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북부의 뉴잉턴 그린에 세워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동상. AP 연합뉴스
“처칠을 기리기 위해 젊고 매력적인 남성이 벌거벗은 동상을 세워놓는다고 상상해봐라.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도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 선구자’를 기리기 위해 223년 만에 처음 세워진 동상이 영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동상 주인공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겼던 18세기에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고 역설한 <여성의 권리 옹호>(1792년)를 펴낸 여권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다. 선구적 페미니스트에 대한 뒤늦은 기념물이 논란의 중심에 선 이유는 동상 속 울스턴크래프트가 나체였기 때문이다. ‘예술작품 속 여성들은 왜 항상 나체여야 하는가’라는 여성계·예술계의 오래된 문제제기에 다시 불이 붙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10일(현지시각) 영국 런던 북부의 뉴잉턴 그린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전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세상을 떠난 뒤 223년 만에 영국에 처음으로 세워진 동상이다. 여성인권 수준이 낮았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인물인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갖고 있다. 여성이 복종해야 할 대상은 아버지나 남성이 아닌 인간 본연의 이성”이라고 주장한 선구적 사상가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 등에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교육과 정치참여의 기회를 제공 받아야 하고, 여성이 이성을 지닌 인격체로 인정받을 때 인류 역시 발전할 수도 있다고 했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소설가
메리 셸리가 그의 둘째 딸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 셸리를 낳은 뒤 산욕열에 시달리다 닷새 만에 38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울스턴크래프트 동상 설립을 위한 비용을 모으는 데만 10년이 걸렸다. 런던의 동상 중 90% 이상이 남성을 기린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꾸린
‘메리 온 더 그린’은 울스턴크래프트 동상 제작을 위해 지난 10년간 14만3000파운드(한화 2억1000만원가량)를 모았다. 모금을 주도한 작가 비 롤럿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 동상은 분명히 대화와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회 분열이 심해지는 때에 적절한 공적 선언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게릴라 걸즈 1989년 포스터. 게릴라 걸즈 누리집 갈무리
논쟁은 롤럿이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불붙었다. 영국 원로 작가인 매기 햄블링(75)이 만든 동상은 울스턴크래프트를 나체의 여성으로 묘사했다. 당장 트위터 등 SNS에는 비판이 쏟아졌다. 작가 언티 말로리 블랙맨은 자신의 트위터에 “나는 많은 남성 작가, 활동가, 철학자의 동상을 봤지만, 그들 중 누구도 벌거벗은 모습이었던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썼다. 페미니스트 작가 클레어 휴천 역시 “페미니스트 글쓰기와 정치의 선구자인 그를 성적 대상으로 몰아넣으면서 ‘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수많은 남성에게 바쳐진 동상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옷을 벗고 있지는 않았다”고 비판했다.
매기 햄블링은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동상으로도 논란을 일으켰었다. 1998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놓인 동상은 관 모양의 검은 대리석 위에 과장된 형태의 오스카 와일드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다.
여성을 나체로 묘사한 예술작품은 예술계의 오랜 논쟁거리다. 1985년 세워진
미국의 미술계 페미니스트 그룹 ‘게릴라 걸즈’는 지난 30여년 동안 예술계와 예술작품 속 성차별을 날카롭게 고발해왔다. 고릴라 가면을 쓰고 게릴라 시위를 벌이는 이 단체의 가장 유명한 활동은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에 고릴라 얼굴을 덧댄 포스터다. 이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달려있다.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벌거벗어야 하는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근대미술 부문에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5%밖에 걸려 있지 않은 반면, 이 미술관에 소장된 누드화의 경우 85%가 여성이다.”
여성 작가에게는 문턱을 높이면서, 동시에 알몸인 여성은 작품 속에 빈번하게 등장시키는 예술계의 성차별적 시선과 태도를 꼬집은 것이다.
논란의 중심에 선 울스턴크래프트 동상의 작가 매기 햄블링은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비판’이라고 했다. 여성 성소수자인 그는 영국 매체 <이브닝 스탠다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보통의 여성’을 상징하고, 옷은 그 의미를 제한한다. 과거의 복장을 한 동상은 그 복장의 시대에 속한다. 내게는 그녀가 ‘현재’에 속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 동상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위한’ 것이고, 그것이 결정적이다. 이 동상은 나체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 동상을 ‘현재’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주장에도 나체 동상에 대한 비판은 가라앉지 않는 모양새다. <가디언> 칼럼니스트 리아논 루시 코슬렛은 ‘보통의 여성’을 상징하려 나체로 만들었다는 작가의 주장에 대해 “이상화되고 객체화된 과거의 누드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보통의 여성’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문제다. 오랫동안 여성의 예속을 뜻해온 저 텅 빈 여성성 말이다. 내가 왜 저 동상을 증오하는지 알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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