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경북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 봉강공동체의 생산자 중 최고령자인 문달님 회원(오른쪽)의 텃밭에 선 김옥순 사무장. 농사꾼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해봤다는 김 사무장은 여성농민회의 도농 직거래 사업인 ‘언니네텃밭’에 참여하는 전국 17개 생산자공동체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봉강공동체의 살림을 맡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김옥순 봉강공동체 사무장
김옥순 봉강공동체 사무장
“우리 짝다리 짚고 서자. 짝다리는 이렇게…. 한쪽 엉덩이에 힘을 팍 주고!”
“뭐, 이렇게… 이렇게?”
“아, 좀 제대로 서봐. 난 종일 고추를 땄더니 사람이 다 고추로 보이네. 하하하.”
지난 11일 경북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 당산나무 아래 40대부터 70대까지 동네 ‘언니들’이 모였다. 사진을 찍자 하니, 교정에 선 여고생들처럼 연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익살스런 포즈를 취한다. ‘봉강공동체’와 ‘언니네텃밭’ 팻말이 붙은 작업장의 알록달록한 벽화가 가을볕에 반사돼 명랑했다. 연둣빛 밤송이가 꽃처럼 화사하고, 밤나무 아래 콩밭엔 콩깍지가 올망졸망 줄기가 휘도록 매달렸다.
봉강공동체는 봉강리와 이천리에 사는 16명의 여성 농민들이 꾸려가는 생산자 공동체다. 여성농민회가 기획한 도농직거래사업 ‘언니네텃밭’에 참여하는 전국 17개 공동체 가운데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곳 중 하나다. 매주 밭에서 갓 따온 싱싱한 푸성귀와 제철 과일, 햇곡식을 한 꾸러미씩 포장해서 도시에 있는 소비자 회원에게 배송한다. 2009년 소비자 37가구로 꾸러미사업을 시작해서 지금은 170가구로 회원을 확대했다. 매년 봄이면 무엇을 심을지 같이 생산계획서를 짜고 매주 꾸러미에 담을 채소며 곡식, 찬류를 나눠서 준비한다.
추석을 앞두고 알곡이 여무는 가을, 좀더 평범한 농촌 아낙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뙤약볕 아래 진이 빠지도록 김을 매고 아이를 건사해야 했던 어머니들의 삶에서, 지금 농촌의 안주인이 된 그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어머니 세대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숙명처럼 농촌생활을 받아들였다면 지금의 농촌 여성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농촌에 머무르기를 선택한 세대다. 이들이 꾸려가는 농촌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그들이 꿈꾸는 농촌의 미래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봉강공동체에서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김옥순(47) 사무장을 만나러 간 날, 공동작업장에는 최고참 문달님(78) 회원과 석춘화(62) 회장, 고유정(44) 총무, 그리고 귀농 4년차인 막내 송은영(43) 회원이 김 사무장을 응원하러 나와 있었다. 문달님 할머니가 텃밭에서 캐서 삶아 내온 토종 땅콩이 달콤하고 고소했다.
총 아홉가지가 들어가는 꾸러미
-마을 한가운데 공동작업장이 큼지막하게 잘 지어졌네요. 언제 지은 거예요?
“2010년엔가? 그해 봄에, 전체 회원이 다 나와서 ‘공구리’(콘크리트 작업)를 같이 했어요. 칠십 넘으신 회원까지 전부 장화 신고 나와서 공구리 치고…. 그 전에는 작업장이 따로 없어서 회원 집 마당에서 일하다가 비 오면 축사로 몸을 피하기도 하고 그랬죠. 하하하, 그것도 이젠 추억이네.”
40평 남짓한 작업장 입구에는 ‘공동작업장’, ‘요가교실’, ‘마을영화관’이란 작은 팻말이 나란히 달려 있다. 깨끗이 관리된 작업장 선반에는 택배에 쓰이는 포장재와 박스가 빽빽이 쌓여 있고 중앙에는 농산물을 모아서 분류, 포장하는 큰 작업대가 4개, 안쪽에는 김치를 담그거나 두부를 만드는 주방이 있다.
