을 받으려면 3개의 각기 다른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활동가 ㄱ씨는 “특히 법무부 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온라인상에 지원서 신청 양식을 공개하지도 않고, 활동가가 문의를 해도 ‘당사자가 직접 전화해야 한다’고 하는 등 피해자 본인이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
이런 방식은 신원 노출을 우려하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에게 특히 불리하다고 활동가들은 말한다.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 활동가 ㄴ씨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여러 기관을 직접 방문해 피해사실을 반복적으로 알리는 것 자체가 불법촬영물 유출이나 신원 노출 가능성을 높인다고 느낀다”며 “피해자가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한 곳에서 지원 신청서를 받고, 이를 각 부처에 연계하는 ‘원스톱 창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피해자의 어려움을 반영해 전문위도 지난 10월 이런 내용을 담은 ‘성범죄 피해자 원스톱(ONE-STOP) 지원’을 정부에 권고했다. 전문위는 “현재 법무부·경찰·여가부 등에서 성범죄 피해자 지원을 하고 있으나, 일원화한 지원 체계와 홍보 부족으로 피해자가 어디에 어떤 지원을 신청해야 할지 알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통합 안내 책자를 만들고, 한장의 통합 신청서만 작성해도 각 부처별로 나눠진 지원제도 신청이 가능하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법무부는 해당 권고안을 사회장관회의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는데 원론적이나마 찬성 입장을 밝힌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권고안의 취지에 큰 틀에서 공감하고 있다. 실무적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면 참여하겠다”고 했다.
전문위의 ‘성범죄 피해자 원스톱 지원’ 아이디어가 ‘피해자의 정보 접근권’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환기했으나 차후에 실무 차원에서 섬세하게 다듬는 과정은 필요하다는 의견은 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현재 부처별로 산발적으로 지원되는 제도를 일목요연하게 체계화해 피해자에게 제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며 “다만 피해자에게 필요한 건 ‘정보’뿐만 아니라 ‘안내’다. 예를 들어 최초로 피해자를 대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경찰이다. 그런데 경찰이 소상한 안내를 할 수 있을지, 받은 피해자 정보를 잘 관리 연계할 수 있을지 우려가 드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활동가 ㄱ씨는 “각 부처 신청서를 통합한 ‘종합 신청서’가 사용되면 결국 법무부가 지원 심사를 맡게 되고, 그렇게 되면 형사사건화 되지 않은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은 (지원에서) 소외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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