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추진은 일단 미뤄졌다. 지난 4일 정부서울청사 여성가족부 복도 앞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https://bit.ly/319DiiE
‘여성가족부 폐지.’
지난 1월7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이준석 당대표와 갈등을 빚다 극적으로 화해한 다음날 오후 페이스북에 올린 공약이다. 두 단어, 일곱 글자에 불과한 이 공약은 여성정책 76년 수난사의 정점을 찍었다.
원래 윤 후보의 여가부 공약은 폐지가 아니라 양성평등부로 개편하는 것이었지만 이 대표의 조언을 받고 이대남(20대 남성) 표심을 겨냥해 바뀌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여가부 폐지 근거를 종합하면 ‘구조적 성차별은 없고, 여가부는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대선 직후 포털사이트에는 ‘여가부가 진짜 폐지되느냐’고 묻는 질문이 폭발적으로 올라왔다. 여가부의 지원을 받던 성폭력 피해자, 가정폭력 피해자, 학교 밖 청소년들의 다급하고 절박한 외침이었다. 지난달 30일 한국여성학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성인지예산네트워크가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건물에서 연 ‘여성가족부 폐지론 진단과 성평등 정책 정부조직 개편 방안’ 토론회장엔 전직 여성가족부 장관이 두명이나 방청석을 지켰다. 2005~2008년 여가부 수장이었던 장하진 전 장관은 예정에 없던 발언을 했다. “여성가족부는 부처로 있어야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었다. 14년 전에 겪은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어 참담하다. 수십년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리지 말아달라.” 황정미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은 “여성가족부 21년의 역사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취급받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1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 윤 당선자 페이스북 갈무리
여성가족부의 ‘기원’이라 할 한국의 근대적 첫 여성정책 전담 기구는 76년 전인 1946년, 해방 직후 미군정 법령으로 설치한 보건후생부 부녀국(초대국장 고황경)이다. 기구의 위상은 불안정했고, 여성 문제는 독립된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부녀국은 일제강점기 총독부 위생과가 담당한 공창관리 업무를 승계했고 1947년 공포된 공창폐지령 업무를 맡았는데 그마저도 예산이 부족했다. ‘창기’와 포주들의 완강한 반대와 집단행동에 부닥치기도 했다. 게다가 정치적 임무까지 띠었다. 부녀국은 여성단체 등록, 관리를 맡아 우익 여성단체와 연계했으며 좌익 여성단체를 약화시켰다. 정부조직 개편이 있을 때마다 부녀국은 존폐 기로에 섰다. 예산을 따놓으면 다른 국에서 빼앗아가는 등 무시를 당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해방 후 초기 국가기구의 형성과 여성(1946~1960)’, 황정미, 2002) 부녀국은 박정희 집권기인 1963년 부녀아동국으로 명칭이 변경됐고 여성정책보다 출산억제정책 등 인구관리에 집중하게 된다.
1960~70년대 보수적 여성단체들은 거의 매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여성부 설치를 건의했다. 1975년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해’는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해 멕시코시티에서 연 세계여성대회에는 외교관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하던 홍숙자(전 세계여성단체협의회 회장, 1987년 첫 여성 대선 후보)씨가 참석했다. 그는 “여성 대표라고 한복을 떨쳐입고는 말 한마디 못한 채 국제대회장을 서성이는 일이 허다했을 때, 집 팔아 여비를 마련해 외국의 여성운동가들을 만나고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고 <한겨레>에 말했다.
국내 여론은 싸늘했다. 198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연 유엔 여성대회에 다녀온 여성대표단은 “유엔 남성대회도 있느냐”, “남성부도 있어야겠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보건사회부 내 부녀아동국을 가정복지국으로 개편하여 ‘부녀’(여성)란 말을 아예 떼버렸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독재정권 시절 정책 대상으로서 ‘여성’은 국가 목표에 동원되는 존재였다. 국가는 여성을 발전의 도구로 인식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도 여성 인권 향상이라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국제적 압력 속에 마침내 한국은 1983년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에 서명한다. 1991년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된 뒤 정부는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와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국가리포트를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했다.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서 마침내 ‘여성의 성주류화’가 주요 전략으로 채택되었다. 모든 정책에서 성평등적 관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행사엔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가 이례적으로 참석했고 정부가 여성정책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초대 부녀국장 일행의 지방순회. 보건사회부, 1947년. <나는 대한민국 경남여성>에 실린 사진이다.