주방 입구에는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어서 스크린을 펼치고 여기 모여 영화를 보기도 하는데, 얼마 전엔 <써니>를 보며 다 같이 배꼽을 잡았다고 한다. 카메라 앞의 ‘짝다리 포즈’도 <써니>의 한 장면을 흉내낸 것인 듯했다. 작업장 옆에는 컴퓨터와 복사기까지 갖춘 사무실이 있다. 김옥순 사무장이 매주 꾸러미 안에 동봉할 편지를 쓰는 곳도 이곳이다.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는데 그 말이 맞는가 봅니다. 저는 송편을 잘못 만들어서 아들밖에 없는가? 하며 애써 웃음지어 본답니다. 어릴 땐 명절이 다가오는 게 마냥 좋기만 했는데 맏며느리가 되고 보니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 되었답니다. … 이번주 꾸러미가 이달 마지막 꾸러미가 되겠네요. 추석이라 햅쌀, 햇배, 햇밤을 보냅니다.
두부. (생산자: 황재순 이난식) 유기농. 바닷간수를 써서 고소하니 맛있어요.
햇배. (생산자: 이윤구) 무농약. 올해 날이 가물어 많이 크진 않네요.
부추. (생산자: 신영복, 안봉순, 문달님, 김옥순, 제정이) 무농약, 유기농. 아침저녁으로 날이 춥고 가물어 너무 어려 다듬느라 큰 고생 했어요.
쪽파. (생산자: 제정이, 안봉순) 유기농. 명절에 전으로 해서 드세요. (중략)
-상주 봉강공동체 제철꾸러미 편지 중에서
편지에는, 그 외에도 꾸러미에 담긴 열무, 달걀, 콩나물, 햅쌀, 햇밤의 생산자 이름과 생산방식, 특징이나 요리법이 소상히 적혀 있다. 시골에 있는 어머니가 도시의 자식들한테 꾸러미를 이고 지고 와서 전해줄 때 할 법한 시시콜콜한 얘기들, 대개 건성으로 들어 넘기지만 이따금씩 그리워지는 정겨운 어머니의 잔소리와 닮았다.
-꾸러미에 들어가는 품목은 대개 어떤 거죠?
“그때그때 달라요. 총 9가지가 들어가는데 두부, 달걀, 콩나물 3가지는 기본으로 하고요, 야채는 보통 4가지쯤 되는데 지난주엔 호박잎, 단호박, 고구마순, 조선배추 같은 걸 보냈어요. 그 외 찬류로는 간장이나 된장, 김치, 도토리묵, 피클, 식혜 같은 것 중 한두 가지를 넣지요.”
매주 한 차례 배송되는 4인 가족용 한 꾸러미당 소비자 회원이 치르는 가격은 주당 2만6500원이다. 지난 6년간 2만5000원이었던 것을 최근에 1500원 올렸다. 식구가 적은 가구는 격주 배송이나 1인용 꾸러미를 이용하기도 한다.
-오늘은 작업장이 한산한데 언제가 제일 바빠요?
“화요일 오후 3시에 택배가 나가는데 아침부터 박스를 쭉 펴놓고 나물 무게 재고 야채 포장해서 170가구에 보내려면 정신이 없어요. 두부는 하루 전에 만들어서 예냉했다가 맨 마지막에 넣죠. 상하지 말라고.”
택배 배송이 끝나면 각자 가져온 물건의 품목과 수량에 따라 이윤을 나눈다. 받아가는 액수는 사람마다 다르다. 작게는 월 20만~30만원에서 많게는 150만~200만원까지 차이가 난다. 대개 콩나물이나 두부처럼 꾸준하게 물건을 대는 사람이 좀 더 받아간다. 각자의 사정과 여건에 따라 일을 나누기 때문에 큰 불만들은 없다.
