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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낙태죄 유지’, 여성은 여전히 ‘처벌의 틀’에 갇혀있다

등록 2020-10-07 20:29수정 2020-10-08 02:40

‘낙태죄 유지’ 입법예고안 논란
“헌법불합치 결정 취지 훼손
여성 건강권·자기결정권 침해”
정부가 형법상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초기인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7일 오후 서울 국회 앞에서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이 시위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형법상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초기인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7일 오후 서울 국회 앞에서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이 시위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낙태죄’를 존치시키되 임신 14주 이내에는 조건 없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형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미프진’처럼 약물을 이용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내용의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도 내놨다. 정부는 “태아의 생명권 보호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실제적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법조계와 여성계에선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취지를 협소하게 해석해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4월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후속조처로 7일 정부가 내놓은 형법·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을 보면, 임신 14주까지는 임신중지가 가능하고, 14~24주에는 지금까지 예외적으로 허용해준 경우에 더해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을 때도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임신 24주까지 △본인이나 배우자가 정신장애·신체질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준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인척간 임신 등의 경우에 임신중지를 처벌하지 않았다. 입법예고안은 또 수술뿐만 아니라 약물을 이용한 임신중지를 허용하고, 의사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 진료 거부를 인정하는 내용도 담았다. 심신장애의 경우 시술 전 본인 대신 법정대리인의 동의로, 미성년자는 보호자 동의 대신 상담사실확인서로 갈음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별도의 브리핑 없이 입법예고안 설명자료에서 이런 내용이 “태아의 생명 보호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실현을 최적화”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낙태죄가 존치됨으로써 여성계에서 오랫동안 지적해왔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게 됐다. 가령 성폭력이나 장애, 미성년 등의 이유로 임신 사실을 늦게 알게 됐거나, 임신중지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 경우, 심각한 건강상 문제가 있더라도 24주가 넘으면 임신중지를 할 수 없거나 낙태죄로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처벌받는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인 여성이 낙태죄의 부담을 고스란히 지게 되는 셈인데, 입법예고안은 이런 현실을 담지 못했다. 홍연지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장은 “현장에서 임신 후기에 임신중지를 하는 경우를 보면, 비용을 구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또는 청소년이란 이유로 병원도 방문하지 못하고 숨기느라 미룬 경우”라며 “처벌이 아니라 이런 현실을 우선 진단하고 고쳐나가야 한다”고 비판했다.

14~24주 사이 예외적으로만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것도, 여성이 성폭력 등 임신 경위, 사회적·경제적 어려움을 ‘입증’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16살 미만 미성년자는 법정대리인이 없거나 그로부터 폭행·협박 등을 당했다는 것을 공적인 자료로 입증해야만 상담사실확인서로 시술을 받을 수 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어 “정부가 헌재 결정의 핵심을 임신 주수에 따라 형사처벌의 범위를 정하는 것으로 협소하게 이해했다”며 “개정안은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과 기본권 제한의 과잉금지 원칙 위배,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침해 등 위헌 소지가 크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헌재 결정문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언명은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원치 않은 임신을 예방하고 낙태를 감소시킬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는 등 사전적·사후적 조치를 종합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명시돼 있다. 낙태죄 헌법소원 대리인단에 참여했던 천지선 변호사는 “헌재는 형사처벌만이 방법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사처벌이 실효성도 없어 여성의 권리만 침해해왔다며,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실질적인 지원방안을 모색하라는 이야기도 많이 담았는데 이는 24주 이후 임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라며 “이번 법안이 헌재 결정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여성의 건강권과 기본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법이 발전하고 있는 국제적인 추세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캐나다에선 1988년 모든 기간의 임신중지를 허용했고, 프랑스는 지난달 하원에서 모든 기간의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주에서도 낙태죄를 폐지했다. 낙태죄 헌법소원 대리인단 단장을 맡았던 김수정 변호사는 “일각에선 유럽에서도 낙태죄를 유지하거나 임신 후기엔 임신중지를 못하게 한다며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지만, 그건 유럽 법제도가 종교적인 영향을 받은데다 아주 옛날에 입법이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벌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 사실상은 사문화된 조항”이라며 “한국이 66년 만에 처음 법을 개정하면서 왜 과거의 입법례를 따라야 하나”라고 비판했다.

박다해 황예랑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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