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성과 재생산 포럼’이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스북 갈무리
한국판 ‘검은 시위’가 점점 커지고 있다. 정부의 ‘비도덕적 진료행위’ 처벌 강화 방침에서 불붙은 ‘낙태 논쟁’이 낙태죄 폐지와 여성의 자기결정권 문제로 확대되는 모양새다.
■ 여성계 “사람=여성≠자궁…자기결정권 존중하라”
17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선 ‘장애여성공감’ ‘공인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건강과 대안 젠더건강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등 단체와 개인 연구자들이 모인 ‘성과 재생산 포럼’이 정부의 입법예고 폐기와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성·장애·법률·의료·시민단체 등과 학계가 공동 주최했으며, 개인 2085명의 연서명(15일 기준)을 담아 낙태죄 폐지 운동을 선포했다. 낙태죄 폐지 주장에 여성단체뿐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한목소리를 낸 것은 처음이다.
이 포럼은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라는 구호 아래 “낙태를 조장하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다. 생명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돌리지 말고, 여성의 선택을 믿으라는 것이 낙태죄 폐지의 분명한 요구”라며 “여성은 자궁이 아니라, 엄마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앞으로 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여성의 건강, 안전, 삶을 위해 싸우겠다”고 밝혔다. 또, “근본적인 문제는 ‘임신중지’가 죄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낙태죄가 존재하는 이상 법과 현실의 모순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며 “국가는 성평등·성교육을 체계적으로 강화하고, 모든 여성이 자신에게 필요한 피임 기술과 의료시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회견에 참여한 산부인과 전문의 윤정원씨는 “매년 20만명의 여성이 임신중절 수술대에 오른다. 이 여성들이 비도덕적인가. 가장 안전한 임신중절 방법인 약물 사용 혹은 사용된 지 20년이 넘은 더 안전한 진료법 등이 있음에도 낙태가 불법이기에 한국엔 도입되지 않고 있다. 비도덕적인 건 국가”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연간 17만건 정도 이뤄지는 임신중절은 여성을 전신마취 시키고 자궁에서 태아를 진공흡입 하는 시술인데, 임신 초기에는 이보다 안전한 중절법이 있음에도 국가가 여성이 더 위험한 선택을 하도록 내몬다는 뜻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불꽃페미액션’ ‘페미당당’ 등 여러 여성단체는 오는 30일 연대시위로 낙태법 폐지를 위한 행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성과 재생산 포럼의 이유림 연구원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이번 낙태죄 폐지 운동은 결혼 유무, 성적 지향, 장애와 질병 유무, 경제적 차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모성을 실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려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12일 여성주의단체들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낙태를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고 중절수술을 한 의사를 더 세게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입법예고안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15일엔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검은 옷을 입은 시민 수백명이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아일랜드 사회당 여성주의 그룹 ‘ROSA’회원들이 한국의 ‘검은 시위’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ROSA 페이스북 갈무리
■ 아일랜드 사회당 “한국 낙태죄 폐지 투쟁에 연대”
이런 가운데 아일랜드 사회당 페미니스트 그룹인 ROSA(로자)가 지난 16일 한국의 낙태죄 폐지 투쟁을 지지하는 연대 메시지를 냈다. 로자는 “낙태권과 낙태 시술을 한 의사를 범죄시하는 시도에 항의하는 한국 여성들에게 연대를 보낸다”는 글과 함께 ‘나의 자궁 나의 것’이라고 적힌 15일 보신각 ‘검은 시위’ 포스터와 한글로 ‘#검은 시위’라고 적은 손팻말을 든 채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ROSA(for Reproductive rights, against Oppression, Sexism & Austerity)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로자 파크스 이름을 딴 단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출신 독일 사회주의 사상가로, 20세기 초 최고의 두뇌로 불린 이론가였으나 독일 우파에 의해 살해당했다. 로자 파크스는 미국 흑인인권 운동가로 ‘현대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로 불린다.
세계적으로 낙태 문제는 점점 ‘개인화’하고 있다. 국가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임신 12주까지, 스웨덴은 임신 18주까지 합법적인 낙태가 가능하다. 일본·영국 등은 사회경제적 이유로 낙태할 수 있다. 반면, 가톨릭 신자가 많은 아일랜드와 중남미 일부 나라들은 임신부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경우를 제외한 낙태를 철저히 금한다. 폴란드는 최근 낙태 전면금지법을 발표했지만 여성 수만명이 반발하며 거리로 나와 무산됐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 의료계 “낙태 전면중단” 배수진에 정부 “재검토”
임신중절 시술을 한 의료인을 최대 1년 자격정지로 처벌할 수 있는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을 지난 9월22일 보건복지부가 입법예고한 뒤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낙태수술 전면 중단”을 선언하자 정진엽 복지부 장관은 지난 14일 “재검토를 지시했다”며 한 발 물러선 상태다.
의사회는 16일 추계학술대회에서 “사회적 현실을 무시하고 비도덕적 의료행위에 인공임신중절을 포함시킨 것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낙태수술 중단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의사회는 “정부 정책이 산부인과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으로 변질된다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라며 “임신중절은 선진국 대부분이 일정 임신주수까지 허용하고 있으며, 일본은 사회경제적 사유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현실을 무시한 윤리적 강요로 의료윤리를 성취하겠다는 발상은 탁상행정”이라고 정부를 성토했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