갓 수확한 유기농 농산물 포장해
매주 도시회원 170가구에 보내는
‘언니네텃밭’의 가장 활발한 공동체
15년 전 귀농한 도시여자 김옥순은
상주 봉강공동체의 든든한 언니다 대구에서 치킨집 운영하면서
농사꾼 될 거라곤 상상 못했다
상가에 불나고 시아버지 아프자
남편이 ‘촌에 가서 농사짓자’
처음엔 못 간다고 버텼다 귀농인구가 늘었다 -처음 언니네텃밭을 시작한 게 언제죠? “2009년에 강원도 횡성에서 언니네텃밭이 시작되었고 저희가 두 번째죠. 처음엔 엄두가 안 났어요. 아이고, 여자들이 뭘 하겠어. 이런 사업도 안 해봤는데 하고…. 근데 횡성에 직접 견학을 가서 보니까, 해볼 만할 것 같더라고요. 거긴 집들도 띄엄띄엄 살던데, 우린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까 모이기도 쉽고 품목 맞추기도 쉬울 것 같고. 반찬도 혼자서 하긴 힘들지만 같이 하니까 재미도 있고. 그래서 횡성 다녀와서 13명이 생산자 공동체를 만들어서 바로 시작했어요.” -지금은 16명이니 6년 전이나 지금이나 생산자 회원 수는 큰 차이가 없네요. “농사를 유기농으로 지어야 하고 친환경으로 해야 하니까, 마음은 있어도 선뜻 들어서기가 힘들죠. 우리는 제초제나 농약 안 쓰는 친환경 농산물만 내고 가급적 화학비료도 안 쓰는 유기농을 하니까요.” -한집에 사는 식구도 사소한 일로 토닥거리고 삐지곤 하는데 7년째 공동체 식구들이랑 부대끼면서 갈등은 없었어요? “티격태격할 때도 있죠. 우리 회원들 중에 연세 드신 분들도 계신데, ‘너는 왜 물건을 이런 걸 갖고 왔냐? 내 건 더 좋은데’ 할 때가 있어요. 그럼 듣는 사람은 기분 나쁘잖아요. 그래서 약간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고요. 돈이 오가는 일이니까 가격 결정 문제도 있죠. 1000원으로 측정했는데 1200원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도 7년째 해오면서 지금은 이런 문제들이 상당히 적어졌어요.” 서로 부딪히고 맘 상하는 일을 겪으면서 조금씩 갈등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갔다. 초기엔 김치도 한 사람씩 담그던 것을 이젠 2인1조로 돌아가며 담근다. 단가가 높은 품목이 한 사람한테 집중되는 걸 막고, 젊은 회원과 나이 든 회원이 한 팀이 돼서 서로 보완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반면, 나물을 캔다거나 채소를 다듬고 까는 일에 할머니 회원들의 손이 훨씬 빠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회원들 나이대가 다양해서인가 피클부터 장류까지 꾸러미의 품목도 다양한 것 같아요. “맞아요. 저번 주에 도토리묵을 넣었는데 묵 쑤고 그런 걸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따라가겠어요? 가을에 채취해서 냉동실에 넣어놨다가 가루를 빻아서 쑤기까지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할머니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걸 느껴요. 할머니들도 젊은 사람들 덕에 활력을 얻었다고 고마워하시고요. 평생 남편한테 용돈 받아 사시던 분들인데, 자기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으로 애들 용돈 주는 게 뿌듯하시대요. 매주 한 번씩 요가도 하고요, 요즘엔 율동 연습도 같이 하는데 젊어지는 기분이라고 좋아들 하세요.” -댄스를 하신다고요? “내일이 우리 소비자 방문의 날이에요. 일년에 두 번, 소비자들이 저희 생산자를 직접 만나러 오는 날인데, 우리 어머니들이 환영식을 위해서 ‘내 나이가 어때서’에 맞춰서 율동을 연습하고 있어요. 처음엔 노인네가 뭐 하냐고 무지 쑥스러워하시더니, 해보니까 재미있다고 너무 좋아하세요.(웃음)” 소비자 회원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의미에서 최고령자인 문달님, 안봉순(78) 회원을 비롯해서 봉강공동체 회원 전원이 분홍 스카프를 두르고 댄스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란다. 과천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4년 전 귀농한 송은영 회원이 안무를 맡았다. 