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개의 배추 모종과 30개의 무 모종은 가을볕을 맞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가을 농사는 봄여름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지난봄 호기롭게 도전한 첫 농사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심고 키운 작물들이 익숙한 덕분도 있었다. 상추나 토마토는 누구나 한번쯤 ‘키워볼까’ 하며 베란다에서, 창가에서 도전해봤던 작물들 아니던가. 수년간 도전과 방치와 실패를 반복해왔던 그 농사의 기억이 몸과 머리에 알게 모르게 축적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봄여름 농사를 돌이켜보면 한바탕 축제 같았다. 정신없이 열매를 맺던 토마토, 고추, 가지와 루콜라, 바질 잎을 따서 바구니 가득 담곤 했다. 수확의 즐거움, 풍성한 식탁이 화려했던 계절이다.
물론 실패도 있었다. 쑥쑥 자라는 다른 작물에 비해 셀러리는 나무인가 싶을 정도로 더디게 자라다 말았고, 바질은 잎을 만발하다 급작스레 병을 얻었다. 원인을 분석하고 대처법을 찾아야 다음 농사에 적용할 수 있을 텐데, 신문·방송업계 종사자인 나와 나의 텃밭 메이트는 늘 본업에 쫓겨 그럴 여력이 없었다(고 치자).
가을 농사는 다가올 길고 긴 겨울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배추는 상추에 버금가게 빠르고 무성하게 자랐지만, 상추처럼 중간중간 잎을 뜯어 먹을 일은 없었다. 분주하지 않아 좋았다면 좋았고, 심심하다면 좀 심심했다.
열무 모종을 심은 지 4주차쯤, 줄기가 꽤 자라 있었다. “마트에서 파는 게 이 정도 사이즈 아니야? 이제 먹어도 되는 건가?” 텃밭 사장님에게 “얼른 뽑아다가 김치 담가 먹으라”는 확인을 받은 뒤, 우리는 첫 가을 수확을 했다. 친구와 수확물을 나누니 내 몫으로 한단 남짓한 분량이 돌아왔다. 뿌리에 붙은 흙을 털어내고 집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이제 이걸 어쩐다? 열무로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의외로 다양하다. 김치는 물론이고, 야들야들한 잎을 모아 나물을 무쳐 먹기도 하고, 새우젓이나 된장을 넣고 자작하게 지져 먹는 것도 맛이 좋다. 그중에서도 곧 다가올 배추, 무 수확과 김장을 대비해 김치를 담가보고 싶었다. 한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구원투수를 호출했다. “어머니, 제가 열무가 많이 생겨서요. 이걸 다 어쩌죠?” “얼마큼인데?” “한단쯤 되려나?” “에계~ 나물이나 무쳐 먹어”라는 말을 한귀로 흘리고, 김치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했다. “열무를 설설 씻어서 소금을 훌훌 뿌린 다음 숨이 살포시 가라앉는 듯하면 딱 한번만 뒤집어서 그대로 뒀다가 숨이 죽으면 헹궈서 양념을 버무리라”고 했다. 시간도 분량도 없는 “적당히~” “대충 이렇게 저렇게” 수준의 레시피였지만 어쨌든 들은 대로 몸을 움직였다. 재차 확인 취재를 할 때마다 어머니는 “어어, 그 정도면 돼” “어어, 모르겠으면 맛을 한번 봐”라며 ‘적당한’ 추임새를 넣었다.
그렇게 만든 김치는 적당히 열무김치처럼 보이긴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렇게 만든 내 생애 첫 김치는 적당한 수준의 맛이 아니었다. 며칠 지나며 맛이 든 김치는 감칠맛이 폭발했다. 질긴 부분 하나 없이 부드럽게 아삭아삭 씹히는 열무는 양념을 담뿍 머금어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참기름과 통깨를 뿌리고 달걀 하나 부쳐 비벼 먹으면 어쩐지 씩씩한 기운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질 좋은 올리브유를 살짝 뿌려 먹으면 칼칼한 고추 내음과 풀 향이 확 올라오면서 또 맛이 기가 막힌다. 짜장라면 하나 끓여 옆에 곁들이면, 말해 뭐 하나, 환상의 짝꿍이다.
이렇게 얼렁뚱땅 첫 김치를 담그며 다가올 수십포기 배추와 무 수확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사라졌다. 봄여름 농사가 자잘한 이벤트가 빼곡한 것이었다면, 가을 농사는 굵직한 행사 하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겨울을 대비해 단단하게 채비하는 계절. 우리는 땅에서 끌어온 든든한 기운을 겨우내 저장하기 위해 달려가는 중이다.
신소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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