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그룹 레드벨벳 아이린. 공식 페이스북 갈무리.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이 팬 미팅에서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혔다가 수난을 당하고 있다.
아이린은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아티움에서 열린 팬 미팅에서 근황을 묻는 질문에 “최근 책을 많이 읽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또 기억 안 나는 책도 있다. 휴가 가서 책을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주인공인 김지영 씨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국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차별을 담담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지난해 독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으로 꼽혔고, 책 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출간 7개월만에 10만부나 판매됐다. 지난해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과의 회동 자리에서 이 책을 선물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런데 팬 미팅이 끝난 뒤 아이린의 발언을 놓고 일부 누리꾼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황당한 논리의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언급한 것을 두고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다”며 비난하고 나선 것. 이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아이린의 사진을 찢고, 불태우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이들은 “왜 아이린이 지금처럼 예민한 시기에 페미니즘과 관련된 발언을 하는지 모르겠다”거나, 아이린의 발언에 대해 “실망스럽다. 탈덕(팬이 좋아하는 것을 그만둠)하겠다”는 등의 반응을 쏟아냈다. 논란이 계속되자 ‘아이린’, ‘페미니즘의 뜻’, ‘페미니스트’ 등의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누리꾼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아이린 사진 훼손 장면. 커뮤니티 갈무리.
이는 전형적인 ‘백 래시’(Backlash·반격) 현상이다. 백 래시란, 사회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자신의 중요도와 영향력,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불특정 다수가 강한 정서적 반응과 함께 변화에 반발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다. 주로 성적,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기제로 작용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가 동명의 저서 <백 래시>(아르테)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정치·사회·문화적 역풍을 해석하면서 개념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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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아이린과 같은 여성 아이돌을 대상으로 한 백 래시는 대중의 반응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연예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더욱 악의적이다. 앞서 아이돌 그룹 에이핑크 손나은 씨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girls can do anything”(걸스 캔 두 애니싱, 여성은 뭐든 할 수 있다)이라고 적힌 휴대전화 케이스 사진을 올렸다가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일부 극성 남성 팬들이 몰려와 페미니스트를 비하하는 표현이 담긴 악의적인 댓글을 달았다. 결국 손씨는 해당 게시물을 삭제했고, 소속사는 “쟈딕 앤 볼테르의 상품일 뿐”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이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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