봉강에는 동네밴드도 있다. 이름하여 농밴(농촌밴드). 기타 잘 치는 동근이 아빠와 초등학교 2학년인 동근이가 타악기로 흥을 돋우면 목청 고운 동근이 엄마 은영씨가 노래를 부를 건데 은영씨랑 자매같이 붙어 다니는 이웃, 은미씨가 보컬로 가세한단다. 모두 최근에 이 동네로 귀농한 사람들이다. -젊은 귀농인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이유가 뭐예요? “우리 마을에 1970년대부터 유기농을 시작한 분들이 계세요. ‘정농회’나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한 분들. 그때는 친환경농업 한다고 하면 ‘요주의 인물’, ‘빨갱이’ 취급을 받았대요. 여기 계신 문달님 할머니도 그때부터 유기농 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우리 마을이 친환경농사 짓는 마을로 알려진 게 있고요. 요즘 농촌에선 농사를 같이 짓지 않고 다 각자 지으니까 사람들끼리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는 꾸러미사업을 같이 하니까…. 여기 있는 송은영 회원은 그런 게 좋았대요.(웃음)” -농사를 같이 짓지 않고 각자 짓는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옛날엔 열 마지기 스무 마지기 농사지으려면 손으로 모내기해야 하니까, 머슴 두고 일할 사람 모으고 밥을 해서 같이 먹고, 모심는 날이 동네 큰일처럼 그렇게 했잖아요. 지금은 100마지기, 200마지기 돼도 기계로 심으니까. 각자 일하게 되지, 같이 모여서 막걸리 한잔 먹기도 힘들어요.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어요, 자기 일 하다보면. 그런데 이제 꾸러미를 통해서 매주 모이고 하니까, 그런 게 더 좋다는 거죠.”
“예전엔 콩밭 매며 울었어요”
봉강공동체의 든든한 언니 김옥순도 15년 전 귀농한 도시 여자다. 대구에서 출생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23살에 상주 출신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대구시내에 상가를 분양받아 치킨집을 운영하며 아들 삼형제를 낳아 키웠다. 가끔씩 시가에 내려와 농사짓는 것을 구경만 했을 뿐, 그 자신이 농사꾼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해보고 살았다.
-치킨집은 얼마나 하셨어요?
“한 3~4년 했나? 그런데 가게에 불이 났어요.”
-저런!
“합선이 돼서 온 상가를 다 태웠죠.”
-보험은 들어놨어요?
“아니요. 다른 치킨집에 불났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보험 하나 들어야겠다, 막 그러던 참에 불이 난 거예요.”
-아이구야!
“집기고 인테리어고 하나도 못 쓰게 되고, 그 자리에 대충 페인트칠하고 다시 장사를 시작했는데 한 번 불이 난 자리라 그런가 장사가 잘 안되었어요. 그 무렵에 아버님도 편찮으시다고 하고, 그러니까 남편이 ‘촌에 가서 농사짓자’ 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내려오셨어요?
“처음엔 귀담아듣지도 않았죠. 장사 안되니 한 번 해보는 소리겠거니, 나하곤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 없고, 간혹 시댁에 와서 고추 딸 때 한 번씩 돕고 가면 완전 몸살을 앓았거든요.(웃음)”
-그래서 처음엔 반대하셨나요?
“반대했죠. 내가 못 가겠다고 버티니까 남편이 애들을 다 데리고 먼저 내려가 전입신고까지 해놨어요. 그래도 난 오기 싫다고 친정에서 한 달을 버텼죠.”
-그럼 혼자만 대구에 떨어져서?
“네. 장사를 다시 하든지 남편이 어디 직장을 찾아보든지 하라고 했죠. 농사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근데 어떻게 내려오셨어요?
“내 성격을 아니까 남편이 저녁마다 술 먹고 와서 나를 꼬시더라고요.(웃음) ‘농사가 그렇게 싫으면 너는 농사짓지 말아라. 집에서 밥이나 해주고 시내 다니면서 취미생활 해라. 공무원들처럼 우리도 토요일, 일요일에는 놀자. 딱 5년만 있다가 다시 돌아오자’ 하면서….”