여성부 설립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 논의는 시작했지만 정치적 저울질과 간보기가 계속됐다. 노태우 집권기인 1988년, 선거 공약이었던 최초의 여성정책 장관기구로서 정무장관 제2실이 설치되었다. 정원은 단 20명. 여성뿐 아니라 노인·청소년 문제를 아울렀으며 올림픽을 앞두고 도심청결운동을 주관하는 등 국민 동원의 구실까지 맡았다. 1989년 예산은 불과 10억34만8천원. 정부 총예산의 0.005%, 2만분의 1에 그쳐 전시행정이란 비판이 터져 나왔다. 1990년 노태우는 정무장관 제2실에 국가발전을 위한 ‘제2의 여성운동’을 지시했다. ‘새생활 운동’이라는 과소비 추방 운동이었다.(‘한국 여성정책담당 중앙행정기구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원시연, 2006)
김영삼 정부는 여성부 설립 추진을 약속했지만 실제 이행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도 처음부터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대선 공약이었던 여성부 신설은 아이엠에프(IMF) 경제위기를 빌미로 인수위원회에서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여성계의 반대 끝에 정무장관 제2실이 폐지되고 1998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설치됐다. 여성부가 만들어진 데는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 윤후정 초대 여성특위 위원장, 박영숙 전 평화민주당 부총재 등 여성 원로들의 역할이 컸다. 김 대통령은 2000년 1월3일 새천년 신년사에서 여성부 설립 의지를 밝혔는데,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성 표를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2001년 1월 처음으로 여성부가 독립 부처로 출범했다. 여성정책 수립과 총괄, 남녀차별 금지, 여성인력 강화 등의 업무를 맡았다. 비로소 여성을 국가 발전의 도구로 보는 인식과 ‘요보호 부녀자’ 문제를 뛰어넘은, 성평등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강조하는 여성 부처가 처음 설치된 것이다. 하지만 1국 3실 정원 102명, 예산 300억원의 초미니 부처였다. 초대 장관은 여성운동가 출신으로 2000년 비례대표 의원이 된 한명숙씨가 임명됐다.
노무현 정부의 여성부는 한국 여성정책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두드러진 정책을 수행했다. ‘지칼’이라는 별명에서 보듯, 저돌적인 추진력을 가진 지은희 여성부 장관과 파격을 두려워하지 않던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공조는 호주제 폐지를 뼈대로 한 민법 개정, 성매매특별법 제정 등 전무후무한 여성정책 수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언론과 여론의 엄청난 백래시(반격)가 있었다. 특히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싸고 남성의 성욕이 원초적 본능이라는 주장과 풍선효과 때문에 정책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 생존 기반을 잃게 된 성판매 여성들의 시위가 신문 지면을 뒤덮었다.
여성정책은 진보와 퇴보를 거듭했다. 저출산의 위기감과 이혼율 증가로 가부장적 가족 위기 담론이 거셌다. 2004년 건강가정기본법이 통과되면서 여성정책은 가족 유지나 인구 정책으로 흡수돼 공존했다. 같은 해 영유아 보육 업무가 복지부에서 여성부로 이관됐다. 1999년 가까스로 제정된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은 2005년 사라졌다. 성차별 개선 업무가 국가인권위원회로 이관되면서다. 여성정책은 축소되고 그해 여성부는 여성가족부가 됐지만 폐지론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전직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부처 존폐나 통폐합 논란이 나왔고 그때마다 조직 개편안을 새로 마련했다”고 <한겨레>에 말했다. 2007년 12월 대통령 당선 직후 이명박 정부 인수위는 여가부 폐지를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여성·노동계, 야당의 강력한 반대로 초미니 ‘여성부’로 조직을 축소하는 데 그쳤다. 그러던 2010년, 부처 업무를 조정하면서 여성부에 다시 가족·청소년 업무를 이관하고 여성부는 ‘여성가족부’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여성부는 설립 직후부터 홍역을 앓았다. 2001년 2월 개설된 누리집 자유토론장은 언어폭력과 비방글로 넘쳤다. 4월 남녀차별개선위원회가 교수들의 회식 자리 성적 폭언 사건 등을 성희롱으로 인정하자 ‘무서워서 여자랑 일하겠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1999년 폐지된 군가산점제를, 2001년 생긴 여성부가 추진했다는 루머도 돌았다. 여성부가 여성 성기를 닮은 과자(죠리퐁), 전조등이 남성 성기를 닮은 자동차(쏘나타3), 성행위를 닮은 게임(테트리스) 판매를 금지했다는 루머가 10년 이상 퍼져 잊을 만하면 포털사이트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 2020년엔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마인크래프트’가 19금이 되었는데, 이것이 여가부 때문이라는 가짜뉴스가 퍼져 일부 어린이, 청소년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여가부는 이것이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 운영 정책 변경에 따른 것이라는 해명을 해야 했다.
‘금지하는 여가부’라는 관념은 이명박 집권기에 강력히 각인됐다. 여가부가 시행한 대중가요 유해물 심의 강화와 게임 셧다운제가 그런 이미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012년 1월엔 어린이와 청소년 7명이 셧다운제에 불만을 터트리며 여가부 누리집을 네차례 디도스 공격하는 사건도 있었다. 10~20대 젊은 연령층 중심으로 이런 인식이 뇌리에 남게 되었고, 강하고 광범위한 역풍이 불게 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젠더 관점과 여성정책 패러다임: 해방 이후 한국 여성정책의 역사에 대한 이론적 검토’, 배은경, 2016)
그 밖에도 여성부는 한국에만 존재한다는 루머, 여가부의 성인지 예산이 한해 35조원이라는 루머 등이 있다. 많은 언론들이 팩트 확인했듯, 2022년 여가부 예산은 1조4650억원으로 정부 전체 예산의 0.24%에 불과하며 18개 정부 부처 가운데 가장 적다. 2020년 기준 성평등 정책 전담 기구가 있는 나라는 194개이고, 독립 부처 형태가 160개로 가장 많다.
