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기만 했던 텃밭 새싹들은 물과 햇살만으로도 무럭무럭 자랐다. 신소윤 기자
텃밭 가꾸기는 코로나19 시절 적절한 취미였다. 3평 텃밭은 이 시대 아파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만, 초보 농부인 나는 늘 일하기 적절한 시간에 농장에 간 적이 없어서인지 타인과 접촉할 일이 드물었다. 지난여름 태양을 마주할 일 없는 재택근무자는 텃밭에 가서야 햇볕을 쬐고, 땀도 흘리곤 했다.
그리고 지난 1년은 그 어느 때보다 집밥을 많이 해 먹은 때다. 평생 삼시 세끼를 집에서 모두 해결한 적이 유아기 이후론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바야흐로 ‘돌밥돌밥’(돌아서면 밥 차리는 일)의 시절인 것이다. 텃밭은 돌밥돌밥 일상의 많은 부분을 채워줬다.
우선 ‘아낌없이 주는 상추’가 있었다. 청상추, 적상추, 로메인 너나 할 것 없이 상추들은 물만 주면 무럭무럭 자랐다. 웬만하면 벌레도 잘 끼지 않았다. 상추를 딸 때면 절단면에서 하얗고 끈끈한 진액이 나왔는데, 이 진액 속 성분이 벌레를 쫓는다고 한다. 여름이 되면서부터는 오이, 고추, 가지, 토마토 등이 차례로 통통한 열매를 맺었다. 한여름 가지가 시장에서 왜 두개에 천원밖에 하질 않는지, 나는 가지를 기르면서 비로소 알게 됐다. 누군가 풍선을 부는 것처럼 쑥쑥 자랐다.
밭에서 수확한 가지, 바질, 토마토 등으로 풍성한 밥상을 차렸다. 신소윤 기자
물론 수확의 달콤함만 맛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름 모를 수많은 벌레, 새들과 농작물을 나눠 먹었다. 케일은 잎 한장 수확해보지 못했다. 배추흰나비벌레는 케일을 좋아해서 케일벌레라고도 부른단다. 이 배추흰나비벌레가 잎을 갉아먹어 성긴 그물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모습을 봤을 땐 허탈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바질엔 거뭇거뭇한 총채벌레가 끼었고, 토마토를 딸 때면 새들이 콕콕 파먹은 자국이 난 열매가 수두룩했다.
그렇다고 벌레와의 결전을 벼를 일은 아니었다. 거창하게 자연과 벗 삼으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우리는 이미 잡초와 전쟁을 치르느라 지쳐 있었던데다 무슨 약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알 여력도 없었다. 얼렁뚱땅 무농약 친환경 농사를 지은 셈이다.
무엇보다 3평 텃밭 수확물은 새와 벌레와 나눠 먹고도 우리에게 넘칠 만큼 많았다. 밭에는 밭의 시간이 흐른다. 연달아 주렁주렁 맺히는 작물의 속도에 맞춰 우리는 부지런히 식탁을 차리고, 같은 재료로 어떻게 달리 먹을지 골몰해야 했다.
“지금은 올해 들어 ○○을 가장 많이 먹는 시즌이야.” 상추, 가지, 쑥갓, 고추 등이 빈칸을 차례차례 채우며 지나갔다. 그 많던 가지는 나물로 무쳐 먹고, 토마토소스와 치즈를 얹어 오븐에 구워 먹고, 튀겨 먹었다. 오이는 제때 따오지 않으면 금세 누렇게 늙어버려서 어쩐지 서글펐다. 소금을 뿌려 물기를 꼭 짜 볶아 먹고, 고추 양념에 무쳐 먹고, 샐러드에 곁들여 알뜰히 먹었다. 토마토는 생으로 먹다가 샐러드, 카레에 넣기도 하고, 마지막에 남은 것들로는 토마토솥밥을 해 먹었는데 달큰하고 보드라운 것이 또한 꿀맛이었다. 동네 친구들에게 인심을 베풀기도 했다. 상추가 풍년일 때 아니고서는 내 평생 그렇게 후하게 초록 잎사귀를 사람들에게 남발할 수 있겠나.
올리브유에 절인 말린 토마토는 여름의 기운을 단단히 머금고 있는 듯 했다. 신소윤 기자
나눠주고도 남는 작물들은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향이 좋은 쑥갓, 바질은 페스토로 만들었다. 잣, 올리브유, 치즈, 마늘을 넣고 블렌더에 갈아 파스타에 비벼 먹고, 빵과 크래커에 발라 먹고, 샐러드드레싱으로 쓰기도 했다. 매주 한 소쿠리씩 따 온 고추는 마른 멸치와 함께 다져 조선간장, 참기름을 넣고 자작하게 볶아 고추장물을 만들었다. 이걸로 김밥을 싸면 고추김밥, 파스타 면을 넣고 볶으면 알리오올리오다. 입맛 없을 때 찬물에 밥 말아 조금씩 집어 먹으면, 폭발하는 맵고 짜고 고소한 맛이 십 리쯤 도망간 입맛도 돌아오게 할 마력이 있다.
지난봄 우리는 3평 텃밭을 보며 이 작은 땅에서 농사 기술도 없는 우리가 뭘 거둬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넘치게 충분했다. 제철 재료로 부지런히 밥을 해 먹으며 계절을 몸속에 차곡차곡 쌓았다. 뜨거운 여름의 기운을 뱃속에 저장한 채 우린 다음 계절을 향해 달려나가기로 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