-그 말에 넘어가셨군요.(웃음)
“내가 너무 순진했지. 사람들이 그 얘길 하면 ‘넌 그 말을 믿었냐?’고 하면서 놀려요.(웃음) 농사꾼이 주말이 어딨어요? 밥만 해주는 게 어딨고….”
편찮으신 시아버지에 시어머니,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농촌살이가 시작되었다. 농사가 어려울 줄 짐작은 했지만 막상 부딪혀보니 생각한 것보다 더 고되고 힘겨웠다. 농사일은 서툰데, 처음부터 농약을 안 치는 농사를 한다고 작정한 터라 잡초는 돌아서면 돋아나고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남편 원망이 컸겠어요.
“칠갑산이란 노래 있잖아요. ‘콩밭 매는 아낙네야~’ 하는 노래. 저도 콩밭 매면서 엄청 울었어요. 풀 매면서 너무 힘들어서.(웃음)”
-제일 힘들었던 일은 뭐예요?
“육아 문제죠. 애들이 어린데 들에 나가서 하는 일이 정시에 퇴근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어둑어둑해서 돌아오면 애들은 배고프다고 ‘엄마 밥 줘!’ 하는데. 그럴 때 우리 어머님이 밥을 좀 하시면 좋으련만. 우리 어머니도 밖에서 일하는 걸 속 편해하지 밥하는 걸 싫어하셔서 저보다 늦게 오세요. 애들이 고생했죠.”
-‘농사일이 할 만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럼 언제부터예요?
“그게 언니네텃밭 하면서부터예요. 내가 주도적으로 농사를 계획하고 내가 일할 공간이 생기니까. 이번엔 뭘 내야 하니까 뭘 심고,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맘먹고 하게 되니까 달라지더라구요. 내가 심은 오이가 자랄 때 괜히 더 이쁜 것 같고, 너무 사랑스럽고….(웃음) 그 전에는 어머니가 ‘들에 가자’ 그러면 ‘아, 조금만 쉬었다 가지. 벌써 가나?’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언니네텃밭 일 하면서부터는 어머님보다 내가 먼저 ‘들에 가요’ 소리를 해요.”
-시어머니하고 관계도 많이 좋아지셨나 봐요.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 고구마줄기를 깐다거나 호박잎을 따고 쪽파를 다듬는 걸 우리 어머님이 잘해 주시거든요. 어머니가 다듬어 주신 걸 꾸러미 채소로 넣고 그 돈을 어머니 용돈으로 드리면 무척 좋아하세요.”
언니네텃밭 개시한 횡성 견학 뒤
13명이 생산자공동체를 만들다
주도적으로 농사 계획하면서
농사일이 할 만하다 느껴지고
농작물도 괜히 더 이쁜 것 같고… “농약 치면 누가 잡아가냐고요?
아무리 그래도 약속을 지켜야죠
이게 내 자존심이에요
친환경 하기로 약속을 해놓고
내가 약 치면 이 단체 무너져요”
전국의 토종씨앗을 찾아
-박스에 쓰여 있는 문구를 봤어요. ‘얼굴 있는 생산자와 마음을 알아주는 소비자가 함께 만드는 언니네텃밭’이라고. 요즘은 도시의 대형마트에서도 농민 실명과 사진을 내걸고 농산물을 팔던데, 그런 방식과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그건 대농(大農)만 할 수 있어요. 소규모 텃밭으로는 물량을 채울 수가 없죠. 대농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기계를 사야 하고 그러려면 빚을 져야 해요. 저희 집도 지금 논농사만 200마지기를 하는데, 이렇게 크게 하는 이유가 선대에 사놓은 농기계 때문이에요. 기계 하나가 5000만~6000만원쯤 하니까 적게 지어선 농협에 갖다 주는 돈 빼고 남는 게 없어요. 그러니 차라리 규모를 키우는 건데, 이것저것 떼면 순수익은 얼마 안 돼요. 언니네텃밭은 내 자식들 주려고 짓는 농사에서 조금 더 키워서 하는 거라 규모는 작지만 소농들이 빚 안 내고 쏠쏠히 용돈 벌이 할 수 있는 거고요.”
