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저는 서울에 사는 30대 여자 취준생인데, 남자친구가 고민이에요. 우린 오래 사귀었고, 양가에서도 다 알고 계세요. 제가 취업하면 결혼하게 될 것 같아요. 남친은 ‘썸녀’가 끊긴 적이 없어요. 돈이 많거나 잘생긴 것도 아니지만 여자한테 친절해요. 친구도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아요. 직장 때문에 경기도에 있는 남친은 우리가 만나는 짧은 시간에도 끊임없이 썸녀 1, 2, 3과 통화를 합니다. 담배를 피운다며 밖으로 나가서 아예 한두시간을 해요. 집이고 식당이고 술집이고 카페고 가리지 않고 전화를 합니다. 처음에는 되게 긴급하고 중요한 일인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소한 상담 같은 거였어요. 썸녀 1은 저만큼이나 오래된 관계이고 친밀해요. 서로 책을 권하거나 주식 투자 같은 정보도 교류하는 모양입니다. 돈도 좀 오가는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캐물으면 화를 내거든요. 썸녀 2는 회사 동료인데 이혼을 할 때 도와주었다고 들었어요. 썸녀 3은 후배인데 자기 계발 상의해주는 것 같아요. 1은 꾸준히 연락하고 통화 비중은 2, 3이 그때그때 바뀌어요. 새로운 썸녀 4, 5가 나타나기도 해요.
어릴 때 아빠가 가족 말고 다른 사람들 돕느라 정신없었던 걸 여러번 보아서 남친이 저러는 게 너무 싫어요.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여자인 것도 싫고요. 이제 와서 헤어지고 싶지는 않지만 결혼한 뒤에도 계속 썸타는 여자들이 있을 게 뻔해서 속이 곪아요. 딱 인연 끊자니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까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민 많은 취준생
A. 세상의 반이 여자이고, 또 세상의 반은 남자인데, 다른 이성과 연락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짧은 데이트 도중에도 대놓고 다른 여성과 끊임없이 친밀한 연락을 하는 것은 그냥 ‘썸’이라고 표현할 일이 아니지요. 그건 당신과 몸은 함께 있지만 당신에게 궁금한 것이 없다는 뜻이지요. 당신과 몸은 함께 있지만 당신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당신에 대한 ‘태도’이고, 이러한 ‘태도’는 이미 마음의 반영이기에 쉽게 변하지 않지요. 누군가와 약속 잡고 만나놓고, 한두시간씩 통화하는 것은 모든 관계를 통틀어 ‘잘못된 행동’이고 ‘매너 없는 행동’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남친은 썸녀가 끊긴 적이 없어요’라는 이상한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썸을 탄다’ ‘썸남·썸녀다’라는 말을 쓸 때 그 사람에게 공식적인 연인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남친은 썸녀가 끊긴 적이 없다’는 말은 그런 점에서 꽤나 충격적이면서도 지금 당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정확히 보여주는 표현이 됩니다. 당신은 이 관계에서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이 맞습니다.
이제 아프더라도 직면해야 하는 것이 당신에게 과제로 남습니다. 왜 이렇게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하는 관계에 내가 놓여 있게 되었는가? 저는 그것이 바로 ‘의무감’이라고 봅니다. 양가에서도 아는 오래 사귄 사이, 내가 취업만 하면 결혼으로 골인 할 사이. 이미 삶의 스토리가 모두 정해져 있다고 느끼기에 결혼은 내가 두루 살펴보고 나를 위해 하는 선택이 아니라 숙제처럼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과제’가 되어버렸지요. 삶에 유익한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혼 그 자체를 해내는 것이 과제가 되어 있으니, 말씀하신 대로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에 대한 본전 생각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관계라는 것을, 마치 몇번만 더 부으면 되는 적금처럼 여기니 중도 해약하는 것이 아깝다 여기게 되지요. 하지만 결혼이라는 게, 적금과 같은 게 맞나요?
앞으로 남은 평생 크고 작은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조율하며 함께 걷는 삶의 동반자를 정하는 일이 결혼이지요. 적금은 한번 타면 그것으로 ‘종료’이지만, 결혼은 결정하는 순간부터가 남은 삶의 ‘시작’입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연애를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캐물으면 화를 내는 사람과 이뤄가는 결혼 생활의 어떤 부분이 좋을 것으로 기대하실 수 있나요?
사연자분, 존중받지 못하면서도 결혼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이 의무감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하셔야 합니다. 또한 많은 경우, 의무감 뒤에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시길 바라요. 남들보다 늦게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조바심, 이 사람 말고 누가 나를 선택해줄까라는 두려움, 30대 여자 취준생으로서 가지는 내 인생에 대한 불안감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결혼이라도 빨리 정해야겠다’라는 마음으로 향해버린 것은 아닌가요? 조급하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의무감은 시력을 나빠지게 하지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내 인생을 함부로 대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인가요 아니면 나 자신인가요?
작가, 메디테이션 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