여가부 정책은 곧잘 정치적 논쟁의 소재가 되었고, 장관은 정치적 주요 공격 대상이 됐다. 2018년 진선미 전 장관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동성애자 아니시냐”(자유한국당 이종명)는 질문을 받았다. 여가부가 발간한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내용이 군사 독재 시절의 두발과 미니스커트 단속과 동일하다며, “여자 전두환이냐”(바른미래당 하태경)는 비판에도 시달렸다. 정현백 전 장관은 혜화역 인근에서 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에 갔다며 남녀 갈등을 유발했다고 공격받았다. 한 여성부 관계자는 “언론이 성차별을 ‘젠더 갈등’이라고 이름 붙인 순간부터 젠더 이슈에 장관이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고 ‘갈등을 만드는 여성부’라는 구도가 더 강화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여성부 장관은 국가의 성인식 개선을 책임지는 1인으로, 이기적 주체이거나 무능한 주체로 지목되어왔다.(‘국가 페미니즘, 여성가족부, 여성혐오’, 정사강·홍지아, 2019)
지난 3월1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열린 ‘성평등 정책 강화를 요구한다’ 여성·시민 긴급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제 정부 정책에서 ‘여성’이란 단어는 너무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여성부’라는 명칭이 ‘불편한 것’이 되자 지난 대선에서 후보들은 일제히 새로운 부처명을 내놓았다. ‘성평등가족부’(이재명), ‘양성평등가족부’(윤석열), ‘성평등부’(심상정) 등이다. ‘여성’이란 간판은 내리기로 여야가 공감대를 이룬 셈이다. 이복실 전 여가부 차관도 “부처명을 바꿔서 존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무원 채용 관련 자료를 보면, 신규 채용 시 양성평등 원칙을 적용한 양성평등채용목표제 혜택을 본 이는 남성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여성’이 들어간 부처명 때문에 여성만을 위한 행정을 한다는 오해를 샀다.” 정영애 여가부 장관 또한 지금은 소외되거나 피해 입은 남녀 모두 정책 대상에 포함돼 있다며 명칭 개정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다. 여가부의 영문 명칭은 ‘이미’ 성평등가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다. ‘여성부’란 조직명이 정책 수혜자를 지정 성별 ‘여성’으로 한정하는 것처럼 읽혀 젠더 이분법을 강조하거나 백래시의 빌미를 준다는 목소리는 여성계 안에서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성’이란 단어를 떼내는 것만으로 문제는 해결될 것인가?
76년 한국 여성 행정사의 가장 큰 비극은 여성 전담 부처가 제도적 안정성을 이루기도 전에 흔들기와 갈라치기에 쉼 없이 시달렸고 증오와 혐오의 강도도 점점 강해졌다는 것이다. ‘여성부’는 하나의 과녁이었고, 정치인들은 끝없이 정치적 수사로 가득 찬 화살을 제공했다. 이번 대선에서 여성부 폐지 이슈는 가장 큰 정치적 쟁점이었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개혁과 마찬가지로 성평등 또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책의 일관성, 물적 투자, 사회적 인식 변화와 합의를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의제다. 위기가 오히려 기회일 순 없을까?
다짜고짜 선포된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공약 논란 끝에 남은 최소한의 합의는 ‘지금 이대로 여가부’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여가부는 소명을 다했다’는 말은 공공연한 차별을 부정하고 차별을 공적 문제로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인권운동사랑방 미류 활동가는 말했다. “‘여가부 폐지 반대’라는 뜻은 지금 여가부가 잘한다는 것이 아니다. ‘여가부 폐지’의 반대말은 ‘성차별 폐지’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더욱 긴요해졌다.”
최근 윤석열 인수위 쪽이 9월 정기국회에서 정부조직법을 개정한다는 방침을 세우면서 ‘시한부 여가부’에도 일단 새 장관이 나오게 됐다.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는 당선자 쪽은 유엔개발계획(UNDP)의 ‘2021 성불평등지수(GII)’에서 한국이 11위로 상위권이라는 걸 근거로 내세우지만 이건 모성사망비, 청소년 출산율 등을 포함한 반면 남녀 간 직종격차, 임금격차는 넣지 않은 지수다. 여성의 경제참여 기회와 정치권한 등을 주요 지표로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1 세계성격차보고서(GGI)’에서 한국은 156개국 중 102위로 최하위권이다. 지난달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지수를 보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 10년째다. 성별 임금격차도 31.5%로 최하위다.
김현미 한국여성학회 회장은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모두 선한 시민으로 사회적 연대를 지향하고, 모든 이의 동등한 공존을 실천하는 국민이고 싶다. 성평등지수를 높이는 일은 인류 공존의 기반을 구축해가는 글로벌 약속이고 목표다. 그런 이해 없이 약한 고리를 때리듯, 정권교체의 정치 수사학으로 ‘여성부 폐지’가 쓰이는 행위는 없어져야 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