-유기농, 국산, 토종 같은 개념들이 뒤섞여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어떤 건 유기농이라는데 자세히 보면 수입산이고, 어떤 건 국산이라는데 토종은 아니고…. 언니네텃밭에선 친환경농법과 함께 토종 종자 지키기를 하고 있죠?
“네. 옛날부터 다음해 농사에 쓰일 종자들을 갈무리하는 건 전통적으로 여자들 일이었어요. 할머니들이 양파망 같은 데 종자를 넣어서 처마 밑에 보관하곤 했잖아요. 토종 종자를 지키는 데 여자들 역할이 커요. 토종 씨앗은 일반 종묘상에선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저희가 직접 시골 산골마을로 찾아다니면서 할머니들한테서 옛날부터 키워온 토종 씨앗을 받아오기도 해요.”
봉강공동체 사무실 벽면에는 전국에서 수집한 50여 가지의 토종 씨앗들이 진열되어 있다. 차조, 녹두, 흰찰옥수수, 얼룩동부, 목화, 방풍, 겨울초…. 봉강공동체는 씨앗을 잘 간수해서 농사로 불리기도 하고 행사에 나가 다른 농민들한테 분양하기도 한다.
-토종은 씨알이 작고 수확량도 적은 편 아닌가요?
“토종은 볼품없고 모양도 예쁘지 않고 수확도 적어요. 그래도 맛은 있어요. 토종옥수수도 키는 작은데 알이 차지고 맛있지요. 우리 꾸러미에 있는 모든 게 토종은 아니지만 오이, 고추 정도는 토종으로 내려고 해요.”
-자본주의 세상에선 같은 값이면 더 큰 것, 생산하기 편리한 것, 효율이 높은 것을 더 쳐줘요. 왜 굳이 토종 농사를 지으려고 해요?
“우리가 토종 종자를 지켜내지 않으면 카길 같은 큰 회사가 식량을 좌지우지할 거 아니에요? 나중엔 파프리카 씨앗도 수십만원 주고 사야 되는 세상이 올지 몰라요.”
-농협에서 따로 대책이 있지 않을까요?
“농협도 뭐… 장사꾼이잖아요.(웃음) 농협도 유통망이 있어서 질 좋은 다수확 품종 같은 걸 선호하지, 토종하곤 약간 거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야 돈이 되니까.”
-유기농이나 토종 농사를 지으려면 품은 많이 들고 수확량은 적잖아요.
“말도 마세요. 우리 논은 약을 안 치니까 멀리서 딱 봐도 보여요. 잡초 제일 많은 논! ‘저거 아무개 논이구나.’ 한눈에 봐도 딱 안대요.(웃음) 우렁이 풀어서 짓는데 그거 하려면 물도 깊이 받아놔야 하죠, 화학농약은 한번 치면 벌레도 싹 죽는데 천연농약은 수시로 쳐야 되죠. 풀도 일일이 손으로 뽑아줘야 되죠….”
‘이 쌀 한톨 누구 주나봐라’ 싶다가도
-근데 왜 그런 유기농을 하세요?
“왜 하냐고요? (잠시 생각) 글쎄요…. 내 자존심이랄까. 하하하.”
-자존심이요? 친환경농업을 고집하는 이유가?
“제가 처음 시골 내려왔을 때 그땐 저희 어머님도 관행으로 약을 쳤어요. ‘가족들 먹는 건데 왜 약을 치시냐?’고 했더니 ‘약 안 치고 무슨 농사가 되냐? 벌레가 다 파먹어 못쓴다’ 하시는 거예요. 그래도 난 ‘벌레 먹으면 어때? 그대로 먹으면 된다’ 생각하고 약 안 치기로 맘먹었어요.”
-그래도 어디 폐회로카메라를 달아놓은 것도 아니고, 약 좀 친다고 누가 잡아갈 것도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이게 내 자존심이에요. 같이 친환경 하기로 약속한 회원들이 있는데, 내가 약을 치면 이 단체가 무너지죠.”
-방사유정란이나 유기농 국산 콩두부 같은 건 소비자 입장에서 판별해 볼 방법이 있나요?
