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웬디 갈라르사. 국제앰네스티 제공
“Wake Up!(일어나세요!)” 여성을 향한 폭력에 맞서다 되레 목숨을 잃을 뻔한 멕시코의 웬디 갈라르사의 일성이다. 정부가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한 조약에서 탈퇴해버린 터키, 국가가 임신중지권리를 제한하고 성소수자 혐오에 나선 폴란드 등 세계 곳곳에서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만큼 그에 대한 반작용도 거세다. <한겨레>는 그 반작용 속에서도 자신을 걸고 맞서 싸우는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를 좇는다.
“아직도 그 날의 공포를 생생하게 기억해요.”
국내에선 신혼여행지로 잘 알려진, 멕시코의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칸쿤. 어떤 이들에겐 전쟁터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폭력에 저항하려는 사람들은, 낙원 칸쿤에서, 시위를 벌인다.
“탕!”
2020년 11월9일. 총성과 함께 웬디 갈라르사(30)의 삶은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그때 저도 페미사이드(여성 살해)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날 갈라르사는 칸쿤에서 열린 페미사이드 저항 시위에 나갔다가 총에 맞았다. 시위 진압 경찰이 발포한 것이다. 이후 웬디는 젠더폭력에 더불어 공권력과도 싸워나가기로 결심했다. 경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전세계에 멕시코 여성이 겪는 폭력 실태를 알리고 나섰다. 이전까지 칸쿤의 한 보육종사자였을 뿐인 갈라르사와 지난 9일 서울 종로에 있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화상 인터뷰했다.
“제가 겪은 일들은 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폭력을 마주하고 있는 멕시코 여성들 모두의 문제다.” 웬디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해석한다. 멕시코는 여성 살해·폭력이 만연하다. 멕시코 911 긴급전화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여성 폭력 사건 신고 전화는 26만건에 달한다. 같은 해 멕시코에서 살해된 여성 수는 3723명이다. 웬디를 비롯한 멕시코 여성들이 페미사이드와 여성 폭력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이는 이유다. 웬디는 “여성이 사라지고 살해되는 일은 멕시코에서 흔한 일”이라면서 “여성들이 요구하는 것은 ‘여성을 향한 폭력을 없애라’ ‘여성 폭력 가해자를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이다. 우리의 시위는 여성이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웬디 갈라르사가 지난 9일 <한겨레>와 화상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터뷰 영상 갈무리
하지만 멕시코에서 집회는 또다른 위험을 각오하는 일이다. 공권력이 시위대에 가하는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라르사는 고작 시위행진 중 경찰의 총을 맞았다. 지난해 칸쿤에서는 알렉시스라는 여성이 실종됐다가 시신으로 발견됐고, 페미사이드 사건이란 걸 알게 된 여성들이 11월9일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였다. 갈라르사는 “시위는 분명 평화적이었지만, 시위대의 행진을 가로막는 시청 앞 나무판자를 치우자 경찰들이 실탄을 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총을 한 발 맞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병원에서 확인한 총상은 두 군데였다. 경찰은 발포에서 멈추지 않았다. 갈라르사는 “경찰에게 폭력도 당했는데, 총상 때문에 아픈 건지 맞아서 아픈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시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던 게 생각난다. 그날 느낀 공포가 지금도 계속 맴도는 것 같다”고 했다.
멕시코와 한국 사이 거리는 1만2000㎞. 그 거리만큼 두 나라의 성불평등지수(유엔개발계획이 발표하는 성불평등 지수로 0이 완전 평등, 1이 완전불평등) 격차도 크다. 지난해 한국은 0.06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군에서 유럽국가들에 이어 11번째인 반면, 멕시코는 0.322로 OECD 가운데 꼴찌였다. 하지만 여성 폭력·살해에 대한 사회의 대응 그리고 여성 인권 향상에 대한 반발(백래시)에 있어서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멕시코에서 여성 폭력이 만연한 이유로 수사기관의 부실 대응이 첫손에 꼽힌다. 많은 여성들이 살해되고 있지만 수사체계는 열악하고, 사법·치안당국의 젠더적 관점도 결여되어, 사건의 진상조차 밝혀지기 쉽지 않다. 갈라르사는 “피해자 가족들이 경험하는 고통 중 하나는 분노다. 수사기관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피해자 가족이 직접 수사에 나서기도 한다. 여러 정부 관계자에게 수사 청원을 하다 지친다. “결과적으로 처벌 없이 사건이 종료되는 일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에 여성을 죽여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란 메시지를 준다. 여성 폭력 사건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라는 갈라르사의 설명과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반복해 지적한 젠더폭력 문제가 다르지 않다.
여성 폭력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건 정치권 또한 마찬가지다. 갈라르사는 “연이은 페미사이드 사건 탓에 최근 여성 인권 운동이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은 묵묵부답이다. 특히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우리의 시위가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여성 인권 시위에 ‘폭력시위’라는 프레임을 씌워 범죄화하려 한다”고 했다. 경찰이 시위 여성을 향해 총을 쏠 수 있었던 이유다. 갈라르사에게 총을 쏜 이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처벌받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 일부 남성들의 백래시는 심각하다. 지난 한 해 동안 여성 유명인들이 페미니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온라인상에서 공격을 당하는 일이 수차례 발생했고, 정부 기관과 기업이 홍보물 이미지에 특정 손가락 모양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남성혐오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일부 남초 커뮤니티의 황당한 주장 탓이었다. 정치권은 오히려 그들의 확성기가 되어 줬다. 안티 페미니즘을 주요 선거 전략으로 내세웠으며, 젠더폭력 근절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페미니즘 선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앞서 국내에서는 지난 한 달 사이 교제살인, 스토킹 살인 등 페미사이드로 볼 수 있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한 바 있다.
갈라르사에게 이같은 상황을 전하자 곧장 이렇게 반응했다. “와우!(Wow)” 멕시코에서도 페미사이드 사건에 대해 ‘왜 단순한 살인 사건을 젠더 문제와 엮느냐’는 공격이나 백래시 진영이 여성 폭력에 저항하는 시위에 잠입해 욕설을 하는 등의 폭력적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갈라르사는 말했다. “정말 부정적인 의미에서 대단히 인상적이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같은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니.” 그는 이어 “한국과 멕시코의 시민들은 같은 가부장제 사회에 살고 있고, 이런 가부장제 시스템은 수백년, 수천년 동안 여성을 향한 폭력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왔다. 이제는 남성들도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마주하고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강을 되찾아가는 갈라르사는 각종 폭력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여성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남겼다. “목소리를 높이세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힘을 모아야 해요. 힘을 모아 함께 살아남고 서로를 살려야 해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여성의 시대이고, 만약 혁명이 있다면 그건 여성의 혁명일 겁니다.”
국제앰네스티를 통해 누구나 웬디 갈라르사에게 연대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국제앰네스티는 지난달 26일부터 세계 최대 규모의 인권 운동 ‘편지쓰기 캠페인 2021’을 진행하고 있다. 2001년 처음 시작된 이 캠페인은 100명이 넘는 사례자를 고문, 괴롭힘, 부당한 구금 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한 바 있다. 편지 쓰기 캠페인은 국제앰네스티 누리집(amnesty.or.kr)에서 참여할 수 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