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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낙태죄 사실상 비범죄화…“66년 만에 여성시민권 보장받아”

등록 2019-04-11 22:57수정 2020-11-16 15:45

사회·경제적 사유의 기준 선정과
상담 숙려기간 등 절차적 요건 등
국회 입법과정서 논의될 듯

여성계 “임신·출산·양육 환경까지
안전하고 평등하게 보장돼야”
여성단체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여성단체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국가 인구조절정책의 도구로 여성을 보아온 역사에 마침표가 찍혔다. 헌법재판소가 11일 형법 269조 1항(자기낙태죄)과 270조 1항(의사 등의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다. 헌재는 두 조항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고, ‘태아의 생명 보호’란 공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인 우위를 부여했다며 위헌이라고 봤다.

“여성 모두의 승리다.” 여성계는 적극 환영했다. 예상보다 “더 전향적인 결정문”이란 평가가 앞다퉈 나왔다. 특히 헌재가 임신중지에 대한 여성의 선택을 두고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이 처한 신체적·심리적·사회적·경제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이라고 명시한 부분은 인간으로서 여성의 존엄과 인격권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고 평가했다. 박수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이번 결정은) 임신중절에 대해 처벌조항을 두지 못하도록 사실상 ‘비범죄화’한다는 취지”라며 “여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관점에서 임신과 출산을 규정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여성이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이유로 현행법에 포섭되지 않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음을 헌재가 함께 서술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헌재는 △학업이나 직장생활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에 대한 우려 △소득이 충분하지 않거나 불안정한 경우 △더 이상의 자녀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 경우 △상대 남성이 출산을 반대하고 낙태를 종용하거나 명시적으로 육아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경우 등 다양한 사례를 예시로 들었다.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에 얼마나 복합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왜 더 폭넓게 보장돼야 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세세한 사례 제시는 앞으로 만들어질 법에 ‘사회·경제적 사유’를 폭넓게 허용하는 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헌재는 이와 함께 임신중절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실효성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며 임신과 출산을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던 기존의 법제도에 견줘 진전된 입장을 내놨다.

헌재는 임신 22주 안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입법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항의 위헌성을 제거하기 위해선, 여성이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시간을 충분히 보장받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단, 이 기간과 사회·경제적 사유를 조합해 태아의 생명권과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실현할 수 있는 방향의 입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간다. 형법상 낙태죄 처벌 규정에 대해 헌재가 위헌성을 인정한 만큼 해당 조항을 전제로 임신중절 허용 사유를 명시한 현행 모자보건법 14조는 사실상 무력화됐다. 의료인의 결격 사유로 형법 269조와 270조를 명시한 의료법 8조도 개정이 불가피하다.

여성계는 한발 더 나아가 모자보건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고 본다. 1970년대 가족계획사업을 위해 제정됐던 법이 이제는 여성의 건강과 재생산 권리를 적극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후 논의 방향은) 예측이 어렵다”면서도 “여성의 재생산 지원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가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때 재생산권은 성관계, 피임, 출산, 임신종결 등 재생산 영역에서 여성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적절한 보건의료서비스를 보장받을 권리 등을 포괄한다.

상담이나 숙려기간 등 절차적 요건을 둘러싼 입법도 진통을 겪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도 상담절차가 불가피하다는 입장과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맞선다. 상담 의무화나 숙려제도가 오히려 약물 처방이나 시술 시기를 늦춰 임신중지 안전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오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일주일의 숙려기간을 뒀지만 2015년 이를 없앴다.

피임교육과 포괄적 성교육, 노동현장에서의 성차별 개선, 안전하고 평등한 임신·출산·양육 환경 보장 등 성평등 의제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대표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임신중절이 사회적 낙인이나 협박의 수단이 되는 일이 사라질 것”이라며 “여성이 왜 임신중지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면밀하게 살펴 실질적으로 여성의 존엄과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정책과 법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이라면서도 여성계는 “66년 만에 여성이 시민권과 인격권을 보장받게 됐다”는 데 의의를 뒀다.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지금부터 입법전쟁이 시작될 것”이라며 “여성을 인구조절·통제의 수단으로 낙인했던 국가의 책임을 이제부터 (제대로) 실현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누구나 차별 없이 의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느냐란 평등권의 측면에서 (임신중절을)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여성가족부, 법무부, 보건복지부 등 정부는 헌재의 결정을 존중해 후속 조치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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