“별로… 없죠. 겉모습 봐서는. 그냥 믿고 드시는 거죠. 딱히 육안으로 판별해 볼 방법은 없어요.”
김옥순이 친환경농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지속가능한 농업이나 생태주의적 농법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것보다 더 절실하고 진실한 그만의 이유였다.
-농사짓는 일이 뭐가 좋으세요?
“농사지어서 이웃이나 친척이 올 때 나눠 주는 게 참 좋아요. 내가 농사짓지 않으면 뭘 드릴 수가 있겠어요? 사람들은 잘 몰라요. 그 쌀 한 톨 내려고 얼마나 내가 고생하는지. 한여름에 논에서 풀 한 포기 뽑으려고 씨름할 때는 ‘내가 이 쌀 한 톨, 누굴 주나 봐라!’ 생각도 해요.(웃음) 그래도 또 그게 아니거든. 힘들게 지어서 나란히 나눠 먹을 수 있다는 기쁨.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좀 더 있는 거 같아요.”
김옥순에게 농사는 돈이 돼서 기쁜 것이기보다, 사람들하고 같이할 수 있어서 즐거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잊고 살지만, 그 후덕함으로 고향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녹취 문중현(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김옥순을 만든 시간들
매주 도시회원 170가구에 보내는
‘언니네텃밭’의 가장 활발한 공동체
15년 전 귀농한 도시여자 김옥순은
상주 봉강공동체의 든든한 언니다 대구에서 치킨집 운영하면서
농사꾼 될 거라곤 상상 못했다
상가에 불나고 시아버지 아프자
남편이 ‘촌에 가서 농사짓자’
처음엔 못 간다고 버텼다 귀농인구가 늘었다 -처음 언니네텃밭을 시작한 게 언제죠? “2009년에 강원도 횡성에서 언니네텃밭이 시작되었고 저희가 두 번째죠. 처음엔 엄두가 안 났어요. 아이고, 여자들이 뭘 하겠어. 이런 사업도 안 해봤는데 하고…. 근데 횡성에 직접 견학을 가서 보니까, 해볼 만할 것 같더라고요. 거긴 집들도 띄엄띄엄 살던데, 우린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까 모이기도 쉽고 품목 맞추기도 쉬울 것 같고. 반찬도 혼자서 하긴 힘들지만 같이 하니까 재미도 있고. 그래서 횡성 다녀와서 13명이 생산자 공동체를 만들어서 바로 시작했어요.” -지금은 16명이니 6년 전이나 지금이나 생산자 회원 수는 큰 차이가 없네요. “농사를 유기농으로 지어야 하고 친환경으로 해야 하니까, 마음은 있어도 선뜻 들어서기가 힘들죠. 우리는 제초제나 농약 안 쓰는 친환경 농산물만 내고 가급적 화학비료도 안 쓰는 유기농을 하니까요.” -한집에 사는 식구도 사소한 일로 토닥거리고 삐지곤 하는데 7년째 공동체 식구들이랑 부대끼면서 갈등은 없었어요? “티격태격할 때도 있죠. 우리 회원들 중에 연세 드신 분들도 계신데, ‘너는 왜 물건을 이런 걸 갖고 왔냐? 내 건 더 좋은데’ 할 때가 있어요. 그럼 듣는 사람은 기분 나쁘잖아요. 그래서 약간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고요. 돈이 오가는 일이니까 가격 결정 문제도 있죠. 1000원으로 측정했는데 1200원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도 7년째 해오면서 지금은 이런 문제들이 상당히 적어졌어요.” 서로 부딪히고 맘 상하는 일을 겪으면서 조금씩 갈등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갔다. 초기엔 김치도 한 사람씩 담그던 것을 이젠 2인1조로 돌아가며 담근다. 단가가 높은 품목이 한 사람한테 집중되는 걸 막고, 젊은 회원과 나이 든 회원이 한 팀이 돼서 서로 보완이 될 수 있게 한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반면, 나물을 캔다거나 채소를 다듬고 까는 일에 할머니 회원들의 손이 훨씬 빠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회원들 나이대가 다양해서인가 피클부터 장류까지 꾸러미의 품목도 다양한 것 같아요. “맞아요. 저번 주에 도토리묵을 넣었는데 묵 쑤고 그런 걸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따라가겠어요? 