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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너니까 말하지”…그만 듣고 싶은데, 어떻게 하죠? [ESC]

등록 2022-09-17 12:00수정 2022-09-17 15:36

곽정은의 단호한 관계 클리닉

Q. 저는 세 딸 중 둘째입니다. 언니는 공부를 잘해 20대 중반에 유학을 갔고, 막내는 마냥 귀여웠습니다. 저는 공부도 그닥, 귀여움도 그닥. 진작 독립한 둘과 달리 저는 결혼 직전 30대 초반까지, 부모님과 가장 오래 한집에 살았습니다. 그런 때문인지 엄마는 언젠가부터 “너니까 내가 말하는 거야”로 시작하는 말을 제게 자주 하십니다. 처음엔 ‘엄마가 셋 중 나를 가장 편하게 생각하나 보다’라는 생각에 기뻤어요. 그런데 이게 십수년 계속되니 엄마가 저를 단순히 감정의 배출구로 생각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몰라도 되는 친척들의 처지를 알게 되고, 한번은 엄마가 친구에게 돈을 떼이고 전전긍긍하시길래 제가 메꿔드린 적도 있습니다. 엄마의 ‘너니까~’ 타령이 버겁지만, 그만하시라고 했다가 엄마와 관계가 멀어질까 두렵습니다. ‘이제 그만’ 외치고 싶은 딸

A. 아마도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스스로가 ‘공부도 그닥, 귀여움도 그닥’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그저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면 되는데 언니, 동생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소개하는 이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세요. 추측건대 어머니는 늘 당신을 언니나 동생과 비교하면서 애정보다는 평가를 많이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연약하고 백지 같았던 어린 시절의 당신은 그 이야기들을 거부할 힘도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고요. 있는 그대로는 사랑받을 수 없겠다는 생각, 특출한 것이 없으니 사랑을 받으려면 고분고분 이야기라도 잘 들어야겠다는 생각들은 보통 애정은 없고 평가는 강한 냉담한 부모라는 환경에서 싹을 틔우지요. ‘너니까 내가 말하는 거야’로 시작된 엄마의 이야기들은, 이러한 슬픈 배경 속에서 당신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엄마의 말에만 집중한다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저 괴로움과 죄책감을 오가게 될 가능성이 클 수 있어요. 괴롭지만 결국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죠.

사랑받고 싶고 사랑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아이는 쉽게 부모의 생각을 내면화하고 그것이 때로 평생의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이미 내 마음이 괴롭고 버겁다고 호소하고 있지 않나요. 나는 충분히 괴롭다고 외치고 있는데, 한마디도 거절하지 못하는 까닭은 뭘까요. 엄마와의 관계가 멀어질까봐 두렵다 하셨는데,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딸이 되는 것이 두려운 것’에 가까울 겁니다. 몸은 커서 3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운 아이가 있지 않나요? 어렵더라도 더 늦기 전에 결정해야 합니다. 내 괴로움을 인정하고, 더 이상 나를 괴로움에 방치하지 않겠다는 결정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은, 어렸을 때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겪어야 했던 부정적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풀려나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너무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한 인간의 진정한 독립이고 성장이지요.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뭐든 다 들어주는 것이 자식의 의무는 아닐 것입니다. 내 괴로움을 무시하면서까지 부모의 욕구를 맞춰줄 이유도 없습니다. 제대로 된 부모라면, 내 아이가 괴롭다는데도 그 행동을 반복하거나 강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엄마의 욕구를 맞춰드리는 것의 10분의 1이라도 내 마음을 봐주면 어떻겠습니까? 부모에게 어떠어떠한 자식이기 전에, 내가 나 그대로 나를 봐주면 어떻겠습니까? 착하지만 괴로운 딸이 아니라, 엄마를 당황시킬지는 몰라도 자신을 위한 결정을 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 살면 어떻겠습니까? 말하세요, 그런 이야기들이 불편하다고. 말하세요, 견디기 힘들다고. 진통은 있겠으나, 결국 당신을 위한 결정이 모두를 위한 결정이 될 것입니다. 엄마는 한동안 화가 나 연락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또 어떻습니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무엇을 잠시 잃는대도 당신 자신을 영영 찾지 못하는 것보다는 사소한 일일 것입니다. 나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향한 사랑이자 부모를 향한 가장 고귀한 사랑일 것입니다.

곽정은 작가, 메디테이션 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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