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창립 2년 만인 1992년 11월16일, 독립 사무실을 열고 회원들과 현판식을 하고 있는 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둘쨋줄 오른쪽). 이 명예교수는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맨 앞)와 함께 정대협의 초대 공동대표를 지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법과 제도를 연구하며 또한 행동했던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등을 지낸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글처럼, 4일 별세한 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평생을 성평등·민주화·평화 운동에 헌신한 거목이다.
■ “행동했던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 이 명예교수는 한국에 여성학을 도입한 인물로 꼽힌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국내 학계에서 처음으로 ‘여성’을 연구했고, 한국적 맥락과 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여성학 이론을 만들었다. 1976년에는 ‘여성 능력 개발을 위한 여성학 과정 설치의 제안’이라는 논문을 써 이화여대에 한국 최초의 여성학과가 생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가 쓴 책 <여성 해방의 이론과 현실>(1979)은 ‘여성운동의 교과서’로 불리며 많은 후배들을 여성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이론은 실천과 함께 했다. 그는 부모 성 같이 쓰기 1호 선언자로 호주제 폐지 운동에도 앞장서, 2005년 마침내 결실을 이끌어냈다. 이 명예교수의 제자이자 호주제 폐지 당시 여성부 장관을 지낸 지은희 전 장관은 “여성 노동자 문제, 빈민 여성 문제 등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에 대한 연구를 처음으로 한 여성학의 선구자이면서 동시에 이를 실천하는 운동을 함께 했다는 것이 선생님의 대단히 중요한 업적”이라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의 일대기를 담은 책을 썼던 박정희 작가도 “그 전까지 피부로만 불공평하다고 느끼던 문제들에 대해 그가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해줬기 때문에 호주제 폐지 등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 분단 연구 이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도 앞장 분단사회학은 그가 개척한 또 다른 학문 분야다. 남북 분단이 여성과 가족, 사회구조 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함으로써 그는 분단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통일의 실천적 가능성을 살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인순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효재와 분단시대의 사회학’이라는 논문에서 그가 1985년 펴낸 <분단시대의 사회학>을 일컬어 “인간해방을 위한 사회학”이라며 “이는 한국 사회학을 정립하려는 일환이었다”고 분석했다.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정의기억연대의 전신) 창립은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실천에 헌신했던 그의 또 다른 업적이다. 이 명예교수는 1992년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UN) 인권위원회를 방문하는 등 정대협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전쟁범죄에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고, 1996년 유엔 인권위원회의 ‘위안부’ 특별 보고서 채택과 일본에 배상 권고, 각국의 결의안 채택 등을 이끌어내는 밑거름이 됐다.
이 명예교수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 한차례 해직되기도 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시국선언으로 ‘반체제 지식인’으로 분류됐던 탓이다.
■ 마지막까지 “평화 통일” 1990년 이화여대 정년퇴임 뒤에도 이 명예교수는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97년부터 ‘제2의 고향’인 경남 진해에서 부친이 세운 경신사회복지재단 부설 사회복지연구소 소장과 어린이도서관인 ‘기적의 도서관’ 운영위원장을 맡아 지역사회 풀뿌리 운동에 헌신했다.
이 명예교수는 생의 끝자락까지 세상을 향한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이 명예교수는 91살이던 2015년 직접 제안한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고자 호소하는 여성 1000인’ 기자회견에 나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시급성과 절박함을 알렸다. 이 명예교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역시 ‘남북이 화해해 평화 통일을 이루자’인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이효재 선생님은 어두웠기에 더욱 별이 빛나던 시절, 큰 별 중 한 분이셨다. 선생님의 삶에 큰 존경을 바치며 삼가 명복을 빈다”고 추모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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