가을에 채취해서 냉동실에 넣어놨다가 가루를 빻아서 쑤기까지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할머니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걸 느껴요. 할머니들도 젊은 사람들 덕에 활력을 얻었다고 고마워하시고요. 평생 남편한테 용돈 받아 사시던 분들인데, 자기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으로 애들 용돈 주는 게 뿌듯하시대요. 매주 한 번씩 요가도 하고요, 요즘엔 율동 연습도 같이 하는데 젊어지는 기분이라고 좋아들 하세요.” -댄스를 하신다고요? “내일이 우리 소비자 방문의 날이에요. 일년에 두 번, 소비자들이 저희 생산자를 직접 만나러 오는 날인데, 우리 어머니들이 환영식을 위해서 ‘내 나이가 어때서’에 맞춰서 율동을 연습하고 있어요. 처음엔 노인네가 뭐 하냐고 무지 쑥스러워하시더니, 해보니까 재미있다고 너무 좋아하세요.(웃음)” 소비자 회원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의미에서 최고령자인 문달님, 안봉순(78) 회원을 비롯해서 봉강공동체 회원 전원이 분홍 스카프를 두르고 댄스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란다. 과천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4년 전 귀농한 송은영 회원이 안무를 맡았다. 봉강에는 동네밴드도 있다. 이름하여 농밴(농촌밴드). 기타 잘 치는 동근이 아빠와 초등학교 2학년인 동근이가 타악기로 흥을 돋우면 목청 고운 동근이 엄마 은영씨가 노래를 부를 건데 은영씨랑 자매같이 붙어 다니는 이웃, 은미씨가 보컬로 가세한단다. 모두 최근에 이 동네로 귀농한 사람들이다. -젊은 귀농인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이유가 뭐예요? “우리 마을에 1970년대부터 유기농을 시작한 분들이 계세요. ‘정농회’나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한 분들. 그때는 친환경농업 한다고 하면 ‘요주의 인물’, ‘빨갱이’ 취급을 받았대요. 여기 계신 문달님 할머니도 그때부터 유기농 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우리 마을이 친환경농사 짓는 마을로 알려진 게 있고요. 요즘 농촌에선 농사를 같이 짓지 않고 다 각자 지으니까 사람들끼리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는 꾸러미사업을 같이 하니까…. 여기 있는 송은영 회원은 그런 게 좋았대요.(웃음)” -농사를 같이 짓지 않고 각자 짓는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옛날엔 열 마지기 스무 마지기 농사지으려면 손으로 모내기해야 하니까, 머슴 두고 일할 사람 모으고 밥을 해서 같이 먹고, 모심는 날이 동네 큰일처럼 그렇게 했잖아요. 지금은 100마지기, 200마지기 돼도 기계로 심으니까. 각자 일하게 되지, 같이 모여서 막걸리 한잔 먹기도 힘들어요.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어요, 자기 일 하다보면. 그런데 이제 꾸러미를 통해서 매주 모이고 하니까, 그런 게 더 좋다는 거죠.”
봉강공동체 회원들이 5년 전 직접 콘크리트 작업까지 하며 지은 공동작업장을 배경으로 모여 앉았다. 왼쪽부터 고유정 총무, 김옥순 사무장, 석춘화 회장, 송은영 회원.
탁기형 선임기자
13명이 생산자공동체를 만들다
주도적으로 농사 계획하면서
농사일이 할 만하다 느껴지고
농작물도 괜히 더 이쁜 것 같고… “농약 치면 누가 잡아가냐고요?
아무리 그래도 약속을 지켜야죠
이게 내 자존심이에요
친환경 하기로 약속을 해놓고
내가 약 치면 이 단체 무너져요”
봉강공동체 사무실 벽면에 진열된 50여개의 토종 씨앗들. 봉강공동체는 토종 종자를 이용한 유기농을 고집한다. 왼쪽은 인터뷰어 이진순씨. 탁기형 선임기자
이진순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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